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74화 (474/615)

474화 한 번의 실수 (3)

차동철의 발언.

예상 밖이었다.

그의 입에서 드미트리가 언급된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의 머릿속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설명대로라면 전승 능력은 다른 차원과의 링크(link)를 뜻한다. 다른 차원의 드미트리. 설마 내가 건국한 드미트리 제국이, 이들이 말하는 드미트리와 같다는 것인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나를 폭발하며 달려드는 차동철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적당히 힘을 풀고 공격을 받아 주었다.

카앙!

카카카카캉!

공격이 작렬했다.

차동철은 강하게 내리치더니, 기세를 이어 나가겠다는 듯이 숨을 돌릴 틈 없이 빠르게 몰아붙였다.

날카로운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밑바닥에서 B등급 헌터의 자격을 확보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고비를 넘겼고, 레드문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검 하나로 증명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릉.

사방이 찢겨 나갔다.

대기를 꿰뚫고 치고 들어가는 강력한 공격에, 이번만큼은 로만 드미트리도 막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앙-

막혔다.

그것도 너무나도 가볍게.

본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차동철로서도, 이번 공격이 막힌 것에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심정을 모르는지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들의 시야에는 엄청난 접전처럼 보였다.

서로 숨 가쁘게 뒤얽히는 일련의 상황은,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승부였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동철이 행한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하다. 내가 드미트리 제국의 병사들에게 가르친 수라 심법, 수라 검법과 같다.’

드미트리의 이름을 듣고도.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임을 확인하고도.

로만 드미트리는 만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동명일 수도 있으며,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은 자신이 아니라 마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곳은 본래 자신이 살았던 세상의 먼 미래.

중원 무림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이 전생에 경험했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제국의 병사들에게 무공을 전수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합하도록 일부를 수정했었다. 지금 차동철이 사용하는 무공은 그러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같다. 정말 이들이 말하는 드미트리 제국이 내가 건국한 나라라면. 나는 그 사실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차동철의 전승.

로드니라는 이름의 병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억하기로, 로드니는 흔한 이름이라서 드미트리 제국의 병사 중에 동명이인이 많았다.

특별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면 일반 병사일 터. 그런데 일반 병사에 불과한 존재가 차원의 경계를 넘어설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신빙성이 있는 가설은, 마계 정벌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밖에 없었다.

마계 정벌.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차원의 경계를 넘었다.

그로 인한 대가는 로만 드미트리가 짊어졌지만, 다른 존재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더는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차동철은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수십 차례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중 단 한 번도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본인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뭔가 단단하게 틀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악에 받쳐 달려들던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팔뚝에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번뜩.

“크악!”

보지 못했다.

당연히 반응할 수도 없었다.

팔이 잘려 나가는 광경에, 차동철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 * *

“크억, 크허억.”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팔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통증에, 그리고 머릿속으로 빨려드는 자신의 상황에 차동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대는 생각한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공방을 주고받는 내내 일방적으로 농락당했고, 상대가 끝내겠다고 마음먹음과 동시에 자신의 팔 하나가 잘려 나가고 말았다.

벽에 몸을 기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차동철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 대답에 따라, 네 처분을 결정하겠다.”

차가운 음성이었다.

길드 마스터가 핍박받는 상황인데도, 주변을 둘러싼 레드문의 길드원들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30초 만에 십수 명을 도륙해 버린 강력한 무력에, 그들이 신뢰하는 차동철마저도 쓰러트리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전승자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을 말해라.”

“그게 무…… 크악, 크아아아악!”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복부에 검을 쑤셔 넣었다.

되물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동철은 복부를 파고드는 통증에 몸을 이리저리 틀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제야 알았다.

상대가 미친놈임을.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성실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승자는 다른 차원의 기억을 물려받은 이들을 말합니다. 차원의 숫자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차원의 경계 너머에 얼마나 많은 차원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드미트리 제국이 포함된 차원 외에도 현재 여러 차원의 존재가 밝혀진 상태입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S등급 랭커 리처드는 방랑 검객 카리스의 전승 능력을 얻었으며, 카리스는 해당 차원에서 최강의 검객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물론 리처드와 같은 전승자들이 아무리 활약한들, 사람들은 드미트리 제국 출신들이야말로 전승 능력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숨을 자꾸만 헐떡였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을 턱턱 막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차가운 시선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전승자들. 마계 정벌이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업적을 이루어 낸 그들의 능력은 매우 특별하며, 방금 말한 리처드 같은 경우에도 ‘드미트리의 섬광’을 물려받은 스페인의 S등급 랭커 사무엘에게 패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재 알려진 최상위 등급 랭커 일부가 드미트리의 기억을 물려받았으며, 그래서 저같이 일반 병사 신분이라도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드미트리의 섬광.

묘한 기분이었다.

크리스의 칭호를 여기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전승자들의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전승은 기억을 받아들인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육체에 각인되는 느낌입니다. 전승받은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원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죠. 저는 일반적인 전승자들과는 다르게 기억의 돌을 사용했습니다. 강제적으로 다른 차원과 연결하는 방식이라 실패의 위험이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억의 돌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입니다. 만약에 드미트리의 섬광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존재의 기억을 받아들일 경우,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상위 등급 헌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더는 말할 것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 낸 차동철은, 로만 드미트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레드문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이지 않습니까. 이번만 눈감아 주신다면, 이렇게까지 말하는 제 노력을 알아주신다면. 레드문은 로만 드미트리 님의 든든한 배경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인천에서 지내며 필요한 모든 것을 이 레드문이 담당하겠습니다.”

간곡한 목소리였다.

자존심은 버렸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했다.

5년 전.

그때도 같았다.

살귀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차동철은 삶을 구걸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한 번의 실수라.”

시선을 돌렸다.

차동철을 비롯한 레드문의 길드원들.

선택 한 번에 많은 목숨이 걸렸다.

순간 강민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에게 증명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하지 않는 선례를 바란다. 성실하게 대답한 대가로 고통 없이 끝내 주마.”

그 순간.

퍽.

차동철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것은 명확한 메시지였다.

차동철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레드문의 길드원들은 단 한 명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 * *

밖으로 나왔다.

검을 늘어트리고 걸어가는 걸음에 따라, 빨간 핏방울이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 뚝.

레드문.

그들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하늘을 올려보며, 자신을 따라 걸어오는 강민호에게 물었다.

“강민호. 너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잘 모릅니다. 차동철이 설명한 것처럼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이 특별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로만 드미트리 이름 자체를 물어보시는 거라면 처음 들어 봅니다.”

“그런가.”

차동철과 강민호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드미트리만을 알았다.

그렇다면 전승 능력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며, 드미트리 제국을 자신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굳이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라는 사실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모르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할 필요성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은 샐러맨더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자라는 존재로 인해 차원에 문제가 생겼고, 그것이 전승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정말.

정말 어쩌면.

샐러맨더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세상이 붕괴할 것을 염려해서 차원 이동을 받아들였지만, 이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잘만 활용한다면 그 문제 또한 해결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가설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가능한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운 목적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었다.

두 세상의 공존(共存).

전생의 삶을 이어 나갈 기회.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강민호. 지금부터 네가 나를 위해 해야 할 것이 있다.”

* * *

레드문 사건 10분 전.

인천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그게 사실인가.”

“예. 절정 헌터가 레드문의 고상호를 죽였으며, 지금 강민호를 내세워 레드문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라면 둘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절정 등급의 신원 미상자.

강민호의 요청대로 그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주변에 사람을 심어 두었다.

그 덕분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레드문이 절정 헌터에게 접근했고, 둘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커지고 말았다.

둘의 충돌.

좋지 않았다.

인천 정부 입장에서는 레드문이나 절정 헌터 또한, 대재앙의 혼란을 대비하기 위해 필요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민에 빠졌다.

고상호의 죽음으로 분란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인천 정부가 개입한다면, 절정 헌터를 보호하려다 인천 정부까지 분란에 휘말릴 수도 있다.

‘절정 헌터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B등급.

귀했다.

5번째 대재앙이 들이닥쳤을 때 인천이 엄청난 피해를 받았던 이유는, 상위 등급의 몬스터들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실력자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했다.

지난 대재앙과는 다른 결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준비로는 힘들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실력 있는 헌터들은 대부분 중앙 정부에 소속되어 있다. 중앙 정부가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떠나, 굳이 위험한 인천까지 내려와서 몸을 맡기는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지. 그런 의미에서 아직 대한민국의 속사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원 미상의 절정 헌터는 인천 정부에 너무나도 좋은 기회다. 설령 이번 일로 레드문과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길지라도, 실력자를 얻을 수 있다면 도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악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준혁이 말했다.

“직할대(直轄隊)를 준비하라.”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최대한 직할대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으나, 지금은 드러내야 할 시기다.”

“알겠습니다.”

직할대.

김준혁이 보유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단체.

사람들이 모르는 힘을 드러낼 차례였다.

그로부터 10분 뒤.

김준혁은 직접 움직였다.

절정 헌터에게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는 서둘러 레드문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렇게.

“……이게 무슨.”

충격에 빠졌다.

레드문 건물.

그 내부에서 차갑게 식어 가는 시체들이 김준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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