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467화 (467/615)

467화 프롤로그 (2)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

한참 훈련을 진행 중이던 케빈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황제 폐하가 사라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왜일까.

순간.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마지막 만남은 평소와 달랐다.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종 사실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흐트러져 있던 퍼즐들이 맞추어졌다.

서로의 진심을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마치 미래를 대비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천마검법의 전부를 알려 주었던 모습.

심장이 내려앉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로만 드미트리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해.’

로만 드미트리.

케빈의 전부였다.

단순히 주군과 신하의 관계를 떠나서, 케빈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시절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하늘이었다.

현재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모든 것은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던 소년이 드미트리의 악귀가 되었고, 빈민가를 전전하던 소년이 부와 명예를 양손에 쥐고 있는 드미트리 제국의 실세가 되었다.

삶의 전부.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를 위해 살아갈 때 케빈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졌단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졌다.

애써 부정했던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이 되었고, 이별을 말하던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이유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케빈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 한 달.

지옥 속에 있었다.

머릿속을 장악하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로만 드미트리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남부 밀림 지대, 끝없는 산맥 너머, 미개척지까지. 조금의 희망조차 없는 상황에 점점 야위어 갔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찾는 일을 포기하는 선택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해야만 했다.

힘들다고 그 누가 삶을 포기하겠는가.

악착같이 찾아다니던 그에게, 이사벨의 부름은 밤낮을 잊고 달려올 만큼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진실을 마주했다.

충격적이었다.

희생이라니.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보다, 로만 드미트리가 희생했다는 사실을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케빈이 다그치듯 말했다.

“정확하게 설명하십시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성의 발언이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현실 부정이었다.

이사벨은 추측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만, 케빈의 흔들리는 눈빛은 지금이라도 내뱉은 말을 정정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진실은 달라질 수 없었다.

이사벨이 말했다.

“……여러분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면, 이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 진실을 공개했을 거예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인류의 위험을 제거하는 대가로 희생을 택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다만, 그것이 그분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살아 계신다는 의미입니까?”

케빈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열망으로 들끓는 그의 눈빛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살아 있어요. 이 세상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떠났을 뿐, 무수히 많은 차원 어딘가에 그분은 존재하고 있어요. 이것이 제가 아는 전부예요. 사실 처음부터 진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들의 소식을 들으며, 죄송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이사벨의 말이 끝을 맺었을 때.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절대.

절대로.

이런 진실을 듣고자 이 자리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 * *

침묵이 맴돌았다.

그 누구도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희생.

예상하지 못한 진실이었다.

대륙 전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로만 드미트리가, 사실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택했다니.

참담했다.

어떤 이들은 슬픔의 눈물을 보였고, 어떤 이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다들 한 번쯤은 로만 드미트리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로만 드미트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렇게 한참을.

한참을 침묵으로 보냈다.

그때였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뚫고, 크리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진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요. 그런데도 인정할 수 없어 계속 부정해 왔습니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고, 차원 너머 어딘가에 생존하고 계십니다.”

눈빛이 변했다.

열망.

독기.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압도했다.

“드미트리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 한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의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군을 마음에 품은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주군의 명령을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이사벨 님. 진실을 밝히지 말라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의지겠지요. 우리는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야 합니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지나간 과거를 잊고 현실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까득.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가, 지금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뜻은 존중하나, 그동안 은혜만 받아 왔던 저로서는 주군이 이렇게 희생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사벨 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황제 폐하는 정말 살아 계신 겁니까?”

“확실해요. 신께서는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다른 차원’으로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거면 됐습니다.”

크리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살아 있다는 확신.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크리스가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힘을 보태 주십시오. 차원 너머에 존재하고 있을 황제 폐하를 되찾고, 그분이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같이 해결해 주십시오. 최소한 이렇게 이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디…….”

크리스 또한.

케빈과 똑같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있어야만, 그의 삶은 완성될 수 있었다.

“저와 같이 항명(抗命)에 동참해 주십시오.”

* * *

크리스의 발언.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원 이동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며, 그 과정에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신적인 존재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고 할지라도 해결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크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빈이 기다렸다는 듯이 힘을 보탰다.

“항명으로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한들, 저 또한 주군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험이 필요하다면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주군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신호탄이었다.

크리스에 이어, 발렌티노 후작과 파비우스 후작도 말했다.

“아시다시피 발렌티노는 대륙 제일의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인력이 필요하다면 인력을, 실험 자금이 필요하다면 자금을. 현실적인 문제들을 발렌티노가 모두 해결하겠습니다.”

“에이, 발렌티노만으로 전부 해결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파비우스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사실 이미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찾기 위해 가문의 힘을 총동원한 상태입니다. 까짓것, 배를 좀 곯으면 어떻습니까. 주군으로부터 모든 것을 하사받았는데, 파비우스 가문은 전부를 내줄 준비가 되었습니다.”

발렌티노와 파비우스.

그들의 정체성은 장사치다.

냉정하게 이번 일을 판단한다면, 사실 도와주는 시늉만 하는 것이 옳은 일임을 모르지 않았다.

간단한 문제였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실험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지만, 발렌티노와 파비우스는 이번 일만큼은 실익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게 옳은 일이었다. 인류를 위해서 희생한 로만 드미트리를 찾는 일에, 여느 때처럼 머리를 굴리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맹목적이었다.

차례로 힘을 보탰다.

그리고 그중에는 에드윈 헥토르도 있었다.

“마법적인 실험이라면 헥토르의 영역입니다. 사실 마계와의 전쟁 이후로, 헥토르는 이미 차원의 경계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연구했던 실험 자료를 모두 공개하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찾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헥토르는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헥토르의 선택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들 진심으로 놀랐다.

마법 성과.

그것은 국가적으로 절대 노출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헥토르는 전부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도 이 결정이 국가적인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감사함을 떠나, 이 세상에 로만 드미트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뜻이 모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륙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크리스의 뜻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모두의 뜻이 모였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이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크리스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메로 드미트리.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황제의 아버지로서, 대리인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사람들이 뜻을 맡겼다.

‘아들아.’

지금의 상황.

로메로 드미트리는 감정이 들끓었다.

자신의 아들을 찾는 일에 그는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그런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들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의 진심을 알기에, 이렇듯 정말 힘든 상황에 드미트리를 외면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은 감정에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굳건해야만, 로만 드미트리를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분들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에 공표하겠다. 현 시간부로 드미트리 제국을 포함한 전 대륙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를 찾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날.

세상은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을 찾기 위한 수많은 변화를.

* * *

회의가 끝났다.

밖으로 나온 케빈은, 사람들이 없는 장소로 이동하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끄윽, 끄윽.”

억눌렀던 감정이 치밀었다.

눈물이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희생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나,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주군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면. 저 또한 주군의 뒤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면서도, 비상식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봐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살았다면 된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를 되찾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살았다는 확신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에 케빈은 울음을 보였다.

그때였다.

“케빈. 괜찮니?”

익숙한 목소리.

한스였다.

케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한스는 손수건으로 케빈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나 또한 너처럼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단다. 혹시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평화로운 나날이 반복되는데도 내 마음은 지옥에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사벨 님이 말했잖니. 황제 폐하는 분명히 살아 계신다고. 그러니까 우는 건 딱 오늘 하루여야만 한다.”

평소와는 달랐다.

한스가 강인한 표정으로 케빈을 바라보았다.

“일개 하인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러니 케빈. 반드시 황제 폐하를 찾아다오. 네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 준다면 나는 믿고 기다릴 수 있단다. 내가 기억하는 케빈이라는 소년은, 빈민가에서 드미트리 제국 최고의 검사로 성장할 만큼 불가능이 없는 존재란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반드시 해내겠다고 말해다오.”

말할수록 목소리가 울음기에 잠겼다.

처음이었다.

항상 자신을 돌봐 주었던 한스가,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부탁하는 경우는.

울음을 참았다.

울지 않았다.

한스를 바라보며, 강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드시 해낼게요. 만약 황제 폐하를 되찾는 일에 마계의 악마들, 설령 신이 앞을 막는다고 할지라도…….”

이를 악물었다.

독기로 일렁이는 눈빛은, 드미트리의 악귀라 불리는 그의 광기를 드러냈다.

“그들을 모조리 베어 내서라도 반드시 찾아올게요.”

스스로를 믿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반드시 한스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 * *

시간이 흘렀다.

아니, 시간의 개념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얽힌 시간의 흐름 속.

번뜩.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