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개미굴 (2)
박기태는 길잡이다.
전투에 특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본인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헌터의 등급은 절대적이다.’
S부터 F등급.
지난 20년의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은 세부적으로 등급을 나누었고, 언뜻 보면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등급은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었다. 예외란 존재하지 않았다.
승급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해당 등급을 넘어서는 실력을 보였지만, 헌터 데이터베이스상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등급일 수밖에 없는 단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수백 번의 전투.
경험으로 얻은 확신이었다.
F등급이면 F등급인 이유가, E등급이면 E등급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개미굴 공략은 기대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전투면 주제도 모르는 두 사람의 의지는 알아서 꺾이리라고 확신했다.
딱 거기까지. 안전이 보장되는 선에서 적당히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는데, 강민호가 개미들을 상대하는 일련의 광경에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게 E등급이라고?’
상식을 벗어났다.
병정개미는 D등급 몬스터.
애초에 그를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이라면 E등급이어서는 안 되는데, 강민호는 한 마리도 아니고 병정개미와 일개미 수십 마리를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D등급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겨우 D등급의 관문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C등급의 영역을 넘보는 그런 단계.
충격적이었다.
인천 바닥에서 그만한 실력이라면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강민호라는 사람을 난생처음 보았다.
콰득.
개미의 머리를 부서트렸다.
완벽한 승리였다.
강민호가 자신에게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확실해졌어. 강민호가 왜 E등급에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전투적인 측면에서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존재야. 특히 대시와 강격. 그것들은 대중적으로 익히 알려진 스킬이건만, 내가 아는 것과 같은 스킬인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완전히 다른 위력을 보였어. 강민호의 스킬 활용도가 남다르다는 의미지.’
박기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겨우 한 달.
단기간에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민호는 분명히 E등급에 부합하는 실력을 갖추었지만, 단 한 번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드미트리의 전승을 매우 특별하다고 말하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등급의 체계를 붕괴시키는 강력함.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기에 지금은 당황스럽겠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의 기준을 뒤엎을 것이다.
박기태는 감정을 추슬렀다.
전투는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도망쳤어야 했는데, 강민호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이 사람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증명됐어. 만약 정말로 개미굴을 토벌할 실력을 갖추었다면…… 이건 3억을 벌어들일 절호의 기회야.’
물론.
아직도 역부족이었다.
강민호 혼자서 개미들을 모두 감당해 내지는 못하겠지만, 박기태가 눈여겨보는 부분은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로만 드미트리와 강민호는 명백하게 위아래가 나누어져 있다.
강민호 같은 실력자가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았다.
믿었다.
이건 기회였다.
박기태는 그렇게,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잔류를 택했다.
* * *
박기태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선택하셔야 합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개미들의 숫자는 늘어날 테고, 지형적으로 제한적인 개미굴의 특성상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방금은 전초전에 불과합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개미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야말로 안전하게 살아 나갈 유일한 기회입니다.”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와 강민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을 택했고, 그 결과 박기태의 경고처럼 전투가 반복되었다.
캬악!
캬아아악!
개미들이 달려들었다.
영역을 침범한 존재들에게 그들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로만 드미트리와 박기태가 지켜보는 상황에 강민호 혼자만 나섰다.
지금은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에는 병정개미와 일개미 무리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을 한번 확인하고 나니 그는 탄력이 붙은 것처럼 서슴없이 적들을 도륙했다.
퍽.
콰득.
피가 튀었다.
맞닥트리는 족족 베어 버렸다.
강민호의 힘 자체는 한 달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수라 심법으로부터 비롯되는 폭발력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였다.
신세계였다. 전투가 반복될수록 그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는 돌아가는 대로 승급 시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승급 시험을 치렀을 때, 나를 담당했던 심사관이 그런 말을 했었지. 그 나이에 헌터의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미래는 뻔하다고. 처음부터 강력한 기연을 얻지 않는 이상,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다가 몬스터에게 죽는 처량한 신세. 그러니까 헌터는 포기하는 게 좋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E등급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언젠가는 심사관의 경고처럼 처량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증명받고 싶었다. 수십 마리의 개미들을 상대해도 밀리지 않는 실력. 현재의 자신을 그때의 심사관이 어떻게 평가할지를 말이다.
물론 나중의 문제였다.
일단 맞닥트린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후를 논할 수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말했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는 나서 주겠다고. 그러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이를 악물었다.
어둠 너머.
개미들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는 않았다.
캬악!
캬아아악!
또다시 나타난 개미 무리.
강민호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상황은 순조로웠다.
이제는 제법 내부 깊숙이 들어온 상황에, 박기태는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개미의 숫자가 적어. 여왕개미 두 마리가 지난 한 달간 끊임없이 개미를 생산해 냈다면, 이 개미굴 안에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숫자의 개미들이 서식하고 있어야만 해. 그런데 지금까지는 상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어. 아니, 한 마리의 여왕개미가 존재하는 개미굴보다도 못한 정도야.’
확실히 이상했다.
개미굴.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냥터다.
땅굴 속에 개미들이 득실거리는 이 사냥터는, 절대 사람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왕개미의 보금자리를 발견했습니다.”
100m 떨어진 거리.
탐색 마법에 거대한 공간이 발견되었다.
개미굴에는 여왕개미의 보금자리로 활용되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서 여왕개미는 끊임없이 알을 낳는다.
처음부터 목적지는 바로 이 여왕개미의 보금자리였다.
개미를 아무리 죽인다고 한들, 여왕개미를 처리하지 않으면 도돌이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미굴 토벌의 핵심 요소였다.
불안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떤 변수가 있다고 한들, 일단 여왕개미의 보금자리에 도착했다면 고지를 눈앞에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시야에 빨려드는 광경에, 박기태뿐만 아니라 강민호조차도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런.”
“와.”
사방이 개미 알이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고, 개미의 부화 시간이 하루도 걸리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박기태는 다시 한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느낌은 불안한 기분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여왕개미가 하루에 산란할 수 있는 개미 알의 숫자는 기껏해야 백여 마리. 그런데 눈에 보이는 개미 알은 언뜻 보아도 천 개가 넘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많은 개미 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말을 삼켰다.
여왕개미가 십수 마리는 존재해야 가능한 일.
말이 되지 않았다.
인천시장 김준혁은 두 마리의 여왕개미만으로도 토벌을 뒤로 미루었는데, 십수 마리의 존재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박기태도 그런 선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개미굴은 세계 각지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사냥터이기에, 혼란한 세상에도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다.
그때였다.
꿀럭꿀럭.
개미 알이 요동쳤다.
그것은 다른 개미 알보다 크기가 컸는데, 알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콰직.
앞발이었다.
앞발로 구멍을 낸 뒤, 개미가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박기태가 눈을 부릅떴다.
개미의 정체.
그것은 바로 여왕개미였다.
* * *
여왕개미.
그 존재는 미스터리였다.
수많은 개미 중에 극악의 확률로 여왕개미가 부화한다고 알려져 있기에, 이미 두 마리의 여왕개미가 서식하는 이곳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기태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때, 다른 개미 알에서도 차례로 개미들이 알을 뚫고 얼굴을 내밀었다.
캬악!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또 여왕개미였다.
세 마리로도 모자라 네 마리, 아니 계속해서 부화하는 개미 알에서 그 이상의 여왕개미가 나타났다.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상황.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전조(前兆) 현상인 건가.’
대재앙.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기 전, 대재앙을 예고하는 전조가 수차례 발생한다.
그것은 대재앙을 대비하라는 경고이자 또 다른 지옥.
전조 현상은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리기에, 한 개미굴에서 수십 마리의 여왕개미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전조 현상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말인즉.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소재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만약 개미굴 토벌을 차일피일 미루었다면, 머지않아 인천은 개미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럽게 사방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타타타탁.
캬악!
캬아악!
개미들이 몰려드는 소리였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소 수천 마리가 달려드는 공포스러운 소리에 박기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도, 도망쳐야 합니다. 전조 현상이라면 우리만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황급히 품을 뒤졌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손에 움켜쥐었는데, 박기태의 다급한 음성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했다.
“감당하고 말고는 제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빌어먹을.”
욕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들이었다.
예상보다 실력이 뛰어나기는 하나, 그렇다고 전조 현상을 겨우 둘이서 막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전조 현상부터는 최소 도시 단위로 감당해야 할 문제다.
만약 B등급 이상의 절정 헌터라고 할지라도, 이제 곧 들이닥칠 개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이 메말랐다.
몸이 덜덜 떨렸다.
웬만해서는 의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코앞에 들이닥친 죽음에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말하지 않았던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쫘악.
그대로 스크롤을 찢었다.
전신을 휘감는 불빛에, 박기태는 텔레포트가 끝날 때까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 * *
화악.
쿵.
텔레포트 좌표는 인천이었다.
새로운 공간에 나타난 박기태는, 자신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전조 현상은 다른 문제야.’
둘의 생존?
불가능한 일이다.
수천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개미들을 상대로 10분이라도 버티는 것은 헛된 희망이기에, 박기태는 이미 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다.
문제는 전조 현상이었다.
계속해서 태어나는 여왕개미로 인해 재앙의 규모가 커질 것이 분명하기에, 인천의 안전을 위해서는 사활을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개미굴을 토벌해야만 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향하는 곳.
그 목적지는 바로 인천 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