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새로운 시작 (1)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뜨는 것.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로서 새로운 세상을 확인했던 것처럼, 눈을 뜨자마자 시각적으로 수많은 정보가 빨려 들어왔다.
칙칙한 하늘과 무언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고층 건물들이 반쯤 무너진 채로 처참한 광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폐허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지라도, 그 정도의 사실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새롭게 살아갈 세상.’
호흡을 골랐다.
전생과는 달랐다.
백중혁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삶을 시작했을 때는, 육체에 각인된 기억과 상황을 설명해 줄 한스라는 존재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하는 삶. 일단 무언가를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로만 드미트리는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육체 상태를 확인했다.
‘차원의 경계에서 나는 시간의 개념을 잊었다.
미지(未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 나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스르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숨을 수차례 반복해서 고르며 몸 곳곳에 마나를 퍼트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초심자들은 감히 시도조차 못 할 예민한 영역이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몸 전체를 확인했다.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백중혁의 영혼은 새로운 세상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차원을 넘어서기 이전과 똑같은 힘이 단전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대로였다.
다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차원의 경계를 넘어서며 사용하던 검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는 사실.
위험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찰나의 시간에, 로만 드미트리는 외부에 대항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생명체가 다가오고 있다.’
저벅저벅.
이족 보행 생명체의 인기척.
적의는 없었다.
자신을 공격할 의도였다면 발걸음을 숨겼겠지만, 대놓고 걸어오는 기척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분하게 상대의 행동을 기다렸다.
기척을 알아차리고도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때까지는 1분 이상이 걸렸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춘 것이 아니라, 1분 이상의 거리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의 존재를 파악했다.
이윽고 나타난 존재.
중년 사내였다.
거칠게 자란 수염과 대검을 쥐고 있는 사내가,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하고는 뭐라고 떠들어 댔다.
“#*$*$&*#&$#$.”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전생과의 차이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에 각인된 기억은 언어적인 문제를 곧바로 해결해 주었지만, 이 세상에서는 언어부터가 발목을 붙잡았다.
사내는 한참을 떠들어 댔다. 답답한 듯 가슴도 두드리던 그는,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한숨을 내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공격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상대가 어떻게 공격하든,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보다 먼저 머리를 날려 버릴 것이다.
그때였다.
특이하게 생긴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쫙 찢어 버렸다.
화악!
세차게 일어나는 불빛.
이어서 사내가 입을 열자,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말들이 문장의 형태를 갖추었다.
“대체 일반인이 어째서 비보호 지역에 있는 겁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 * *
사내.
강민호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정식으로 허가증을 받고 사냥을 나섰는데,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에 일반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간 형태의 몬스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마나 측정기를 사용했는데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측정 불가]
마나 측정기의 제한은 C등급까지.
그렇다면 일반인이 분명했다.
경계하는 마음을 내려놓았고, 도와줄 마음으로 다가가자 상대의 외형이 자세하게 보였다.
‘외국인?’
검은 머리.
그러나 이국적인 외모.
한국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게 변한 이후, 이곳 대한민국은 외국인들이 그리 선호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이렇게 일반인들은 안전 문제 때문에라도 대한민국을 찾아오지 않았다.
나라별로 매겨진 안전 등급. 그중 하위 등급을 책정받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뿐인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자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만 아니었다면, 강민호는 로만 드미트리를 외면하고 길을 떠나 버렸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결국은 말을 걸었다. 조잡한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에, 그는 눈물을 머금고 마법 스크롤을 사용했다.
‘이게 얼마짜린데.’
혹시라도 외국인 헌터를 만났을 때를 위한 대비책.
통역(通譯) 마법이었다.
스크롤을 발동하자, 환한 불빛이 일어나며 언어의 연결 고리가 생겨났다.
“대체 일반인이 어째서 비보호 지역에 있는 겁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강민호의 말.
로만 드미트리는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일반인, 비보호 지역, 위험.
여러 키워드는 이곳이 인간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며,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사용하는 강민호의 육체는 전생과 비슷한 맥락임을 알아차렸다.
물론 문화의 발전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마나에 근간을 두고 힘을 발현하는 방식은, 이 세상 또한 자신들만의 체계가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
강민호로서는 답답했는지 재차 말했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서 길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가는 몬스터의 공격을 받을 겁니다.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몬스터라면, 지금 다가오는 저 생명체를 말하는 건가.”
“예? 생명체라고요?!”
강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생명체라니.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강민호는, 황급히 검을 들어 주변을 경계했다.
이상했다.
시야에 닿는 그 어디에도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고, 혹시 몰라서 마나를 끌어 올렸지만 역시 생명체의 움직임은 파악되지 않았다.
순간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생난리란 말인가.
겨우 일반인에 불과한, 어쩌면 정신병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경계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강민호는 목덜미에서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살기?’
확실했다.
살기를 느낌과 동시에, 대검을 들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생명체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격렬한 충동이었다.
이를 악물며 충격을 흘려보낸 강민호는,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했다.
크르르르륵.
‘병정개미?’
개미의 육체.
단단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
확실했다.
일반 헌터로 분류되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D등급의 몬스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등급의 체계는 간단하다.
해당 등급의 몬스터를 쓰러트렸을 때 그 등급을 확보할 수 있는데, 일반 헌터는 E등급의 몬스터를 처리한 존재를 뜻했다.
한마디로 D등급은 일반 헌터인 강민호로서는 버거운 상대.
이번 사냥터를 선택하며 절대 피해야 할 존재였고, 병정개미를 만난다면 곧바로 도망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자신의 뒤.
일반인이 있었다.
물러났다간 일반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민호로서는 차마 도망을 택할 수가 없었다.
‘진짜 거지 같은 상황이네.’
크르르르륵.
눈앞.
땅을 뚫고 나온 병정개미가 사나운 이빨을 보였다.
일반인이 어떻게 병정개미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도망칠지, 아니면 병정개미와 정면으로 싸울지.
‘어차피 D등급 심사를 볼 생각이었어. 차라리 실전에서 연습한다고 생각하자.’
꽉.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끝마친 그 순간.
캬악.
타타타탓.
병정개미가 달려들었다.
거대한 육체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였고,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은 인간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다는 기세를 보였다.
강민호는 그런 병정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순간적으로 마나를 발현했다.
‘대시(dash).’
파팟.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서로의 육체가 뒤얽히는 상황에, 아래에서 위로 대검을 휘둘렀다.
카앙-
‘이런.’
단단했다.
반발력에 손이 튕겨 나갔고,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는 공격에 황급히 몸을 틀었다. 팔뚝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얕게 베여 나가며 핏물이 튀었지만, 이 정도 상처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기세에서 밀리면 끝이다.’
뒤로 밀린다면.
일반인이 전투에 휘말릴 수 있기에, 강민호는 물러나지 않고 병정개미와 공방을 주고받았다.
카앙!
카카카카캉!
몸이 크게 흔들렸다.
병정개미의 괴력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으나 점차 뒤로 밀려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민호의 눈빛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남들과는 다르게 뒤늦게 헌터의 세계에 발을 들인 그다.
악착같이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며 실력을 쌓아 왔던 그에게, 이 정도의 상황은 숱하게 경험했을 정도로 익숙했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헌터로서 실력을 쌓아, 하나뿐인 딸과 같이 특별한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쉘터(shelter)에 입성하는 것.
죽을 수 없었다.
몸에 상처가 생겨났지만, 강민호는 끝까지 틈을 노렸다.
캬악.
콰드드드드득.
병정개미가 땅을 뒤엎으며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
강민호의 눈빛이 변했다.
‘강격(強擊).’
세차게 일어나는 붉은 기운.
병정개미의 앞발이 가슴을 가르는 순간, 강민호의 대검이 그의 머리를 찍어 버렸다.
확.
콰득.
머리가 부서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죽지 않은 모양인지, 병정개미는 얼굴을 들이밀며 강민호의 육체를 찢어발기려 했다.
악착같이 정신줄을 붙잡았다. 검을 수차례 휘둘렀다.
검이 작렬할 때마다 병정개미의 머리가 짓이겨지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미친 듯이 휘둘렀다.
빠악!
빠악, 빠악!
생사의 경계선.
목숨을 걸었다.
병정개미의 머리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 병정개미의 거대한 육체가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쿠르르르르릉.
“하악, 하악.”
이겼다.
승리했다는 사실을 만끽하지도 못할 만큼, 강민호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위험한 싸움이었다.
그동안 D등급 심사를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과감하게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지 못했다면, 바닥에 쓰러진 것은 병정개미가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살아남았다.
강민호는 황급히 품속을 뒤지더니, 이럴 때를 대비한 치료 물약을 상처 부위에 들이부었다.
치이이익.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뒤에서.
일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니.
그런데 그때, 강민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이 펼쳐졌다.
캬악!
크르르르르륵.
땅이 들썩이며 나타난 존재.
그들은 바로 무리를 형성한 병정개미들이었다.
* * *
병정개미 무리.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병정개미가 출몰하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서식지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간혹 무리에서 떨어진 1~2마리가 위험하다고 알려진 사냥터다.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생각으로 이곳을 택했던 것인데, 아예 무리를 지어 나타난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민아야.’
하나뿐인 딸.
그녀가 떠올랐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딸이 혼자만 남는다면,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었다.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도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강민호는 병정개미를 모두 상대할 작정으로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불가능한 상황임은 알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다가오는 병정개미 무리를 주시하는 그때, 다시 한번 일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네게 한 가지를 제안하지.”
타타탓.
콰드드드득.
병정개미들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여러 마리의 병정개미가, 강민호를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강렬한 살의를 보였다.
일반인.
로만 드미트리는 이어서 말했다.
“저 괴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저들을 모두 처리하고, 너를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한 달. 한 달 동안 내가 이곳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라.”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 주제에 어떻게 병정개미 무리를 처리한단 말인가.
그리고 적응은 또 무슨 말이고.
“선택하라.”
재차 물어 오는 말에, 강민호로서는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벼랑 끝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코앞에 다가온 병정개미들.
강민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힘겹게 서 있는 강민호를 지나,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병정개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래는 체결되었다.”
새로운 삶.
지금부터는 새롭게 살아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