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파격적인 행보 (3)
방금의 발언.
선을 넘었다.
바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태성이, 순간 발끈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감히……!”
“직할대장.”
슥.
김준혁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낮게 깔려 들어오는 목소리에, 이태성은 로만 드미트리를 노려보면서도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김준혁은 하늘과도 같았다. 특별한 인연으로 김준혁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이태성으로서는, 개인의 감정보다는 김준혁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한발 물러났다.
김준혁은 다소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참 곤란한 제안을 하시는군요.”
둘의 관계.
조금 전까지는 단순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모두가 탐내는 실력자고, 김준혁은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인재를 탐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인천 정부를 원한다는 발언은 모든 관계를 무너트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단순히 일개 개인으로 생각했던 김준혁으로서는, 지금부터 상대의 의도를 의심해야만 했다.
김준혁이 말했다.
“이 자리를 찾아오기 전까지,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이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갈피를 잃었기에, 저희가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 드리는 대가로 실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인천 전체를 원한다는 발언은 달갑게 들리지 않는군요. 인천에 나타난 것도, 레드문과의 분쟁도, 그리고 지금의 이 만남도. 모두 의도가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의도.
엄청난 차이였다.
상대에게 의도가 있다면,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도 한들 김준혁은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어떤 의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지금부터 로만 드미트리 님이 설명할 영역입니다. 의도가 없는 일개 개인은, 인천과 같은 거대한 도시를 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도록. 대체 어째서 인천 정부를 원하시는 겁니까?”
싸늘했다.
일반인에 불과한 김준혁이 한 집단의 수장으로 지내면서, 이곳 인천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경계심은 자연스러웠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과도한 요구를 해 왔다면, 김준혁은 끝까지 웃음을 보이며 상대와의 협상을 이어 가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천을 언급한 것은 의도가 불순했다.
선을 그었다.
경계심을 보이며,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을 살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방금과 같은 제안을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앞으로 저는 세력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중앙 정부와 같은 특정 집단의 지시를 받는 세력이 아닌,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세력. 저는 그 시작점으로 인천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김준혁 시장님으로서는 의문스럽겠지요. 대체 왜 많은 도시 중에 인천을 시작점으로 택했는지.”
끼익.
몸을 기댔다.
상대를 존중하며 말하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상대를 압박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기에 선택했을 뿐, 반드시 인천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 *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인천을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천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상황에, 김준혁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A등급 헌터.
대단한 존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인천은 거대한 도시를 형성했고,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일개 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탐을 낼 만큼 우습지는 않았다.
막말로 인천의 병력을 동원한다면 A등급 헌터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더는 대화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김준혁으로서는 왠지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눈앞의 이 사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허무맹랑한 발언을 내뱉을 때도, 이태성이 적대적으로 반응하며 앞으로 나설 때도. 어떤 문제가 생겨도 상관이 없다는 듯이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기에, 나는 이 사내의 제안을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다.’
역설적이었다.
상대가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였다면, 김준혁은 이런 허무맹랑한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이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천을 바랐다.
인천에 있기에 인천을 바란다는 그 말은, 김준혁의 심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만약 레드문이 몰살당한 광경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제안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인천을 넘기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개인이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미 체계를 갖춘 저희가 고개를 숙일 이유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인천.
힘겹게 일군 도시다.
중앙 정부에서도 인천의 맹목적인 충성을 바랐으나, 김준혁은 끝까지 그럴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인천 시장의 자리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선택 한 번에. 수많은 인천 시민의 목숨이 걸려 있기에 함부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상대가 중앙 정부든, 겨우 일개 개인이든, 어떤 식으로든 인천에 득이 되는 결과를 얻길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레드문을 학살하는 파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가 만약에 인천의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갖추었다면, 더는 그의 제안은 허무맹랑하다 할 수 없다.’
만에 하나.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김준혁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제가, 그리고 인천 정부가 바라는 요구는 단 하나입니다. 당신을 따르면 인천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십시오. 제게 그러한 확신을 준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 * *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김준혁이 물러나자, 강민호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김준혁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조금 전.
김준혁이 말했다.
“제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인천 주변에서 병정개미들이 말썽을 부린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병정개미는 D등급의 몬스터. 인천 정부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나, 문제는 병정개미의 서식지에서 여왕개미가 무려 두 마리나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여왕개미는 등급 이상의 위험도를 지닌 몬스터입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B등급이 책정되었지만, 하루에 백 마리 이상의 개미를 생산해 내기에 여왕개미가 존재하는 지역은 인간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최근.
인천 정부는 여왕개미 토벌에 나섰다.
사전에 파악한 내용대로라면 간단한 문제였으나, 여왕개미가 두 마리나 발견되면서부터 상황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개미들은 원래 하나의 여왕개미만을 허락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 마리의 여왕개미는 서로 공존했고, 그로 인해 개미들의 숫자가 단시간에 급속도로 늘어났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토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대재앙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천 마리의 개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인천 정부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게다가 개미들의 서식지는 전투에 어려움이 많은 땅굴 속. 김준혁은 고민 끝에, 일단 개미들의 숫자를 줄이는 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자고 판단했다.
그러한 문제를.
로만 드미트리에게 맡겼다.
그 이면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세력을 끌고 와 개미들을 처리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은 거절할 것이다.
세력의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인천을 기점으로 세력을 형성하려 한다는 사람이, 처음 말한 것과는 다르게 이미 세력을 보유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였다.
집단이 해결할 문제를 혼자서 처리해 버린다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대재앙이 찾아왔을 때 강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인천을 맡길 만한 실력자인지를 확인한다면, 그때는 정말 그와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영리했다.
전적으로 인천 정부가 이득이 되는 제안이기에, 강민호로서는 부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김준혁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이용해서 인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고, 만약에 토벌에 실패할지라도 김준혁으로서는 손해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거절하십시오. 제가 다른 대안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설마 받아들이시려는 겁니까?”
강민호가 당황했다.
김준혁의 제안.
허무맹랑했다.
김준혁도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내뱉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가 인천 시장의 평가에 응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네 말처럼 다른 대안을 택할 수도 있으나, 이번 기회에 이 세상이 말하는 어려움을 경험하고자 한다.”
궁금했다.
안전지대 너머.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직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등급의 구분이 체감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천 정부조차도 어려워하는 문제를 직접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김준혁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준혁.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헛소리로 치부할 얘기를, 그는 인천을 위해서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평범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인천을 택할 이유가 없었으나, 지금은 김준혁이 그 이유가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개미굴의 토벌은 한 달 뒤에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네게 가르칠 것이 있다.”
“……예?”
가르친다는 말.
그때만 해도, 강민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 *
자리를 옮겼다.
사람이 없는 공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헌터들은 스킬을 사용한다고 했지. 이 자리에서 그 스킬을 사용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의문이 들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이니 일단 실행에 옮겼다.
강민호가 검을 들었다.
“저는 다른 헌터들보다 스킬의 보유 숫자가 적은 편입니다. 각성 시기가 늦기도 했고, 특별한 연줄도 존재하지 않아서 혼자서 스킬을 터득했습니다. 일단 첫 번째로는 대시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확.
파팟.
가볍게 일어나는 마나.
강민호가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가더니, 가상의 적을 향해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강격.”
콰앙!
땅바닥이 파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강민호는 수차례 스킬을 펼쳤고, 단순한 동작에 마나를 실은 특별하지 않은 스킬들이 전부였다.
강민호의 한계였다. E등급에 일반 헌터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련의 모습.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강민호를 살폈다.
‘강민호가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마나는 마치 저장된 체계를 행하듯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스킬의 원리를 모르는 이유겠지.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체계를 이해하고 몸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편안하게 힘을 발현하고 있다. 단시간에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이나, 힘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한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강민호는 한참 동안 스킬을 시전했다.
이윽고 검을 거둔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후욱, 후욱. 끝입니다.”
참담했다.
스킬.
그것은 독이었다.
육체는 스킬을 발현할 만큼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스킬을 연달아 사용하니 강민호는 육체에 과부하가 온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드미트리의 전승이 왜 고평가를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안일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전승의 힘은 확연하게 다른 힘을 부여했을 테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의 네 상태로는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만 될 뿐이다. 지금부터 네가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강해질 방법을 알려 주겠다.”
슥.
검을 들었다.
당황하는 강민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것의 이름은 수라 검법, 수라 심법이라고 한다.”
“드, 드미트리의 기술을 알려 주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전승 능력이라 불가능한 일일 텐데…….”
눈을 부릅떴다.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
유명했다.
드미트리 병사들의 기억을 물려받은 사람은 차동철뿐만이 아니었고, 드미트리에 그러한 기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와 같은 대단한 기술을, 그것도 가르치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전승 능력을 대체 어떻게 알려 준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가 수라 검법을 펼치며 말했다.
“의심하지 마라. 너는 지금부터 반쪽짜리가 아닌, 진짜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