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트러블 (3)
전조 현상.
박기태는 재앙이 탄생하는 순간에 있었다.
일개 개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을 삼켜 내며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버렸다.
상식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현장에 남은 로만 드미트리와 강민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개미들에게 복수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다시 만났을 때, 박기태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현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단순히 수치상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판단하겠지만, 박기태가 경험했던 순간은 절망적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개미 알. 사방에 뚫린 구멍에서 몰려드는 개미들.
지형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에 매우 불리했으며, 시각적으로 판단하는 인간들에게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라는 특성은 수치로는 드러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지옥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것도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때부터였다.
의문이 생겼다.
단순히 S등급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의문을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아무리 조사해도 특별한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강민호와 인천에 나타난 것이 최초의 행적이었으며, 갑자기 개미굴 사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김준혁이 레드문 사건을 공개했다.
마치 새로운 목격자가 나타난 것처럼, 레드문을 멸망시킨 범인이 로만 드미트리라고 밝혔다.
그 과정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가 인천에 입성, 그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절대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레드문은 그 사실을 어기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접근.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는 모습에, 평소처럼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며 회유하는 전략을 사용하려고 했다.
거기까지는 인천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으나, 그 이후 로만 드미트리의 대응이 파격적이었다.
그는 분명히 경고했다.
선을 넘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그 자리에서 협박을 내뱉던 고상호를 처리하고, 레드문을 찾아가 문제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일련의 상황.
소름이 돋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것 같았다.
‘확실해. 로만 드미트리는 말에 무게가 있는 사람이야. 한 달의 기한을 어긴 레드문을 처리해 버린 것처럼, 그 한 달의 기한이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처럼. 적아(敵我)의 구분함이 확실하며 어중간함이 없어. 개미굴 토벌에서도 마찬가지야. 분명히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문제인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내게 길 안내만 맡겼을 뿐 도망쳐도 상관없다고 말했어. 나머지 문제는 본인이 감당하겠다는 그 말이, 처음에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었지.’
같은 맥락이었다.
레드문 사건도, 개미굴 사건도.
로만 드미트리는 내뱉은 말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어쩌면 드미트리라는 이름처럼, 그는 드미트리의 전승자일지도 모르는 일.
박기태가 기억하는 인천 시장은 현명한 사람이기에, 로만 드미트리와 김준혁의 연합은 인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인천을 떠나는 게 맞을까?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도중, 박기태의 눈에 의문스러운 부분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강민호의 존재였다.
* * *
강민호는 대단한 실력자다.
적어도 박기태가 목격한 모습은 그러했는데, 막상 그에 대해 알아보자 예상과는 다른 말을 들었다.
“강민호가 혼자서 병정개미 수십 마리를 도륙했다고요? 에이, 말도 안 돼.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제가 아는 강민호는 절대 그런 실력자가 아닙니다. 늦은 나이에 각성해서 겨우 E등급을 딴 거로 알고 있는데, 병정개미 한 마리면 몰라도 어떻게 수십 마리를 상대하겠어요?”
“……강민호요? 괜찮은 사람이었죠. 몇 번 호흡을 맞추기는 했었는데,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아서 금방 헤어졌어요. 아시잖아요. 이 바닥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흔한지를.”
“강민호 씨는 E등급 승급 심사도 겨우 통과했습니다. 박기태 씨의 말처럼, D등급의 병정개미 수십 마리를 처리할 실력자라면 그때의 모습이 거짓이라는 의미겠죠.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등급을 낮출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모두가 말했다.
강민호는 E등급에 어울리는 존재였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박기태가 경험한 강민호는 그보다 두 단계 이상의 실력자처럼 보였다.
‘설마 그동안 등급을 숨긴 건가? 그건 말이 안 돼. 심사관의 말처럼 그럴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강민호는 10년 전 대재앙에서 아내를 잃었고, 그 이후에 일반인으로 전전하다가 뒤늦게 각성한 케이스야. 항상 서울 입성을 목표로 한다는 사람이,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도 인천에서 E등급 임무를 수행하며 살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 그의 인생에 나타난 유일한 특이점.’
로만 드미트리.
그였다.
그와의 만남이 강민호를 지금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컸다.
‘E등급 헌터였던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 수준급의 실력자가 되었어. 인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인천 시장 김준혁 또한,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면서 중앙 정부와의 단절을 택했어. 변화의 시작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어. 그게 내가 알아낸 진실이야.’
확실했다.
인천이 격변하고 있었다.
S등급일지도 모르는 존재.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면서부터, 이곳에서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중앙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을 만들어 낸다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박기태는 수중의 패가, 어쩌면 대단한 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박기태가 말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아낸 정보예요.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나면서부터 인천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 한번 역발상(逆發想)을 해 보자고요. 중앙 정부의 압력으로 인천의 길드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 버린다면, 유일하게 인천에 잔류한 청산은 인천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인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물론 그것은 인천 정부가 살아남았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하겠죠. 그 부분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 그리고 6년 전 대재앙에서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던 인천 시장 김준혁의 현명함을 믿어 보고 싶어요.”
“크흠.”
“그런 가설에 베팅하기에는, 청산이 감당할 대가가 너무 치명적입니다.”
몇몇 수뇌부들.
그들이 부정적인 기색을 보였다.
박기태의 말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위험한 선택임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박기태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큰 위험을 감수하면, 그것은 큰 대가로 돌아올지도 몰라요. 막말로 인천을 떠나서 어디로 갈 거예요? 청산 정도의 규모로는 서울 입성은 꿈도 꿀 수 없고, 다른 지방은 뒤늦게 자리를 잡는다고 한들 인천에서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여러분. 그 어떤 지방의 전력도 이번 개미굴 사건과 같은 전조 현상을 쉽게 해결하지는 못해요.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전조 현상을 해결했고, 우리는 그런 인물과 같은 노선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어요.”
아마도.
청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인천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지만, 박기태는 길잡이로서 살아가며 사람 보는 안목이 상당히 발달했다.
감이었다.
그동안 알아본 정보가, 자신이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베팅하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유일의 S등급인 백의의 마법사.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처럼 고민하다가 중앙 정부의 편을 들었죠. 반대로 그때 백의의 마법사를 따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됐죠? 대박이 났어요. 백의의 마법사를 따라서 그들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요.”
목소리를 높였다.
강력하게 강조했다.
사실 그는 개인으로서 거취를 결정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청산을 등에 업는다면 인천 정부에 그만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구철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처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청산은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었다.
구철호가 말했다.
“그런데 넌 청산의 소속도 아니잖아.”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일이 잘못되면 발을 뺄 것 아니냐는 지적에, 박기태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번 기회에 청산에 들어갈 테니까, 제 자리 하나 마련해 주세요. 어차피 자리는 많잖아요. 청산이 인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아무리 길드의 결정이라고 한들 모두가 동조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이 청산을 떠나 버린다면, 저와 같은 인재가 청산에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날.
회의는 저녁 늦게까지 진행되었다.
수뇌부 몇몇이 화를 내며 회의실을 뛰쳐나갔고, 구철호는 박기태의 합류와 함께 인천 잔류를 결정했다.
* * *
예상대로였다.
인천 잔류.
길드 내부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길드 마스터가 미쳤네.”
“아니, 중앙 정부에서 인천 정부와 갈라서겠다는데, 겨우 청산 정도 되는 길드가 무슨 배짱으로 인천에 남는다는 거야. 이대로 청산 소속으로 남았다간 우리도 같이 똥통에 빠질 거야.”
“난 어차피 용병이야. 청산이 이따위 선택을 내린다면, 조건을 따라가는 용병으로서는 떠날 수밖에.”
길드원의 대거 이탈.
그나마 구철호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 절반 정도는 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산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아무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선택이 상식적이지, 구철호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산의 협력 길드.
진즉에 인천을 떠난 그들이 구철호에게 연락했다.
“구철호 길드장님. 정말 인천에 남으시겠다는 겁니까?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려는 겁니까?”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중앙 정부는 관대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방해되는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찍어 누를 텐데, 청산이 그 압력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는 겁니까. 분명히 오늘을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모두가 하지 않는 일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전으로 오시죠. 제가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연락이 빗발쳤다.
속이 타들어 갔다.
구철호는 당장에라도 선택을 번복하고 싶었다.
“하아.”
건물 옥상.
밑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을 장악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도저히 인천을 떠날 수가 없었다.
6년 전.
이곳 인천에는 낭만이 있었다.
보통 도시가 공격당하면 수뇌부조차 도망치기 마련인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김준혁의 존재로 인해서 인천 시민들은 싸우는 것을 택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을 지킬 수가 있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인원들이었고, 대피소에 몸을 숨긴 비전투 인원들은 그렇게 김준혁을 필두로 희생한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그렇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는 구철호의 노모도 있었다.
지금은 죽었다.
요새 같은 시기에 흔하지 않은 자연사(自然死)였다.
노모를 떠나보내던 날, 어머니에게 그런 축복을 허락해 준 김준혁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박기태의 설득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은 인천을 원하기에, 몇몇 수뇌부가 박기태의 발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지적할지라도 구철호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인천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겠다고 용병 길드를 차린 것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남았다.
누군가는 인천에 남을 것이기에.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인천 시장 김준혁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헌터로서 좋지 않은 담배를 참고 싶었지만, 구철호는 결국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때였다.
“길드장님. 특종입니다!”
옥상으로 길드원이 찾아왔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길드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박기태가 말했던 강민호. 그가 조금 전에 2단 승급에 성공했답니다!”
“뭐?”
툭.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2단 승급.
그것도 각성한 지 수년이나 지난 시기.
그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