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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88화 (488/615)

488화 변화하는 인천 (1)

로만 드미트리가 떠난 자리.

참담했다.

인천 정부 최고의 전력인 직할대가, 다들 엉망인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태성은 그들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 달 안에 1단계씩 승급이라니.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승급은 어려운 문제다.

보통 수년씩은 걸려서 간신히 1단계씩 승급하는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난이도 또한 가파르게 상승한다.

그래서 지방에는 B등급 이상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다들 서울에서의 부귀영화를 바라지, 지방에서 초라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인즉.

직할대원 중 상당수가 C등급인데, 그런 그들이 특별하다고 평가받는 B등급으로 전부 승급하라는 의미였다.

불가능했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대한민국은 약소국이라고 평가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태성이 한 직할대원을 바라보았다.

“철민아.”

“예.”

“너 강민호에 대해서 안다고 했었지. 그에 관해서 설명해 봐.”

박철민은 C등급의 직할대원.

강민호를 언급한 적이 있었기에, 동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박철민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지금처럼 강해지기 전에, 강민호를 우연히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강민호가 몇 달 전에 저를 찾아왔었는데, E등급을 전전하는 삶에 자신이 강해질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의 강민호는 분명히 E등급에 어울리는 수준이었고, 헌터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검색하더라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3일 안에 2단 승급에 성공할 확률은?”

“불가능합니다. 제 공격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던 그가, 저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판단이었다.

강민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수 있었다.

이태성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상식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상식은 부서져 버렸어.”

검을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한 장인이 만들어 낸 B등급 검이건만,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참담한 상태의 검처럼 상식은 부서졌다.

이미 인천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태성이 고개를 들어, 로만 드미트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단 다들 준비들은 해 두자고. 불가능이 현실이 된다면, 그때는 뭐라도 해야만 할 테니까.”

* * *

3일 뒤.

강민호는 서울에 있는 승급 심사장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는 이곳에서 승급 절차를 진행하기에, 그는 아침 일찍 서울로 향했다.

심장이 뛰었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들었을 때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3일간 승급 심사를 준비하면서 자신감을 찾은 상태였다.

이미 개미굴에서 자신의 실력은 증명되었다.

일반적인 E등급 헌터라면 병정개미 하나도 버겁지만, 자신은 십수 마리의 병정개미를 동시에 상대하지 않았던가.

한 달 전과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내게 강해질 방법을 알려 주었어. 드미트리의 기술은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바쳐서라도 배우길 바라는 것인데, 로만 드미트리 님은 내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명령을 따르는 거야.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면 뛰어들고, 그분을 위해 싸우라고 하면 싸우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겠지.’

의지를 다졌다.

그간 숱하게 지나간 인연들.

그중 그 누구도, 초라한 재능을 보유한 강민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이 감사하기에, 그가 사람들 앞에서 우스워지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무조건 승급한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구에는 승급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려 강민호의 차례가 되었고, 강민호는 자신의 실적을 기록한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E등급에서 C등급. 2단 승급 심사를 보고 싶습니다.”

“2단이요?”

직원이 힐끗 강민호를 보았다.

2단 심사는 이례적인 일이다.

단계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몇몇 2단 심사에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연을 얻은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전승자나 선택받은 자들.

기연을 통해서 강해진 사람들은, 낮은 등급에서 높은 등급으로 한 번에 팍 상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으흠.”

직원이 표정을 찌푸렸다.

서류가 이상했다.

2단 심사를 보려면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서류의 내용에는 E등급 업무만이 다수 존재했다.

그가 다시 한번 강민호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정말 이 실적으로 C등급 심사를 보겠다고요?”

* * *

승급 절차는 간단하다.

희망 등급을 신청, 그 등급에 해당하는 실력자를 상대로 자격을 증명하면 된다.

보통 무리하게 승급 심사를 진행하지는 않는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덤벼들었다가 호되게 당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말 해당 등급의 실력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만 승급 심사장을 찾았다.

그렇기에 C등급 헌터인 기명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찢어지게 하품을 내뱉던 그는, 서류를 확인하고는 같이 걸어가는 심사관에게 말했다.

“에게, 이런 애를 상대하라고요?”

“창구 직원의 말로는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시험을 보다가 죽어도 된다는 각서에 서명하면서까지 시험을 보겠다고 했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죠. 그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막대한 승급 비용을 지불하면서 시험을 치르겠다니 저희로서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말세네. 이따위 실적으로 C등급을 넘보다니.”

같잖았다.

헌터 데이터베이스.

그것의 기록은 현실을 증명했다.

강민호는 E등급 임무만을 다수 수행한 전형적인 급 낮은 헌터였고, 아무리 살펴봐도 그를 경계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항목은 있었다.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개미굴 사건에서, 그는 로만 드미트리와 함께 현장에 존재했다.

그에 대해서는 심사관이 설명했다.

“사실 이 강민호라는 헌터는 몇 년 전에 제가 심사한 기억이 있습니다. E등급 심사를 위한 자리였는데,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 때문에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 사람이 개미굴 사건에서 특별한 공을 세웠을 리는 없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S등급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마 그가 개미들을 모조리 처리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버스를 탔다는 의미네요.”

“그렇죠.”

서류를 구겨 버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기명준은 구겨진 서류를 바닥에 버렸다.

“그렇다면 주제도 모르는 녀석을 제대로 처벌할 필요가 있겠네요. 요새 무지성으로 승급 심사를 보면 한 번쯤 얻어걸린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던데, 팔이라도 하나 잘라서 보낸다면 그딴 헛소리는 지껄이지 않겠죠.”

“그건 알아서 하셔도 좋습니다.”

웃었다.

심심하던 찰나에 잘되었다.

죄인을 효수(梟首)하듯, 강민호의 사례는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 * *

강민호가 무대에 올랐다.

심사관이 참관하는 가운데, 상대로 나선 기명준을 바라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강민호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예.”

기명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통성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한 행동.

서로를 마주하는 상황에, 심사관은 곧바로 신호를 보냈다.

“시작.”

팟.

타다다닥.

먼저 달려든 쪽은 강민호였다.

강민호는 수라 심법을 운용해서 대시를 사용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모습에 기명준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생각보다 빨랐다. 대시는 흔하디흔한 하위 스킬에 불과한데, 공간을 파고드는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랐다.

‘이것 봐라.’

촤르르륵.

검을 뽑았다.

가볍게 마나를 일으키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강민호를 내리찍었다.

‘내려찍기.’

콰앙!

콰르르르릉.

강력한 일격이었다.

단번에 승기를 잡을 생각이었건만, 이번에도 예상과는 다르게 강민호는 침착하게 공격을 받아 냈다.

그때부터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려오는 속도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도 E등급의 수준을 넘어서는 증거였지만, 기명준으로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민호의 실적.

처참했다.

그따위 실적을 가진 사람이, C등급을 넘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한번 버텨 봐.”

확.

콰콰콰콱!

강민호를 몰아붙였다.

검을 크게 휘두르며 강민호를 계속해서 내리찍었고, 강민호의 반격은 가볍게 막아 내고는 오히려 상대의 급소를 공략했다.

승급 시험장에 소속된 헌터들. 그들은 일종의 용병이었다.

일정 기간 심사장에 머물면서 급여를 받는데, 그들은 심사장에서의 시간을 폐관 수련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하루에도 수십 번을 싸울 수 있는 자리.

기명준은 베테랑이었다.

같은 C등급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한 수 위인, 그의 노련한 공격에 강민호가 속절없이 밀렸다.

팟.

팔이 튕겨 나갔다.

그대로 가슴팍을 베어 버리려 하자, 강민호는 몸을 회전시키며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강하다.’

기명준.

확실히 강했다.

C등급을 심사하는 입장이니만큼, 그는 이제 막 C등급을 넘보는 헌터들을 찍어 누를 힘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을 상당히 적대하는 상황. 강민호는 빠르게 달려드는 기명준의 모습을 주시했다.

불과 한 달 전에는 감히 넘볼 수 없던 상대이건만, 지금은 조금도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상대적인 현상이었다.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를 경험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개미들을 도륙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새로운 세계였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목격한 순간부터, 상식적인 범위에서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

‘확실히 강하나, 불가능한 상대는 아니다.’

왜일까.

웃음이 나왔다.

이번 심사.

3분만 버텨도 통과한다.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만,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를 만족시킬 결과를 가져오고 싶었다.

고로.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코앞에 다가온 기명준의 모습에, 본격적으로 수라 검법을 펼쳤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강력한 충격이 일었다.

기명준이 생각보다 강한 위력에 당황하자, 강민호는 곧바로 수라 검법의 투로를 펼치며 기명준을 몰아붙였다.

수라 검법은 단순히 오라를 강화하는 효과로 끝나지 않는다.

검술 자체에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몰아붙이는 투로가 녹아 있었고, 그 투로가 강민호의 검에서 빛을 발했다.

이 세상.

헌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스킬에 매달렸다.

스스로가 이해하고 터득하는 종류의 힘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부여하는 힘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명준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처럼 스킬을 사용하며 강함을 과시하는 존재.

그로서는 투로를 정확히 이해하고 몰아붙이는 강민호의 검술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 끗 차이.

그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기명준의 반격이 살갗을 베었지만, 강민호는 확신을 지니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알려 준 드미트리의 기술. 그건 전승자들이 배우는 것보다 한 차원 위의 기술이야. 어떻게 그런 기술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카앙!

“……?!”

기명준이 밀렸다.

틈이었다.

힘에서는 분명히 압도했으나, 공격을 주고받는 공방은 단순히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는 기명준의 모습에, 강민호가 마나를 폭발시켰다.

콰앙!

콰르르르릉.

“크악!”

비명을 지르는 기명준.

전신이 찢겨 나가는 충격에, 그는 제대로 막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툭.

쨍그랑.

기명준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기명준 또한, 피를 흘린 채로 일어나질 못했다.

결과는 명백했다.

“……가, 강민호 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경악하는 심사관.

이건 상식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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