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75화 (475/615)

475화 파격적인 행보 (1)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레드문.

인천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

지금의 성장세라면 언젠가 서울 입성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던 레드문이, 겨우 단 한 명과의 분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눈에 밟혔다.

시체들은 생전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발악한 것 같았지만,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을 기점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할대 대장.

이태성이 다가와 말했다.

“차동철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렸다.

차동철의 모습은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냈다.

“시체에 남은 흔적을 토대로 추정했을 때, 아무래도 차동철은 생전에 고문을 당한 것 같습니다.”

“고문?”

“예. 고문의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복부를 후벼판 상처는 절대 격렬하게 공방을 주고받던 도중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아시다시피 차동철은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그런 차동철을 비롯한 레드문 전체를 일방적으로 학살할 정도라면, 신원 미상의 절정 헌터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건 절대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언했다.

이태성 또한 절정 헌터다.

차동철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상식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준혁도 동의했다.

일개 개인의 소행이라기엔, 눈에 밟히는 광경은 참담했다.

‘……세력이라니.’

머리가 아팠다.

세력을 형성한 신원 미상자.

어떻게든 그를 영입할 생각이었건만, 세력을 등에 업었다면 그에게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검은 속내가 있을지도 몰랐다.

김준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아플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버릇에,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칙칙.

“후우.”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었다.

아직.

상황을 단정 지을 때는 아니었다.

최악은 대비해야 하나,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로는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직할대원 하나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CCTV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이 안에 상황이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 * *

자리를 옮겼다.

직할대원이 말했다.

“외부에서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재생해.”

“예.”

CCTV 화면을 재생했다.

이윽고.

학살이 일어나기 이전, 절정 헌터가 처음 레드문 건물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재생되었다.

예상과는 달랐다.

이태성은 세력을 대동했을 것이라 말했지만, 절정 헌터는 강민호와 단둘이 레드문 건물에 들어섰다. 내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고상호의 죽음을 밝힌 모양인지 레드문의 길드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접객실로 안내되었지만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소리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수군거리는 길드원들.

얼굴이 달아오른 고상민.

자꾸만 무기를 만지작거리는 그들의 태도는, 절정 헌터가 매우 불편한 손님임을 증명했다.

마침내 차동철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차동철은 사나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신호에 레드문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설마.”

김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은 빗나갔다.

당연히 집단이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결과물이, CCTV 화면 안에서 절정 헌터 혼자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강민호는 나서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방관하는 사람처럼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볼 뿐, 사방에서 득달같이 달려드는 레드문의 길드원들은 절정 헌터 홀로 상대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절정 헌터는 달려드는 족족 모조리 도륙해 버리더니, 차동철이 순간적으로 기습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막아 냈다.

차동철과의 접전. 차동철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위력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제대로 유효타 한 번 성공시키지 못하고 팔 한쪽이 날아가고 말았다.

끝이었다.

무너지는 차동철.

절정 헌터의 고문.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다시 시작된 학살에, 김준혁은 그만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시장님.”

이태성이었다.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그 말에 어떤 의미가 함축되었는지 김준혁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 신원 미상의 절정 헌터는 A등급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물은 불가능하겠지.”

소름이 돋았다.

A등급.

대한민국에 30명도 채 되지 않는 특별한 존재가 바로 신원 미상자의 정체였다.

입이 바짝 말랐다.

만약 강민호의 경고를 무시하고 절정 헌터에게 접근했다면, 레드문을 향한 분노를 인천 정부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A등급 헌터가 어디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B등급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하는 엄청난 인재인데, A등급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귀빈의 대위를 받는 위치.

미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귀화를 요청해도, 그들은 억만금을 들고나와 A등급 헌터를 반길 것이다.

‘강민호와의 대화로 유추했을 때, 신원 미상의 절정 헌터는 무소속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한 달의 기한을 주었던 것이겠지. 이 사실을 중앙 정부에 보고해야 할까? 만약 A등급 헌터의 존재를 중앙 정부가 알게 된다면,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 곧바로 사람을 보내겠지.’

생각을 거듭했다.

이번 사건.

절정 헌터의 잘못이 아니다.

스케일이 커서 수습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CCTV 영상이 증명하듯 차동철이 먼저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 고민하는 문제는 잘잘못의 영역이 아니었다. CCTV 화면이 흑백으로 물들었는데도 한참을 고민하던 김준혁이, 이태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직할대장.”

“예.”

“이번 일, 밖으로 누출될 가능성이 있나.”

“내부적으로는 없습니다. 절정 헌터를 감시하던 인원은 직할대의 소속이고, 이번 작전에 동원된 병력도 모두 직할대입니다. 직할대는 인천 시장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릅니다. 저희가 함구한다면, 레드문의 멸망 사실이야 밝혀지겠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감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CCTV 자료를 폐기하라. 그리고 레드문의 멸망은 적당한 이유를 붙여서 사람들에게 알려라.”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칙칙.

담배에 불을 붙였다.

헌터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되도록 육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함이나, 일반인인 김준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그야 뻔하지 않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A등급 헌터의 존재를 알기 전에 먼저 영입을 시도할 것이다.”

* * *

로만 드미트리는 빌라로 돌아왔다.

고상호의 시체는 클리너(cleaner)를 불러 치운 상태였고,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의 요청에 따라 준비한 것들을 가져왔다.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일단 기본적인 것들이고, 추가로 세부 자료를 가져오겠습니다.”

전승자의 진실.

언어보다 먼저 알아 둘 필요성이 있었다.

그동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겨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드미트리의 전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번과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

로만 드미트리는 자료들을 찬찬히 살피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포인트들을 집중적으로 확인했다.

첫 번째로 시스템(system).

[절대자가 대재앙을 예고한 이후, 사람들은 시스템과의 연결 고리가 생겨나는 것을 각성이라고 표현한다. 일종의 게임 형태의 이 시스템은 몬스터를 처리할 때마다 일정 보상을 지급하는데, 일반적인 헌터들은 모두 이 방식으로 강해진다.그것이 대다수라면 전승자와 선택받은 자는 전체의 0.01%인 매우 특별한 존재다.]

예외의 존재.

전승자는 차동철의 설명대로였다.

그들이 차원 너머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면, 선택받은 자들은 말 그대로 선택을 받는다.

[최초의 절대자 이외에도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은 직접 각성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가 강해질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부여한다. 일종의 스폰서(sponsor)와도 같은 시스템에, 대재앙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어쩌면 절대자들의 유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기본적으로 전승자들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자.

선택받은 자.

복잡한 연결 고리였다.

절대자들은 지구를 시험의 무대로 삼았고, 10번의 대재앙을 예고하면서 그들이 대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특별한 능력을 부여했다.

어쩌면 사람들의 추측처럼 이것은 그들의 유희일지도 몰랐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내미는 방식은, 상식의 영역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인 부분들.

그것들을 모두 확인했다.

드미트리의 전승자 이외에는 전생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없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마계 정벌 당시. 마계는 한때 마계를 공격했던 미지의 존재들을 따라서, 본인들도 지상계를 공격하는 유희를 시작했다고 했었지. 그와 비슷한 맥락일 수 있다. 이 절대자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류의 재앙을 즐기는 존재인 것이지.’

단편적인 정보로는 진실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재앙도, 재앙을 막아 낼 힘도 모두 절대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만한 능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가능성을 의미했다.

바로 그것.

로만 드미트리는 그 가능성을 원했다.

* * *

강민호를 불러 물었다.

“10번의 대재앙. 그 참담한 현실을 모두 버텨 내고 나면, 너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나.”

“……글쎄요.”

강민호가 말을 흐렸다.

대재앙 이후의 미래.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기에, 대재앙 이후의 미래는 사람들에게 아직은 섣부르게 말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물론 그런 미래가 찾아오길 간절하게 바라고는 있다. 하지만 희망과 절망은 비례하기에, 괜한 희망으로 절망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사람들은 대재앙 이후의 미래를 모두 어렴풋이 예상한다. 아마도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오지 않겠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절대자가 만약 유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였다면,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사람들을 학살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개미의 목숨은 사라지든 그대로 유지되든, 그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절대자.

신과 같은 존재.

‘모든 문제는 절대자로부터 비롯되었다.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절대자가 신적인 존재임을 증명하지. 절대자의 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차원 너머의 기억들이 지구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처럼, 두 세상은 붕괴하지 않고도 공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절대자를 만나야만 한다. 그를 무너트리고, 그의 능력을 통해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새로운 목적.

삶의 방향성이 정해졌다.

절대자.

그는 최초의 재앙 이후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존재들은 수차례 나타난 기록이 있으나, 최초의 절대자만큼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난 경우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다.

대재앙을 선언하기 위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10번의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내면 다시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았다.

그때가 기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말했었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나만의 영역을 형성할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존재감이 부풀었다.

강민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이 세상 전체를 다스릴 것이다. 내 이름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10번의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낼 수 있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파격적인 발언.

숨이 막혔다.

그건 강민호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상상조차 불가능한 종류의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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