522화 서울 정벌 (9)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고 했던가.
김정태는 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연설했던 그 자리에서,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로 바닥에 내던져졌다.
이미 뺨을 수차례 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김정태는 피 웅덩이에 머리를 박고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그의 머리를 밟고는 검을 들이밀었다.
척.
“김정태 대통령. 너의 죄는 명백하다. 이 나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너는 지방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특권처럼 사용했으며, 사람들은 서울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 너의 눈치를 보았다. 대한민국은 그때부터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힘없는 백성들은 혼란한 세상에 네게 감히 대항할 수 없었고, 너는 대한민국 전체를 인질 삼아 권력자의 삶을 누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바탕 학살이 벌어졌던 자리에, 김정태가 목소리를 높였던 그 자리에 서울 시민들이 존재했다.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반란의 이유를 말했다.
“네 존재는 나의 사람들을 위협한다. 대한민국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네 녀석을 도려내야만, 이 나라는 올바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 그래서 나는 검을 들었다. 20년간 대한민국을 나락으로 빠트린 네 녀석과 중앙 정부를 단죄하기 위해, 그리고 어리석게도 네가 이 나라의 정의라 믿는 존재들에게 참담한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나는 피를 보았다.”
슥.
검을 들었다.
살의를 느꼈기 때문일까.
김정태가 아득바득 고개를 들더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나라 사람들이 널 받아 줄 것 같아?! 천만에! 이 나라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네가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 네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수도 없이 많다는 의미다. 그리고 국제법을 어긴 너로 인해서 대한민국은 위험해질 것이다. 내 부정은 이 나라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목소리를 높였다.
부정부패(不正腐敗).
그것을 필요악이라 생각했다.
김정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고, 악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사람들이 날 받아들이고 말고는 그들의 문제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을 받아들일 것이며, 네가 사라진 미래에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할 것이다. 나의 백성들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내뱉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란 그런 자리다. 책임을 회피하고 혜택만 누려 온 너는 죽어 마땅하다.”
“제, 제발!”
김정태가 눈을 부릅떴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본인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몸을 격하게 움직이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단호하게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퍽.
김정태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 * *
툭.
데구루루.
김정태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리를 따라갔다.
대한민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존재가, 정말 하루아침에 명을 달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김정태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이 그들의 심장에 푹푹 박혔다.
“나의 백성들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내뱉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란 그런 자리다.”
그 말.
사실 당연했다.
지도자란 백성들을 책임지기 위해 선출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김정태의 방식이 옳다고 믿어 왔다.
처음에는 분명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김정태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단해 버리자,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었다.
서서히.
김정태를 정의라 믿었다.
그를 위해 무기를 들었고, 김정태가 내뱉는 말들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어느 순간부터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부정부패의 온상이라 불렀지만,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만약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사람이 이 나라를 통치했다면, 사람들은 피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무기를 들이밀었다.
지금은.
진실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동안 간절히 바라 왔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지도자는 그것을 의무로 삼아 주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 남편은 저를 서울로 보내기 위해서 목숨을 잃었어요. 모두가 서울에 들어오길 바랐고, 가족들의 희생으로 서울에 들어온 사람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로만 드미트리 님. 제게는 백성의 안위를 돌보겠다는 그 약속 하나면 충분합니다. 김정태는 틀렸어요.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이며, 부디 이 나라를 보살펴 주세요.”
그녀가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출신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백성들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말. 그 약속 하나면 이 참담한 전쟁에서 제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을 가슴에 묻어 두겠습니다. 대한민국은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번 내란으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앞으로 변화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만 남지는 않을 겁니다.”
다들.
진심을 토해 냈다.
현실을 직시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잔인한 손속은 역설적으로 그의 진심을 증명했다.
사람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과 다시 만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알았다.
백성의 존재.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지도자의 자리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혼자서 살아갈 생각이었다면, 군림과 같은 거창한 목적은 처음부터 시도할 의미 자체가 없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그리웠다.
가끔 그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로만 드미트리는 현실에 더욱 충실했다.
자신의 바람을.
현실로 만들어 낼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다. 그 어떤 위협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낼 것이며,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내고 절대자를 처리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에, 평화를 되찾을 세상에서 너희는 나의 백성으로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열망이 들끓었다.
전 세계를 통치할 것이다.
절대자의 머리를 날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겠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로만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
사람들은 김정태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 * *
그 무렵.
조달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반란 세력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밀려났고, 그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급히 중앙 정부에 연락했다.
“반란 세력이 금천구를 공격했다. 우리가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금천구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 당장 지원군을 바란다. 한시라도 빨리…….”
[다 끝났습니다.]
“뭐?!”
통신 너머.
맥이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통신병의 말에 화를 내려던 조달수는, 곧바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다시 말해 드려요? 다 끝났다고요. 방금 김정태의 머리가 날아갔습니다. 중국의 지원군마저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서 발을 뺀 마당에, 중앙 정부가 승리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정태의 머리가 날아갔다니!
중국의 지원군이 후퇴했다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태준 조사관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말했다.
“의원님! 중국 지원군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가겠답니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다는데, 만약 그들마저 자리를 떠난다면 금천구의 전력으로는 몬스터 웨이브와 반란 세력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기증이 일었다.
통신병의 말.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국의 지원군이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 물러날 리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건가. 서울 한복판을 공격해서 김정태 대통령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중국에서 무려 검귀 샤오룽이 나섰는데도 퇴각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끝이야. 이건 답이 없어. 적대 의사를 밝힌 사람들을 모조리 처단해 버린 로만 드미트리의 손속을 생각했을 때, 애초에 분란의 시작이었던 나를 용서해 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아.’
암담했다.
현재 상황을 문태준 조사관에게도 알렸다.
진실을 듣자마자, 문태준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이대로 죽는 겁니까?”
중앙 정부가 몰락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라는 단 하나의 변수가 중앙 정부를 무너트렸다.
사고가 정지되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밖에서는 몬스터들이 밀려들고 있었고, 머지않아 로만 드미트리가 이곳 금천구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였다.
문태준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망명(亡命)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망명?”
“예. 로만 드미트리는 국제법을 위반했습니다. 어떤 명분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세계 정부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 문제를 빌미로 망명을 신청한다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의원님. 어차피 이곳에 있다가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죽을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좋은 방법이었다.
당장 안전을 확보하면서, 세계 정부를 부추겨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김정태 대통령이 없는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나 조달수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할 확률이 높겠지.’
웃음이 씰룩 새어 나왔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던가.
이건 기회였다.
조달수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문태준 조사관! 만약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너의 공을 잊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걸음을 서둘렀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빨리 금천구를 벗어나야 했고, 마법사 몇 명을 대동하고는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법진 위.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다.
마법사가 마력을 분출했다.
“텔레포트!”
눈을 뜨면.
자신은 저 멀리 미국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에?”
공간 이동을 끝마쳤을 때, 조달수의 시야에는 박민우를 필두로 반란 세력이 보였다.
* * *
조달수의 계획?
박민우는 이미 예상했다.
패배를 수차례 경험(?)했던 박민우였기에, 그는 미리 마법 방해로 텔레포트의 좌표를 틀어 놓았다.
그 결과.
조달수는 적진 한복판에 나타났다.
얼이 빠진 조달수와 문태준의 모습에, 박민우가 백일의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이게 바로 중앙 정부의 추악한 진실이다.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해서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본인의 목숨이 위험해지자마자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래도 우리가 악인가? 아니, 중앙 정부가 악이다. 우리는 정의를 행했을 뿐이고, 백일은 그 존재 의미를 증명했다.”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백일의 마법사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박민우를 믿었다.
자신들이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더 격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박민우가 속으로 웃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백일의 신뢰를 다시 한번 공고히 했다.
일련의 상황.
아직 로만 드미트리가 없다는 사실에, 조달수가 황급히 말했다.
“배, 백의의 마법사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전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저와 같은 몇몇 인재들에게는 참회의 기회를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백번이고, 천 번이고 머리를 숙여 사죄하겠습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문태준도 가담했다.
그들은 박민우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박민우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내가 왜 너희를 죽이지? 내게는 너희를 처벌할 권한이 없다.”
조달수와 문태준.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둘을 포획한 것이 한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전쟁이 긴급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박민우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존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 선물(?)을 좋아하시겠지?’
박민우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차원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차원 너머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만 드미트리 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등장에, 조달수와 문태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