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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화 - 마지막화 (1부 완결) (465/615)

465화 에필로그, 마지막 외출

의외의 방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찾아왔다는 말에, 로메로 드미트리는 환하게 웃으며 아들을 반겼다.

“그래, 별일은 없고?”

“늘 똑같습니다.”

“너는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다. 네 건강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 있으니, 항상 스스로를 먼저 챙기거라. 그리고 어미가 보낸 건강식도 잘 챙겨 먹고.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내가 다 회춘하는 기분이 들 정도야. 껄껄껄.”

경쾌하게 웃었다.

드미트리 부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에 어떻게 지냈는지, 특별한 문제는 없는지, 로메로 드미트리는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과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 싫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어 갈 즈음. 아들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아직 혼인 생각은 없는 거니?”

혼인.

드미트리 가문 최대의 문제였다.

제국을 건국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상황이었지만, 장남인 로만 드미트리가 혼인을 한사코 거절하고 있어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차남과 막내는 반려를 맞이한 상태. 이제 로만 드미트리만 보내면 되기에, 로메로 드미트리로서는 장남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심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파혼 문제로 결혼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라면. 그때의 일은 정말 미안했다. 결혼이 엎어졌다고 해서 너를 그리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되었는데, 나조차도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등을 떠밀리듯 결혼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아비는 진심으로 기뻐할 테니, 내게 언제든 소개해다오.”

파혼은 역린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문제.

혹시라도 본인이 발목을 붙잡은 것일까 봐, 로메로 드미트리는 단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아비의 마음.

이해했다.

그리고 절대 그가 걱정하는 부분 때문에 혼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

진실은 말할 수 없었다.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보며, 그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제가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일 뿐입니다. 아버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서, 저는 제 삶을 되돌아볼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제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손가락질을 할 때도, 아버지는 항상 제 곁을 지켜 주시면서 무엇을 하든 응원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메로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제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저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

말을 삼켰다.

평소와는 다른 아들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아들이 아닌데, 자신을 아버지로 두어서 감사하다는 말에 그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음의 짐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지난 3년 동안 혼인을 멀리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로메로 드미트리는 자신의 탓일까 봐 가슴이 썩어들어 갔다.

“고맙다, 아들아.”

행복했다.

그렇게 아들은 자리를 떠났다.

아들과의 대화를 되새기던 로메로 드미트리는,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는 말로 끝내는 게 아니라 나도 더 진심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아들이 용기를 낸 것처럼, 나 또한 네가 아들이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에도, 너는 언제나 내가 정말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고.’

괜찮았다.

기회는 이번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창밖을 바라보는 로메로 드미트리는, 자신을 비추는 햇볕이 무척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헥토르 발할라 사건 이후.

크리스는 여전히 바빴다.

행정적인 능력에도 탁월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그는 어느 영역에서든 필요한 인재가 되었다.

그날도 똑같았다.

오전 훈련을 끝내고 서류를 처리하던 그가, 뜻밖의 방문자를 만났다.

“황제 폐하!”

“많이 바빠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직접 찾아가는 경우는 있었어도,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의외였다. 일단 상석을 내준 크리스가 의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말을 꺼냈다.

“크리스. 발할라와 헥토르의 사건은 네가 빠르게 조치한 덕분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나라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의 분쟁을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나.”

“……그게 무슨.”

“만일의 경우다. 나는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크리스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상이 평화로운 이유는 황제 폐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황제 폐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번처럼 일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드미트리는 황제 폐하를 모시며 단단한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후광이 없었을지라도, 헥토르와 발할라는 드미트리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다.”

사람들의 착각이다.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전부라는 착각.

진실은 다르다.

이 나라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성장하며,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갖추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 나라는 강하다. 나를 배제하더라도 대륙 전체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의 국력을 갖추었다. 크리스. 너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너는 올바르지 않은 방향성에 갈피를 잃었지만, 재능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 유일하게 너는 혼자만의 힘으로 강해져야만 했다. 너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해도 성장할 수 있을 만큼, 빛나는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크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이토록 인정받는 발언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지녀도 좋다. 랭킹전 무대가 증명하듯, 너는 명백한 나의 다음이다.”

“……!”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떠나간 후.

크리스는 멍한 얼굴로 있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에, 자신이 이렇게 실없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가 진심으로 바란 것이었어.’

이제야 알았다.

자신은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만나고.

크리스의 세상은 격변했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그 날부터, 로만 드미트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를 넘겠다는 꿈.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로만 드미트리가 발전한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했다.

검을 겨누고 무참히 깨지면서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그 발언을 한 번이라도 듣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떠나간 자리.

아무래도 오늘은 더는 업무를 이어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 * *

털썩.

“후욱, 후욱.”

바닥에 널브러진 케빈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만난 이후.

그는 미친 듯이 훈련에 몰두했다.

세상이 평화롭다고 할지라도, 그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필요한 존재로 남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때였다.

“여전하구나.”

“……주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황급히 일어나며 잠시 비틀거렸지만, 금방 자세를 잡고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케빈. 충분히 강한 네가 왜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거지?”

익숙한 물음이었다.

수개월 전.

케빈은 똑같이 물었었다.

마왕을 물리치고도 노력하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그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잠시 망설였다.

생각을 정리하던 케빈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군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생각이 많았습니다. 저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주군도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는데, 나는 대체 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가. 이유는 목적의 부재였습니다. 강해지고자 하는 목적. 단순히 적이 존재해야만 강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그 어떠한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주군과 제 가족들, 그리고 드미트리의 모든 사람. 누구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강렬한 열망이었다.

케빈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드미트리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적들은 가장 먼저 드미트리의 악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 중.

케빈은 가장 강하지는 않았다.

당장 랭킹전에서 크리스에게 매번 패배했고, 에드윈 헥토르와 같은 존재들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케빈이 언제까지고 승리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을 떠나. 누구를 가장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케빈. 너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존재다. 네가 있기에, 내가 없는 자리를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소년이었던 존재가.

지금은 불쑥 커 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세월의 흐름을 체감했다.

“인간의 삶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만약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는 네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네게 말하려는 것은 앞으로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의 대가다.”

확신했다.

크리스와 케빈.

둘의 존재로 드미트리는 영원할 것이다.

“천마검법. 그것의 완성된 형태를 말해 주겠다.”

* * *

화창한 오후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내를 거닐었다.

과거와 현재.

드미트리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예전에도 대장장이들의 도시로서 탄탄한 건축물들이 도시를 장식했다면, 지금은 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화려한 도시로 변했다.

로브를 눌러쓴 로만 드미트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왁자지껄 떠들면서, 일상에 젖어 든 얼굴로 눈앞의 순간을 즐겼다.

‘처음 이 거리를 걸었을 때.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지.’

로만 드미트리.

낯선 이름이었다.

새롭게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고자 거리로 나갔고, 로만 드미트리는 빈민가의 한 노인을 만났다.

그곳으로 갔다.

발이 푹푹 빠지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판잣집들.

과거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진행했고, 적어도 드미트리 제국의 수도인 이곳에 빈민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빈민가가 존재했었던 흔적을 살피며, 로만 드미트리는 이곳에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기억들을 되새겼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자신과 똑같이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정말 많이 변했네.”

“이게 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덕분이지. 그분이 이 세상을 통치한 이후로, 예전보다 나빠진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사람들이 모두 일자리를 얻었고, 그들이 벌어들인 돈을 소비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었지. 난 말이야.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신이 내린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 만약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마계의 악마들이 공격해 왔다면, 우리는 절대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그렇지. 사람들은 마계 정벌을 추억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누구도 그 위험을 감당하지 않았잖아.”

로만 드미트리.

그가 인정받는 이유였다.

위기를 위기로 느껴지게 하지 않았던 것.

지도자기에 위험을 감수했던 그의 선택에,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들을 지나쳤다.

길거리에 이어 빈민가.

빈민가에 이어 대장간.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겼다.

마지막으로 한스와 찾았던 식당으로 향하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황제 폐하! 여기에 계셨군요.”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내.

그는 바로 한스였다.

* * *

이번 외출.

보고되지 않았다.

그리고 로브를 눌러쓴 상태였는데도, 한스는 단번에 로브인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당연히 알 수밖에요! 제가 황제 폐하를 모신 것도 벌써 수십 년인데, 이제는 형체와 걸음걸이만 보더라도 황제 폐하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대체 왜 말도 없이 외출하신 겁니까? 황제 폐하야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래도 저에게 언질이라도 해 주셨다면 불편한 일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한스는 말이 많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도 없이 나갔다는 사실에 놀랐던 모양인지, 그는 조잘조잘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익숙한 그림이었다.

한스가 앞서 걸어가고.

그 뒤를 따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

그때도 그랬다.

식당을 향해 이동했을 때, 한스는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대며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했다.

블러드 팽과의 분쟁.

한스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곁을 지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를 두고 가자, 조나단 기사단장에게 달려가서 도련님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

“한스.”

“말씀하십시오.”

“내가 처음 이 세상을 살아갔을 때. 내 곁에는 한스라는 존재가 있었다. 너는 항상 자신이 도맡은 임무라며 네가 하는 일들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던 시기에 너의 존재로 나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너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갔을 때라니.

한스는 어렸을 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보살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기에는 묘한 발언에, 한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로만 드미트리를 돌아보려 했다.

그때였다.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처음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을 행운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상황에, 한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을 느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한스를 겨우 하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하인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가족이었다.

자신의 삶을 돌봐 주고, 자신의 가족들을 챙겨 주고, 단순히 하인으로서의 업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한스는 귀족의 작위를 얻었다.

감정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과거에 감정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주는 만큼 돌려주는 감정에 그 또한 감사함을 느꼈다.

고개를 돌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

없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로만 드미트리가, 어디를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한스가 주변을 돌아다녔다.

애타게 부르며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부르고 또 불러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날뿐만 아니라.

그날 이후로도 계속.

* * *

백색의 공간.

아무도 없는 그곳에 한 인간이 발을 들였다.

[로만 드미트리. 이제 때가 되었다.]

지난 3년.

로만 드미트리는 유예 기간을 가졌다.

신은 처음 약속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을 위해서 로만 드미트리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알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만약 신을 베어 버림으로써 현실을 바꿀 수 있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기꺼이 신을 적으로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차원의 규율 때문이다.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균열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언젠가 마계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기에, 신의 뜻을 마주하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궁금한 것이 있다. 지난 3년. 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지?]

언젠가.

떠나야 함을 알았다.

그런데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수련에 몰두하며, 혹시라도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대비했다.

동네방네 자신의 희생을 소문내면서 짧은 시간이라도 충분히 보상받아야 하건만, 그는 덤덤히 자리를 지켰다.

왜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신으로서도, 한낱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는 내 위치에서 인간답게 살았을 뿐이다.”

로만 드미트리.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

지도자로서 위험을 대비했고, 끝이 있는 삶이라고 해서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간단한 문제였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결말이 없었다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과 똑같은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은, 끝까지 투쟁하는 삶을 살았던 자신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현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네 삶을 한순간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나?]

답은 정해졌다.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희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온 삶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다.

“없다. 단 한 순간도.”

[그런가.]

로만 드미트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가 차원의 균열을 걱정해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신이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보호해 주었다.

그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끝이 정해져 있는 삶이지만 적어도 한 줌의 후회조차 남지 않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일상을 살았고.

신은 그를 배려했다.

그뿐이었다.

인류의 문제를 모두 떠안았던 존재에게, 신이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내가 만난 인간 중에 가장 인간답지 않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존재였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신성력이 활활 불타오르며,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하는 공간을 무너트렸다.

[앞으로 네가 맞이할 새로운 삶을 진심으로 축복하겠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작렬하는 불빛이 그대로 세상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시작일 뿐.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는 어디에서든 분명히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 1부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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