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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11화 (511/615)

511화 달라진 상황 (3)

하늘이 맑았다.

제1 방어선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장윤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장윤태는 부산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백일에 입성했다.

지방에서 서울 진출까지.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였다.

수년 전 부산을 떠나던 날, 그의 친구들은 너만큼은 성공할 줄 알았다면서 훗날 금의환향(錦衣還鄕)하라며 응원을 해 주었다.

스스로를 믿었다.

자신의 재능이라면, 자신의 사회생활이라면 백일을 발판 삼아 도약할 것이다.

그런데.

망했다.

어제 박민우에게 끌려간 직후, 장윤태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폭언을 들었다.

“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돌았냐? 돌았어? 그래, 돌았겠지. 돌지 않고서는 그런 발언은 불가능하겠지. 씨발, 내가 눈빛으로 뭐라고 말했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이니까, 나를 거들어서 백일의 진심을 전달하라고 눈빛으로 수도 없이 신호를 보냈지? 그런데 뭐? 테스트으으으? 눈빛을 읽지 못했으면 그 주둥이라도 다물든가. 보는 눈이 있어서 널 백일에서 내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따위로 행동해 봐. 뒈지는 수가 있으니까.”

백의의 마법사.

정의의 사도는 그곳에 없었다.

눈빛을 대체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만 드미트리 앞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한참이나 폭언을 들어야만 했다.

장윤태는 참 처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예전에는 박민우의 신임을 받았었는데, 로만 드미트리와 연관되기 시작하면서 미운 오리처럼 낙인이 찍혔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던 일들이, 비상식을 마주하면서 그를 완전히 폐급으로 만들어 버렸다.

“들어가서 쉬어.”

“고생해.”

근무 시간이 끝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적절한 체력 안배를 위해서 사람들을 배치했고, 덕분에 대재앙이 발발한 혼란한 상황에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한숨은 끊이질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때, 장윤태는 휴대폰을 켜자마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윤태야. 어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말했던 것들 전부 진짜야?]

고향 친구였다.

걸음을 멈추었다.

어제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던 도중, 장윤태는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 떠들었다.

의도적이었다.

이번에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길드장님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만약 내가 주도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평판을 드높인다면, 길드장님도 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겠지. 그래.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만회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더 높이 도약할 수 있어.’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을 증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로만 드미트리 님과 대화할 자리를 마련해 줘.]

“후후후.”

예상대로였다.

부산은 로만 드미트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할 터.

누가 그의 위상을 알렸냐고 묻는다면, 장윤태는 앞으로 한발 나가 박민우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다.

* * *

같은 하늘.

다른 느낌이었다.

장윤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면, 박민우는 푸른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이게 삶이지. 이게 인생이지.’

뿌듯했다.

감정이 벅차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제 본인의 뜻을 밝혔다.

백일은 그게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박민우에게 중요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백성의 범주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은 항상 천마를 우러러보았건만, 드디어 그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미칠 듯이 행복했다.

세계 평화?

정의?

그딴 것들은 알 바 아니었다.

백의의 마법사로 살아온 삶은, 로만 드미트리의 백성이 되면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인천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 모르겠지. 전생의 드미트리처럼, 전생의 마교처럼. 천마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도 나를 외면하지 않는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는 의미지. 나는 드디어 천마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어. 나도 이제 천마의 사람이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뜨겁게 솟구치는 감정에, 자꾸만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그때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장윤태.’

눈엣가시였다.

사사건건 상황을 망치는 존재.

백의의 마법사라는 평판만 아니었다면, 장윤태는 이미 생과 사의 경계를 수차례 넘었을 것이다.

장윤태가 다가와 말했다.

“길드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분위기가 묘했다.

장윤태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부산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과 연락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부산? 왜?”

“후후후, 그건 바로 제가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 님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S등급 몬스터 그린 드래곤을 일격에 쓰러트리고, 레드 타임 당일에 몬스터 웨이브를 소멸시킨 엄청난 업적. 그걸 부산에 알렸습니다. 마침 제 친구가 부산 정부에서 수뇌부를 맡고 있어서, 로만 드미트리 님의 업적이 부산 전체에 알려진 모양입니다. 언뜻 듣기로, 부산 정부는 중앙 정부를 버리고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고 싶은 눈치인 것 같습니다.”

박민우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장윤태가 저지른 일.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인천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부산 정부가 소문을 듣고 연락한 이유는,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을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번 연락의 목적은 뻔했다.

인천의 안위를 생각해야 하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에게 부산의 연락은 달갑지 않았다.

고로.

달갑지 않은 일 → 장윤태의 소행 → 장윤태는 박민우의 사람 →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소행으로 여길 가능성이 매우 큼 → 달갑지 않은 일로 인해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실망스럽게 여김.

기적의 사고 회로였다.

표정이 굳었다.

그걸 모르는 장윤태는, 마치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박민우의 눈썹이 비틀렸다.

“이 새끼가 진짜…….”

장윤태가 흠칫 놀랐다.

이번에도 뒤늦게 깨달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박민우의 얼굴.

그건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음을.

박민우의 의도와는 다른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장윤태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 * *

다행히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부산의 연락을 받아 주었고, 부산시장 차영민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부산을 도와주신다면, 앞으로 중앙 정부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소문이 진짜라면.

부산이 바라는 건 로만 드미트리의 힘이었다.

S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날려 버린 힘으로, 부산에 들이닥친 재앙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왜 부산을 도와야 하지? 우리가 다른 지역의 안전까지 책임질 의무는 없다.”

[…….]

화면 너머.

차영민이 당혹으로 얼룩진 표정을 보였다.

소문과는 달랐다.

장윤태는 로만 드미트리를 정의의 사도처럼 표현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정의감으로 타인을 도와주는 부류가 아니었다.

차영민은 눈치가 빨랐다.

단 한 번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정의감을 부르짖는 것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정합니다. 인천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부산을 도와줄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인천에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부산의 방어를 더욱 견고하게 했을 뿐. 인천을 도와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살아남고 싶습니다. 이게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모한 부탁인지를 알면서도, 부산의 안전을 책임지는 저로서는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심을 말했다.

괜히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중앙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선언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중앙 정부에 반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를 뿐, 대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본인들만의 안위를 챙기는 그들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지방 정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를 취하십시오. 대한민국 전체를 차지하십시오. 저희의 목숨을 구명해 주신다면, 저희는 감사한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지방을 외면했던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저희를 구해 준 로만 드미트리 님을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반역이었다.

반역은 의도를 지닌 것만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차영민에게 그딴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벼랑 끝이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외국인인 로만 드미트리를 모시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비겁한 제게는 없는 힘이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는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화면 너머.

차영민이 고개를 숙였다.

더는 말하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 속에서, 차영민은 로만 드미트리의 결단을 기다렸다.

차영민의 발언.

차영민의 진심.

그리고 부산으로 얻어지는 이득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세상 전부를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군림(君臨)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인천을 넘어 다스릴 땅이 존재해야 하고, 자신의 통제를 받는 그 땅에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백성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고로.

언젠가는 대한민국 전체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제할 뿐, 먼저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달랐다.

부산은 익히 알았다.

대재앙을 준비하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대한민국 전체를 알아보았다.

일반적이지 않은 행보였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때, 이미 대한민국 전체를 집어삼킬 계획을 그려 나갔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도와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게 우선시되는 것은 인천 시민들의 안전이다. 인천은 현재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고, 내 부재로 인해서 인천이 위험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 이틀. 레드 타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버텨라. 이틀 뒤에도 너희가 살아남아 있다면…….”

시선이 마주쳤다.

차영민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했다.

“그때는 너희를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나는 내 백성의 안위를 외면하지 않는다.”

* * *

툭.

통신이 종료되었다.

차영민은 복잡한 표정으로 까맣게 물든 화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틀.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로만 드미트리와의 연락.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다행히도 지원 약속은 받아 냈지만,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틀을 버티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도.

차영민의 마음속에서는 희망이 꿈틀거렸다.

“백성의 안위를 외면하지 않는다니.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낭만이구나.”

전과는 달랐다.

중앙 정부.

그들의 도움은 기약이 없었다.

그들은 ‘서울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레드 타임이 끝나고도 며칠이 지나고서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이미 지방 정부들이 초토화된 이후.

중앙 정부의 행보에 부당함을 주장하더라도, 그렇게 나온다면 다음에는 도움이 없다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이틀을 예고했다.

변수가 사라지는 이틀이 지나면 부산을 도와주겠다는 말.

믿음이 생겨났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지키지 못할 말을 내뱉지는 않을 것 같았다.

희망의 여부.

차이는 대단했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건만, 차영민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졌다.

비상식적인 믿음이었다.

이틀 뒤에 도움을 받는다는 것.

겨우 인천의 힘으로 부산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기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어 보고 싶었다.

차영민이 수뇌부들을 소집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부산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결사 항전에 돌입한다. 단 이틀. 이틀만 버텨라.”

로만 드미트리.

그와의 약속에 부산의 명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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