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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08화 (508/615)

508화 6번째 대재앙 (9)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는 박민우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

‘백의의 마법사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전생의 알렉산드르처럼 영혼이 뒤틀려 있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로, 차원 이동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백의의 마법사가 인천과 손을 잡으려는 비상식적인 판단을 하나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그가 전생의 나를 경험했다면, 현생의 삶이 어떻든 전혀 중요하지 않았겠지.’

가설에 불과했다.

상대를 알렉산드르로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 이동을 경험한 정체불명의 존재로 판단했다.

알렉산드르는 죽었다.

그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누구든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생의 자신을 기억하는 존재.

전승자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이상한 느낌 하나만으로 백의의 마법사를 의심하는 결론을 내렸다.

가능성을 열었다.

여러 삶을 살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찰나의 의심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박민우는 제 발이 저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며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알렉산드르라니. 참으로 질긴 인연이구나.’

세 번의 삶.

세 번의 만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생에 그를 단호하게 벌했으나, 지금의 그에게 특별한 악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아니, 김판석. 전생에 너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중에는 나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전생의 너는 내 손에 죽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너와의 관계는 끝났다. 나는 너를 죽임으로써 전생의 악연을 끊어 버렸고, 그 이후에 네가 마왕에게 버림받고 윤회의 저주에 걸린 것은 그동안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겠지.”

삶의 경계.

죽음으로 구분했다.

로만 드미트리 또한 본래의 육신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가 죽었기에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삶을 살았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에. 죽어서 다시 만난 박민우의 머리를 다시 날려 버릴 만큼의 악의가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알렉산드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생의 삶에서 너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내 사람들을 죽였다. 그런 너를 내가 왜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나와의 악연이 해소되었다고 한들, 전생을 들먹인 네 주둥이만으로 목을 날릴 이유로는 충분하다. 김판석. 지금부터 설명하라.”

슥.

검을 들었다.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널 살려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왜 너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 * *

로만 드미트리의 말.

박민우는 안도했다.

정체를 밝히자마자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박민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가 넙죽 엎드린 채로 말했다.

“김판석으로 살아갔을 때. 저는 천마 백중혁 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백중혁 님을 우러러보았고, 천마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제가 알렉산드르로서 막대한 힘을 움켜쥐었고, 천마처럼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금단의 영역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저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천마가 보여 주었던 군림은 절대 이런 것이 아닌데도, 마왕의 통제에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과거의 연을 들먹였다.

“세 번의 삶. 그 삶 모두 천마는 제게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첫 번째 삶은 백성으로서, 두 번째 삶은 악연으로서,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처음 로만 드미트리 님의 존재를 언급했을 때, 저는 첫 번째 삶처럼 다시 백성으로 돌아갈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정체를 끝까지 숨겼더라면.

아니, 로만 드미트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박민우는 현생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긴 싫었다.

이번 삶만큼은 떳떳하게 천마를 따르고 싶었다.

“과거의 악연은 현생에서 참회하겠습니다. 단순히 저를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백의의 마법사로서 지난 20년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갖춘 힘을 틀에 맞춰 생각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힘을 갖추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백일이 저를 따르고 있으며, 차명(借名)으로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바치겠습니다. 비록 제 도움이 아닐지라도 로만 드미트리 님은 머지않아 이 세상을 군림하겠지만, 그 과정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화가 났다.

강민호, 김준혁, 이태성.

현생의 인연들은 자신처럼 노력해서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 시점에, 그들은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로만 드미트리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참으로 억울했다.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 우연의 연속에서, 자신은 항상 로만 드미트리와 엇나갔다.

단 한 번이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제대로 마주할 수만 있었다면, 사이가 이렇게 틀어지기 전에 삶을 온전히 바쳐 충성을 맹세했을 것이다.

운명을 거슬렀다.

필연을 외면했다.

삶은 로만 드미트리의 반대편에 서라 말했지만, 박민우는 천마의 백성으로 남고자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로 살아갈 때도.

많은 것을 움켜쥔 황제로서 살아갈 때도.

천마는 하늘이었다.

천마의 사람들이 살았던 인간다운 삶이, 이번 생에는 자신에게도 허락되길 간절하게 바랐다.

박민우가 절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불구덩이에 뛰어들든, 지옥으로 떨어지든.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한 일이라면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백성으로 받아 주십시오. 단 하나의 약속이면 충분합니다. 단순히 참회를 넘어서, 저는 김판석으로 살아갔던 시절의 제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쿠웅.

머리를 땅바닥에 찍었다.

목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선택의 갈림길에서 목이 나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 * *

참.

기묘한 인연이었다.

단순한 악연이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박민우와의 관계를 깊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업보다.’

김판석.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알렉산드르가 된 것이 아니다.

백중혁이 천의 경지에 올랐을 때, 김판석은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힘의 파동에 휩쓸려 차원의 경계를 넘어가고 말았다.

원래라면 무지렁이로 살았을 존재. 그가 알렉산드르라는 과분한 힘을 얻으면서, 감히 꿈꿀 수 없었던 하늘을 따라가다 악마가 되고 말았다.

세 번의 삶.

김판석과 백중혁은 이어졌다.

완전히 다른 세 번의 삶을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그와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면 내가 현생을 살아가는 이유 또한 김판석과 마찬가지로 업보를 청산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로 인해 김판석의 존재가 알렉산드르로 살게 되었고, 알렉산드르가 만들어 낸 문제들에 전생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다. 김판석은, 박민우는 내가 감당해야 할 존재다.’

천명을 따르는 게 아니다.

스스로 판단했다.

박민우가 백성으로 남는다면 업보를 청산할 것이고, 알렉산드르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업보가 생길지라도 그의 머리를 날려 버릴 것이다.

한때 천마의 백성이었던 존재. 그 사실이 마음을 움직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현생을 살아가며 전생의 삶을 되찾고자 한다. 너는 그 과정에서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며, 너에 대한 처분은 전생의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네가 죽인 사람들의 유족이 너를 용서한다면 너는 새로운 삶을 허락받겠지만, 그들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큰 공을 세운다고 한들 새로운 세상에 너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동의하나.”

가혹한 발언이었다.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을 말했건만, 박민우는 환한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제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울컥했다.

감격에 북받쳐 소리쳤다.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무조건적인 악연이 아니라, 일말이라도 로만 드미트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박민우는 진심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 *

박민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모습에, 백일의 길드원들이 다급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신 겁니까?”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길드장님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려는 이유를.”

백일(白日).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전승자를 핑계로 알렉산드르의 지식을 가르쳤고, 백일의 일원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마법 전력을 갖추었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필요한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활약뿐만 아니라, 백일 전체를 반드시 같이 끌고 가야만 했다.

고로.

이미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짜 두었다.

“사실 얼마 전에 로만 드미트리 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정의를 행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은 사람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녕 정의를 행하는 것이 맞냐고. 중앙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위를 들먹이며 지방 사람들을 배척하는데, 힘이 없는 다수를 외면하고 힘이 있는 소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의가 맞냐고. 나는 그때 깨달음을 얻었다. 중앙 정부는 더는 정의가 아니며, 앞으로 험난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인천을 택한 로만 드미트리 님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시기를 정확히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힘들겠지만, 박민우는 중요한 포인트들은 어물쩍 넘어갔다.

“그래서 인천행을 택했다. 나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인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분명히 백일을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정의’를 추구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백일 또한 처음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냐고? 그때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나는 서울의 안락함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위험을 감수하고 인천에서 새롭게 정의를 행할 생각이다. 만약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대로 백일을 떠나도 좋다.”

고개를 돌렸다.

진심으로 어려운 결단인 것처럼 힘겨운 표정을 보였다.

“길드장님.”

“당신은 정말…….”

길드원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 모두.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순수한 정의를 바라기에, 박민우의 일장 연설이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길드장님을 따르겠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일이라면, 저희 또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박민우의 선택에 의문을 표하던 사람들이, 모두 앞다투어 본인의 진심을 말했다.

계획대로였다.

박민우는 웃음을 삼켰다.

백일은 앞으로도 자신을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때였다.

장윤태가 시선에 밟혔다.

“장윤태. 잠깐 얘기할 것이 있으니 나를 따라오도록.”

흠칫.

장윤태가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그렇게 끌려가는 장윤태의 모습에, 백일의 길드원들은 박민우의 신임(?)을 받는 장윤태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당장 문제 되었던 부분들을 해결했다고는 하나, 아직 레드 타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의 사례만 확인해 보더라도 레드 타임 막판에 국가가 멸망할 만큼의 공격을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승리의 기쁨은 충분히 이해하나, 지금은 승리에 취해 방심할 때가 아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대재앙에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인천에 S등급 몬스터 열 마리가 동시에 나타날지라도 대재앙이라는 단어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사실을 지적했다.

자신의 힘이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방심으로 인해 무의미한 희생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쉘터는 예정대로 안전이 확보된 뒤에 개방할 것이다. 모두 위치로 돌아가라. 순서에 따라 체력을 비축하고, 조금이라도 방심해서 경계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럼 모두 위치로.”

간결했다.

승리의 기쁨을 뒤로 미뤄 두고, 로만 드미트리도 다시 제1 방어선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통신병이 달려와 말했다.

“방금 중앙 정부로부터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대통령 김정태가, 직접 로만 드미트리 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다들 놀랐다.

대통령 김정태.

대한민국 최고의 거물이었다.

그가 직접 움직인 상황에, 사람들의 시선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김정태라는 이름값에 놀랄 법도 하건만,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통신을 연결하라.”

김정태의 의도?

뻔했다.

그걸 알고도,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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