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파격적인 행보 (4)
강민호는 처음 스킬을 사용하던 날을 기억했다.
게임이 그리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주체할 수 없이 분출되는 힘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내 몸이 저절로 반응했지. 빠르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땅바닥을 굴렀고, 나는 대시를 내 스킬로 만들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들였어. 그건 정상적인 헌터라면 모두가 경험하는 일. 그런데 지금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났어.’
낯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을 말했다.
“차동철이 사용한 수라 검법은 겉핥기에 불과하다. 수라 검법은 검을 휘두르는 형태에 따라 적절하게 마나를 배분해야 하는데, 시스템이 마나를 운용하는 방식은 그 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 무공은 스스로가 힘의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나를 폭발시키느냐에 따라, 똑같은 힘을 사용한 공격이어도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검을 휘둘렀다.
마나가 일어나며 순간적으로 내리꽂히는 힘에,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던 강민호는 눈을 부릅떴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부서졌다.
강민호는 차동철이 수라 검법을 펼치는 모습을 목격했었지만, 그것은 절대 이와 같은 파괴력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평범하게 휘두른 일격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이라니. 그때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의 설명에 흠뻑 빠져들었다.
“세상에 과정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사용하는 스킬이나, 내가 설명하는 무공이나. 네가 어떠한 과정을 제공했기에 그런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이 모든 과정을 해결해 주는 현재의 방식에 안주하지 마라. 네가 정말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네가 행하는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단계에 들어서야만 한다.”
단계적으로 차분한 설명이었다.
전생.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무공에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었고, 덕분에 강민호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강민호는 직접 검을 휘두르며 가르침 받은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시스템으로 인해 그의 육체에는 자신도 모르게 마나가 축적되어 있었고, 그러한 힘을 움직여 수라 검법의 체계를 따랐다.
첫날.
강민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의 검술은 조잡한 휘두름에 불과했고, 그는 다소 실망스러운 얼굴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날부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론적인 것을 모두 전수했고, 강민호는 홀로 공터에 나와 해가 뜰 때부터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실 아직도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병정개미 무리, 레드문을 쓸어 버리는 결과로 본인의 실력을 증명했기에,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었다.
E등급.
밑바닥의 위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백지상태의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며칠이 흘렀다.
단전에 일말의 마나를 쌓고.
그것을 처음 발현한 날, 강민호는 자신의 검에 부서지는 바위를 목격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하, 하하.”
웃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기뻤다.
‘내 선택은 옳았어.’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전승 능력을 가르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E등급에 불과한 자신이 평생 마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서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지,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스스로가 밝히지 않은 사실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확실한 건.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든 간에, 강민호가 마주한 현실은 조금이나마 성장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곁에서, 자신은 어떤 위험에도 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 * *
강민호가 훈련에 열을 올리던 그때.
로만 드미트리와 헤어진 직후, 이태성은 정부 건물로 돌아오자마자 김준혁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상대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전.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싶었다.
일개 개인이 인천을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발언은, 자신과 김준혁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김준혁이 말했다.
“네 말처럼 상대의 의도를 따라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검은 속내라 할지라도 인천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만약 그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개미들을 처리한다면 인천은 그 자체만으로도 득을 본다. 그 과정에서 세력이 개입했다면 불순한 의도를 걸러 내면 그만이고, 만약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인천을 정말 내놓으실 생각입니까?”
“인천을 누가 다스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내 자리에 앉아 인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자리에서 물러나 그를 보좌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그 누가 그렇게라도 인천을 이용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나. 중앙 정부도 우리를 단순히 희생양으로 생각할 뿐, 인천을 중심으로 무엇을 하려는 시도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일군 도시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의미지.”
입이 썼다.
김준혁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게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인천에 득이 되는 것이다. 만약 중앙 정부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우릴 이용하면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했다면, 나는 진즉에 정부의 개가 되었겠지.”
칙칙.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인천 시장.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만큼 대단한 자리가 아니다.
그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대재앙을 대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악하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했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 모습에 이태성은 말을 삼켰다.
‘……시장님.’
5번째 대재앙.
그때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투쟁하는 김준혁의 모습에, 촉망받는 인재였던 이태성은 김준혁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현실에 찌들어 버린 모습조차도 이태성에게는 안쓰럽게만 보였다.
이 혼란한 세상에서, 일반인에 불과한 사람이 거대한 도시를 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앙 정부의 조사관이 도착했습니다. 레드문 사건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빌어먹을 녀석들.”
2시간 전.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기 전에 중앙 정부에 보고했다.
레드문과 같은 거대 길드의 문제는 보고 대상이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사관이 찾아온 것을 보면 레드문이 중앙 정부에 연줄을 댔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짜증이 치밀었다. 며칠은 여유를 즐기려고 했으나, 조사관이 득달같이 찾아오는 바람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김준혁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기다리라고 해. 다 피우면 내려갈 테니까.”
* * *
예상대로였다.
조사관 문태준은 차동철과 인연이 있었다.
차동철은 서울에 진출하기 위해서 뒷돈을 뿌렸고, 그중에는 중앙 정부의 인물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 정부의 접객실.
김준혁을 기다리며 문태준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하루아침에 레드문 정도 되는 길드가 멸망해 버리다니. 대체 인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조금 전.
그는 인천 정부의 보고에 충격을 받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차동철과 미래를 도모했는데, 그와 더불어 레드문 전체가 몰살당했다는 충격적인 보고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문태준은 기존에 있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인천으로 향했고, 사건이 발발하고 겨우 몇 시간 만에 인천 정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사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잔인하고 확실한 처리 방식은, 절대 개인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레드문을 단시간에 몰살시키려면 서울의 세력이 움직여야 하는데, 서울에서는 그만한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았어. 그럼 대체 누구지? 인천에 이만한 힘을 보유한 세력이 있다는 건가.’
만약 새로운 세력의 소행이라면.
문태준의 임무는 무조건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잔인하게 일을 벌였으니 처벌하는 것이 맞으나, 그만한 힘을 보유한 세력이 중앙 정부에 힘을 보태겠다고 하면 두 팔 벌려 반길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문태준이 빠르게 인천을 찾아온 이유는, 새로운 세력일 경우 실적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레드문.
이미 멸망해 버린 이들에게 의리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마침내 기다리던 존재가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문태준 조사관님.”
“왜 이제야 내려오십니까? 뻔히 바쁜 사람인 거 알면서,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김준혁이 웃었다.
조사관과 시장.
단순히 신분을 비교했을 때는 시장이 우위에 있건만, 문태준은 마치 김준혁보다 위에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차이였다. 중앙 정부는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조차도 지방 정부를 우습게 보았다.
대재앙이 들이닥칠 때마다 지방 정부의 수뇌부들은 죽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중앙 정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래야.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태준은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기에, 강압적인 태도로 김준혁을 다그쳤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상세하게 설명해 보십시오. 레드문과 같은 길드가 하루아침에 멸망해 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절 실망시키진 마십시오.”
차갑게 물었다.
김준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선택의 기로였다.
진실을 말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한다면, 조사관은 사람들을 동원해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물론 진실을 감출 수는 있다.
내부 CCTV와 목격자 모두 인천 정부 손아귀에 있으니까.
문제는 범인을 모른다는 결론은, 언젠가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가 발각될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었다.
김준혁이 말했다.
“범인은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 인천 정부의 소행입니다.”
* * *
문태준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방금의 발언.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레드문은 백 명이 넘는 헌터를 보유한 인천 최대의 길드입니다. 그런데 겨우 인천 정부가 하루아침에 그들을 멸망시켰다는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범인을 찾지 못한 무능력함이 부끄러우면, 현실을 인정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이 올바른 대응입니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인천 정부의 힘이 레드문보다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단시간에 압도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은, 절대 인천 정부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문태준의 반응.
예상했던 바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그의 모습에, 김준혁은 이것이 인천 정부의 현실임을 알았다.
‘실제로 문태준의 발언은 틀리지 않았어. 직할대를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단시간에 레드문을 학살하는 것은 불가능해. 기습적인 공격으로도 이렇게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겠지.’
인정했다.
인천의 현실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나, 김준혁으로서는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와 거래를 했다.
그가 정말로 여왕개미 토벌에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적어도 결과를 확인하는 한 달 전까지는 로만 드미트리의 정체를 지켜 주어야만 했다.
권력자의 자리란 그렇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말에 무게를 두어야, 그 누구도 인천과의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고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약속을 위해서 뒷감당을 떠안았다.
한번 결정을 내렸다면, 절대 망설이지 않는 것이 김준혁의 철칙이었다.
“겨우가 아닙니다. 제가 명령했고, 제 수하들이 한 일입니다. 레드문은 인천 정부가 멸망시켰습니다.”
툭 내뱉은 말.
문태준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김준혁의 말이 거짓임을, 김준혁과 문태준은 서로 모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