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서울 정벌 (3)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로만 드미트리와 둘만 남은 김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저는 대재앙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공략하는 선택이 실익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제법을 위반해서라도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다면, 반란으로 생겨날 대한민국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중앙 정부와의 전쟁에서 지방 정부들을 굳이 배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인천은 쉽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명백한 모순이었다.
적으로 규정한 중앙 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전쟁에 힘을 실어 줄 지방 정부의 도움은 바라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국제법의 리스크를 안고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생각이라면 지방 정부들을 동원해야 하고, 반대로 굳이 지방 정부를 배제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국제법의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지방 정부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반란’의 계획이 발각되었다.
대재앙이라는 상황적인 이점은 존재하나, 기습적인 공격은 불가하게 되었다.
김준혁은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만약 모순을 해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기 전에.
그는 인천의 시장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는 내가 어떤 미래를 바란다고 생각하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힘이라면, 사실 인천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았을 겁니다.”
“네 말처럼 내게 인천은 그리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폐허 위에서도,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인천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맺었고,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김준혁. 나는 이 세상을 군림하고자 한다. 인천에서 시작해 갈래를 뻗어 나갈 것이고, 대한민국을 넘어 세상 전부가 나를 우러러보게 할 것이다.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천마.
드미트리 황제.
두 번의 삶에서, 두 번 모두 군림하며 살았다.
새로운 삶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방식을 추구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중앙 정부, 나아가 전 세계를 상대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 지방 정부들을 규합해서 반란을 성공시켰다가 아니라, 인천이, 나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으로 중앙 정부를 쓸어버리고 대한민국을 차지했다는 명확한 선례. 그러한 전제가 중요한 것이다. 전장에서 적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나, 나는 이번 전쟁에서의 전과가 온전히 나를 수식하는 결과이기를 바란다.”
김준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항상 충격의 연속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경험하면서, 김준혁과 같은 일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대담하게 군림을 말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존재기에 전 세계를 감당하겠다는 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아득히 높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차마 가늠할 수 없겠지만, 지금껏 경험한 그는 내뱉은 말을 현실로 만들어 낼 사람이었다.
믿었다.
모순이 아닌, 비상식이었을 뿐이다.
압도적인 힘을 갖추고 있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비상식의 영역을 주저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김준혁과 같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것들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다.”
* * *
첫 목표는 하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병력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박민우와 백일의 마법사들, 그리고 직할대만을 대동했다.
박민우는 텔레포트 마법을 위해.
백일은 박민우를 따르기 위해.
직할대는 인천의 업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대동했다.
사실 혼자서도 하남을 쓸어버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천을 동반한 공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분이었다.
인천에 터를 잡고, 중앙 정부를 무너트리는 일련의 과정.
드미트리의 장남이 카이로를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심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 갔다.
침략이 아닌 적법한 형태로. 로만 드미트리는 인천의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거듭날 것이다.
하남과 조금 떨어진 거리.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을 바라보았다.
다소 긴장된 얼굴로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들에게 미리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적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전장에서 적을 맞닥트린다면, 그것은 서로의 목숨을 취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인다.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다. 적을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것이고, 실제로 중앙 정부는 인천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았을 뿐,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번 작전.
지방 정부를 동원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였다.
새로운 세상은 전생들과는 조금 달랐다.
무림이나 샐러맨더 대륙은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전생에서는 적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기준은 모호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살인을 끔찍하게 여기는 현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식이 남아 있기에, 그들은 전생의 삶보다는 살인에 있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가 많았다.
레드문.
그들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일을 벌였으나, 현생의 사람들은 그것이 타당한 일이었는지를 과하게 따져 물었다.
사람들의 인식.
로만 드미트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은 변했고, 중앙 정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본인들의 만행에 죽음이 따른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만약 살인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곳곳에서 살인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20년 전의 인식을 들먹이며 자비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중앙 정부는 사람들을 버렸다.
그것 자체가 살인 행위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직접적인 살인에만 특별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지방 정부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반란.
같은 국민끼리 싸우는 일이다.
그들의 손속에 깃들 자비를, 로만 드미트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이번 전쟁으로 적을 상대하는 우리의 방식을 증명할 것이다. 중앙 정부든, 전 세계를 대표하는 강대국이든. 앞으로 우리를 적대하는 존재들은 목숨을 거는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은, 전쟁 도중에라도 내 곁을 떠나도 좋다. 하지만 나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검을 뽑았다.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내 뒤만 보고 따라오너라.”
* * *
하남의 성벽 위.
감시병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직 대재앙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에,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몬스터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때였다.
감시병 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저길 봐!”
“어?”
저 멀리.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였다면 당장 전투를 준비했겠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문득 하남시장 정문호의 명령이 떠올랐다.
인천을 중심으로 뭉친 반란 세력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니, 만약 그들이 공격해 온다면 즉각 공격해서 사살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숫자가 너무 적었다.
예민하게 반응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숫자였기에, 감시병은 그리 급하지 않은 얼굴로 움직였다.
“일단 보고부터 할게.”
“알겠어.”
그것이 실수였다.
보고한다던 감시병이 무전 장치를 확인하는 순간, 머리 위의 하늘이 일그러지더니 무언가가 나타났다.
확.
퍼억!
머리가 날아갔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이제 막 감시병에게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있었는데, 전투를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로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경고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는 성벽 위를 무자비하게 휩쓸었고, 순식간에 수백의 병사가 죽어 나갔다.
“크악!”
“마, 막아!”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병사들이 발악했다.
그들은 동료들이 죽어 가는 모습에 분노하며 달려들었지만, 기습을 당하든 당하지 않았든 사지가 찢겨 나가는 결말은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 덕분에 성벽의 이점은 완전히 상실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하남의 병사들을 학살하는 사이에 직할대를 비롯한 병력도 성벽에 도달했다.
“플라이.”
그들이 날아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만 텔레포트로 보내 줄 것을 명했다.
일단 먼저 길을 열었고,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된 이후에야 직할대를 비롯한 병력이 도착했다.
압도적이었다.
겨우 백여 명이.
수천의 병사들을 압도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가는 족족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고,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 낸 뒤에 깔끔하게 보수를 마쳤던 성벽이 피로 물들었다.
전의(戰意)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싸워 보려던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몇몇 병사들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전장의 아이러니였다.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런 참혹한 상황을 몰랐을까?
알았다.
정문호는 반란 사실을 알렸고, 하남은 반란 세력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실제로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하자마자 죽이려고 했으나, 그들의 힘이 부족했기에 목숨을 구걸하는 상황에 놓였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반란 세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들이 약자의 상황이 되었으나, 그들은 승리하리라고 믿었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전쟁.
그 대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자신을 적으로 받아들인 선택은, 절대 어쭙잖은 자비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대로.
번뜩.
병사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 * *
조금 전.
정문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반신욕을 즐겼다.
대혼란 속에서 권력자가 즐길 수 있는 여유였고, 그렇게 깔끔한 얼굴로 밖으로 나온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렸다.
“큰일 났습니다! 반란 세력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미 성벽은 뚫렸고, 이대로라면 하남이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런 미친.”
눈을 부릅떴다.
공격이라니!
미리 반란 세력의 공격을 대비했지만, 정말 대재앙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공격해 올 줄은 몰랐다.
국제법은 대재앙 이후 한 달간 인간들의 싸움을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았던가.
중앙 정부조차도 인천의 반란 행위를 정식으로 문제 삼아 공격할 예정이었을 뿐, 절대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과감했다.
상대는 S등급 헌터.
병사의 말처럼 하남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정문호는 황급히 중앙 정부에 연락했고, 하남의 상황을 알려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지금 반란 세력이 하남을 공격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하남이 무너질 것이 분명한데, 하남의 상황을 그냥 지켜보겠다는 말입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원칙을. 서울은 아직 완벽하게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기에, 서울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하는 예외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서울의 안전이 확보되는 대로 빠르게 병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가 차갑게 반응했다.
순간.
정문호는 차영민의 말이 떠올랐다.
“명심하십시오. 하남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 중에서 최우선일 뿐입니다. 결국에는 서울에 밀릴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그 사실이 하남을 멸망의 길로 빠트릴 것입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남은 중앙 정부를 믿고 반란 세력의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중앙 정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내세운 인천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차영민의 말처럼 하남이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울을 기준으로는 후순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남의 일은 대통령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툭.
통신이 끊겼다.
희망이 사라졌다.
그때였다.
콰앙!
문이 박살이 났다.
활짝 열린 공간으로, 피로 물든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