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새로운 시작 (4)
지난 며칠.
레드문은 정보의 진위를 확인했다.
“E등급의 일반 헌터 강민호가 ‘신원미상자’를 대동하고 인천에 들어온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며칠 전, 강민호는 E등급 사냥터의 출입증을 발급받았습니다. 그곳은 가끔 D등급의 병정개미가 출몰하는 지역인데, 현재 강민호의 실력으로는 병정개미를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헌터 마켓(Hunter market)에서 병정개미의 부산물을 판매한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만약 한두 마리의 부산물이었다면 그가 승급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겠으나, 대여섯 마리의 부산물인 것으로 보아 신원미상자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강민호가 거주하는 빌라에 신원미상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레드문.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헌터 길드인 만큼, 그들은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정보를 수집했다.
레드문의 행동대장.
고상호는 길드장의 명령에 따라 헌터 마켓을 방문했다.
이번 사건은 인천 정부가 개입되어 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분란이 생겨날 테니, 일단 신원미상자가 절정 헌터라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신원미상자가 처리했다고 추정되는 병정개미의 부산물을 확인한다면, 적어도 그가 실력자인지 아닌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고상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정개미의 사체를 살피는 그의 모습에, 헌터 마켓의 관리인이 말했다.
“저도 처음에 확인하고 당황했습니다. 병정개미는 단단한 외피를 가지고 있어서 숨통을 끊기 위해 난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경악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외피를 베어 버렸습니다. 고상호 님이라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실력은 최소 B등급 이상이라는 것을. 문제는 단순히 사체를 확인한 것만으로는, 이렇게 만든 사람의 전력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실력자가 나타난 거지?”
고상호.
그는 C등급이었다.
특급 헌터로서 잔뼈가 굵은 그는, 병정개미의 사체만 보더라도 상대가 자신보다 한 단계 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절정 헌터는 인천 정부와 분란이 생길지라도 반드시 영입해야 할 인물이고, 그는 곧바로 길드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그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신원미상자를 영입하라. 다른 녀석들이 그를 낚아채기 전에, 무조건 영입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재.
고상호는 길드장의 명령에 따라, 신원미상자가 거주한다고 추정되는 강민호의 빌라를 방문했다.
* * *
현관문이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고상호는 속으로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정말 외국인이었어?’
수집한 정보 중.
신원미상자가 외국인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미스터리였다.
B등급 이상의 실력자들은 외국에서도 절대 유출하지 않으려는 인재인데, 어째서 외국인 헌터가 신원미상자로 발견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상대가 무소속의 실력자라는 것. 국적이 어떻게 되든 간에, 실력자라는 단 하나의 사실이면 그를 영입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고상호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드문 길드의 고상호라고 합니다.”
손을 내밀었다.
살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
레드문이라는 이름에 호기심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고상호는 멋쩍은 듯 손을 거두며 말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기분이 많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드문은 인천을 대표하는 헌터 길드입니다. 앞으로 찾아올 대혼란을 대비해 B등급 헌터인 길드장님을 필두로 힘을 합쳤고, 현재 인천에서 레드문만 한 길드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레드문에 들어오신다면, 이곳 대한민국에서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길드장님은 다른 B등급 헌터들과는 다릅니다. 이미 5년 전에 B등급의 자격을 확보했으며, 머지않아 A등급 승격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의 말처럼.
레드문은 대단한 길드였다.
실력자들 대부분이 서울에 집중된 상황에서, 레드문의 길드 마스터는 인천에 터를 잡아 세력을 형성했다.
절정 헌터가 이끄는 길드. 인천의 헌터들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길드를 창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인천에서 이름을 알아주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현재.
레드문에 소속된 헌터는 약 백여 명.
고상호의 자부심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레드문으로 오십시오. 절정 헌터이시라면, 저희가 그만한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완벽했다.
상대로서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수신자는 강민호였다.
달칵.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 네 소행인가.”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차갑게 묻는 물음에, 강민호는 본능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닙니다. 인천 정부에 보고하기는 했으나, 전에 요청하셨던 것처럼 한 달간은 절대 접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아무래도 정보가 새어 나간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이 세상은 타인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한 존재를 어떻게 처리하지?”
당혹스러운 전개였다.
고상호는 자신을 앞에 두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무단으로 침범한 존재라니요. 갑작스럽게 방문했다고는 하나, 그런 식으로 매도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대답해.”
로만 드미트리는 고상호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
강민호를 재촉했다.
아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강민호는, 이윽고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혼란 이후, 타인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하는 것은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합니다. 만약 경고하고도 상대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처벌하셔도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툭.
통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고상호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선택하라. 이대로 물러나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지, 그 선을 넘어 나의 영역을 침범할 것인지.”
* * *
순간.
고상호는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은 조잡한 물건을 판매하려는 방문판매원이 아닌, 레드문 길드를 대표해 상대를 영입하러 왔다.
그런데 이따위 대우라니.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상대가 실력자라고 한들, 레드문이 무조건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모양인데, 레드문의 제안은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입니다. 절정 헌터? 예, 압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하지만 레드문은 이미 인천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세력을 갖추었고, 당신이 일개 개인이라면 우리는 거대한 집단입니다. 그러니 현명하게 생각하십시오. 대재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그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절정 헌터라고는 하나 혼자서 모든 위협에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대재앙.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한들, 혼자서는 대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국가들이 악을 쓰고 쉘터를 형성하는 이유는 일개 개인의 한계를 증명하는 예입니다. 외국인인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레드문은 당신을 구제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 인천 바닥에서는, 인천 정부보다도 레드문을 신뢰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레드문의 행동대장.
고상호는 실력자들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을 종종 겪었다.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는.
콧대를 꺾어야만 했다.
레드문에 흡수하기 위해서,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탁.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현관으로 발을 들이며, 고상호는 사나운 얼굴을 보였다.
“우리를 검증하고자 한다면 검증해 보십시오. 레드문은…… 악!”
번뜩.
갑작스러운 비명.
고상호가 눈을 부릅떴다.
현관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고상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이 날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 * *
전화를 끊은 직후.
강민호는 곧바로 빌라로 향했다.
때마침 짐을 옮겨 놓기 위해 빌라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정보가 새어 나가다니.’
방금의 통화.
누군가가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간 것 같았다.
화가 났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약속대로 인천 정부 외에는 그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정보가 누출되고 말았다.
인천 정부의 소행은 아닐 것이다. 김준혁과 대화를 나눌 때도, 인천 정부는 자신들이 접근하지 않아도 정보는 누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많은 끄나풀.
그들의 머리 중 하나가 움직였다.
강민호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로만 드미트리와의 인연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했다.
황급히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었던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 어어?”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
고통스러운 듯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내.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다리를 잃은 고상호의 모습에, 강민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보이는 그대로다. 이자가 나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했고, 나는 그 대가로 다리 한쪽을 베었다.”
그 말에.
통화 내용이 번뜩 떠올렸다.
정당방위를 언급했던 그 말이, 설마 이런 참담한 광경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기랄 것이 없었는데, 고상호의 다리는 마치 검에 베인 것처럼 절단면이 깔끔했다.
피로 물든 손.
소름이 돋았다.
손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실력이라면,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일지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저자는 본인이 레드문의 소속이라고 했다. 이번 일로 인해, 그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 같나.”
“……저도 얼굴을 아는 인물입니다. 레드문의 행동대장 고상호. 레드문의 주요 인물이 공격당했으니, 그들은 인천에서의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보복할 겁니다. 조금 전에 통화로 말씀드렸던 정당방위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법도로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는 하나,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공격당하고도 참아 넘기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번 일을 본인들의 잘못이 아닌, 레드문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일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런가.”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때였다.
고상호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이제 레드문의 영입 제안은 끝이다! 날 이렇게 만든 대가로 레드문이 널 공격할 것이고, 너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새로운 삶.
로만 드미트리는 갈림길에 섰다.
아직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는 정하지 않았으나,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군림하는 것.
적의를 보이는 존재들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퍽.
고상호의 머리가 날아갔다.
손날로 행한 공격.
단 일격에, 고상호는 본인이 죽었다는 인식조차 없었는지 분노하던 얼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가고 말았다.
툭.
데구루루.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바라보는 그때, 강민호의 귓속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해 보니 아직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나.”
백중혁.
로만 드미트리.
두 번의 삶과 두 가지의 이름.
“내 이름은 로만 드미트리다. 그리고 나를 레드문의 본거지로 안내하라.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어떤 의미인지를 사람들에게 증명하겠다.”
로만 드미트리.
그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모든 미련을 던져 버린 백중혁의 삶과는 달리,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간 삶은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그리고 전생이 그랬듯.
로만 드미트리에게 물러남은 없었다.
“앞장서라.”
재촉하는 음성.
강민호는 넋을 잃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을 집에 들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