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6)
허무맹랑한 제안이었다.
백지를 내밀며 말한 내용은, 상대가 발렌티노 후작이 아니었다면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진심이겠지.’
수개월 전.
발렌티노 후작과 관련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가 탐을 내는 예술품이 있었는데, 상대는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이유로 절대 판매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건을 올리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고집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보니, 이번만큼은 발렌티노 후작으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발렌티노 후작은 거래를 성사시켰다.
상대에게는 자신만의 섬을 가지길 바라는 허무맹랑한 꿈이 있었는데, 정말 오델리아의 무인도를 하나 사서 그에게 제안한 것이다.
그것도 평생 지낼 별장까지 추가해서. 상대로서는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그날 그 상대가 얼마나 환히 웃었는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것이 바로 발렌티노였다.
탐욕의 수집가라고 불리는 그는, 지금 진지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크리스가 말했다.
“발렌티노 후작님의 의지는 잘 알겠습니다. 저도 이 거래가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알지만, 그 이상을 제안하셔도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께서 하사한 검이라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검 자체의 성능을 보았을 때도, 앞으로 살아가며 이보다 좋은 검을 찾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안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대안 정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저를 조사하셨다면, 제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매년 치러지는 랭킹전.
크리스는 매번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도전자들을 짓밟으며,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불가능한 도전을 반복해 왔다.
그때마다 머릿속을 장악하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실력적으로도 이렇게 부족한데, 검의 성능마저 밀린다면 자신에게 승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만 드미트리가 하사한 검이기에 그 어떤 것도 판매할 수 없다는 케빈과는 다르게, 크리스는 정말 실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로.
발렌티노 후작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크리스는 처음부터 이 거래를 고려할 생각조차 없었다.
“서로의 실력이 비등할수록 한 끗 차이로 승부가 결정이 납니다. 만약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저는 검을 판매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겠죠. 발렌티노 후작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검을 판매하게 된다면, 저는 반드시 후작님을 일 순위로 두겠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기는 하는 겁니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제가 황제 폐하를 쓰러트리고 대륙 제일검으로 인정받는다면, 그때는 검의 성능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발렌티노 후작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름대로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를 세상 모두가 알았다.
“참 나, 크리스 님. 사람 좋게 봤는데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합니까.”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크리스가 말하는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 *
한바탕 소란이 마무리되었다.
발렌티노 후작은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질척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 님. 사람의 인생에는 언제나 고비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잠시 숨을 고를 때, 바닥에 넘어져서 더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고개를 돌려 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십시오. 저는 항상 크리스 님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 님이 제게 손을 내민다면 기꺼이 그 손을 맞잡아, 크리스 님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저는 언제나 크리스 님의 편이라는 것을. 물론…… 이 맹목적인 사랑의 대가는 퍼스트 노-네임 단 하나면 충분합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와 헤어지는 길에, 어쩌면 그런 광적인 면모가 있기에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것이 진실이었다.
만약 본인의 수집 욕구를 불태우는 로만 드미트리의 검을 접하지 않았다면, 발렌티노 후작은 카이로라는 우물 안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걸음을 돌렸다.
집무실로 향했다.
오전 훈련을 끝냈으니, 지금부터는 자신의 이름 앞으로 쌓인 업무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최근 발할라와 헥토르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과거의 악연이 계속되는 것이겠지. 헥토르가 마도 왕국으로서 세력을 확장할수록, 필연적으로 발할라 제국과 부딪힐 수밖에 없어.’
예민한 문제였다.
크리스와 케빈.
둘은 독립적인 부대의 소속이었다.
친위대인 페르난도가 황궁을 지키는 역할이라면, 크리스와 케빈은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크리스는 대외적인 일을, 케빈은 비밀스러운 일을. 발할라와 헥토르의 문제는 크리스의 업무기에,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무실에 도착해서 서류 몇 개를 막 넘겼을 때, 병사 하나가 긴급 소식을 전달해 왔다.
“크리스 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헥토르와 발할라가 아무래도 제대로 붙으려는 것 같습니다!”
툭.
펜을 내려놓았다.
크리스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권(利權)을 다투는 싸움은 평화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 * *
두 나라의 분쟁은 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며칠 전.
발할라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카즈리 백작이, 헥토르의 귀족인 스튜어트 남작과 거래를 진행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 스튜어트 남작이 다른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사람과 거래를 진행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문제였다.
상계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으나, 카즈리 백작은 상대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감히 일개 남작 따위가 나를 물 먹여?”
발할라의 귀족들.
그들은 제국민이다.
비록 드미트리에게 패배하며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그들에겐 아직 제국으로서의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 헥토르는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는데, 카즈리 백작은 괜히 발할라가 몰락했기에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등감의 발로였다.
발할라 특유의 호전적인 성향이 살아나면서, 이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 외에는 해소할 수 없었다.
스튜어트 남작의 마차를 공격했다.
상행을 방해했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는 스튜어트 남작의 뺨을 날려 버렸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3~4년 전이라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겠지만, 현재 헥토르를 이끄는 에드윈 헥토르 국왕은 이번 사건을 보고받자마자 크게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일은 명백한 발할라의 잘못이다. 발할라가 직접 이 일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는 헥토르의 국왕으로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현재 상황이었다.
헥토르에서 국왕까지 나선 상황에, 카즈리 백작으로서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발할라 중앙 정부에 불려 갔다. 당연히 문책을 예상했던 그로서는, 발할라의 황제로부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버텨라.”
“……예?”
“이번 문제는 국가 간의 싸움으로 번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에드윈 헥토르가 직접 나서면서까지 이번 일을 키우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발할라와 직접적으로 분쟁을 일으킬, 어떻게든 헥토르의 위상을 끌어올릴 그럴듯한 명분이.”
최근.
발할라와 헥토르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특별한 분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헥토르가 마도 왕국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자, 더는 발할라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서로 간을 보는 시기였다.
만약 여기에서 한발 물러난다면, 그렇지 않아도 무늬만 제국인 발할라가 헥토르에게 완전히 밀려 버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카즈리 백작과 스튜어트 남작.
둘은 명분에 불과했다.
헥토르가 스튜어트 남작을 내세워 일을 키우자, 발할라 황제 또한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드미트리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그 옆자리를 차지하는 나라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카이로와 헥토르는 대륙 전쟁에서 우선순위를 확보하였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자리가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다. 발할라는 반드시 제국의 저력을 증명해, 드미트리의 옆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강렬한 음성이었다.
절대 드미트리를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권력을 배제할 생각 또한 없었다.
“명령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카즈리 백작이 웃었다.
발할라가 뒤를 봐준다니.
그로서는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발할라가 공식적으로 이번 일을 처리해 주지 않자, 며칠 지나지 않아 헥토르가 마법 통신을 요청했다.
* * *
통신 화면 너머.
에드윈 헥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국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발할라의 수뇌부들을 바라보았다.
[세상 그 어디에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고 상대를 공격하는 법도는 없습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카즈리 백작은 잘못을 저질렀고, 우리는 그에 대한 사과를 바랍니다. 명백하게 답이 나온 상황에서도 지금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헥토르로서는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놓고 잘못을 지적했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지적에, 상석에 앉은 발할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헥토르의 국왕이여. 이번 일은 개인의 문제다. 만약 스튜어트 남작이 개인적으로 카즈리 백작에게 사과를 요청했다면, 우리는 일이 잘 해결되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헥토르가 직접 나서면서 우리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설령 카즈리 백작이 잘못했을지라도, 국가 간의 문제로 만든 헥토르의 잘못이다.”
[그래서 사과를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발할라는 지금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과 왕국. 제가 예를 표한다고는 하나, 드미트리 제국을 제외하고는 그 의미는 퇴색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할라가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문제를 그냥 넘어가려는 것은 저희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발할라의 황제시여. 정녕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을 넘었다.
예상대로였다.
헥토르가 명분이 있다고 해도, 이건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더는 선을 넘지 마라.”
[알겠습니다.]
에드윈 헥토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툭.
일방적인 통신 종료.
까맣게 물든 화면에,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말을 잃었다.
* * *
“……이것이 옳은 대응일까요?”
수뇌부 중 한 명이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의 마지막 발언.
불안감을 남겼다.
헥토르의 별이라고 불리는 그는, 절대 당하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수뇌부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발할라 황제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발할라는 현재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륙 전쟁에서 패배했고,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며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지금의 발할라가 만들어졌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발할라의 낭만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있다.”
표정이 변했다.
한때는 일개 귀족이었던 그가, 지금은 황제의 위엄을 갖추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제국으로서의 품격을 지켜라. 전사로서 존재하라. 우리의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도 감당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진실을 알았다.
이번 문제는 카즈리 백작의 잘못이다.
하지만 헥토르와 발할라 모두, 시발점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자존심의 싸움.
헥토르가 싸움을 걸었고, 발할라는 물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였다.
벌컥!
“황제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기사.
그의 창백한 표정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조금 전. 헥토르가 발할라의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상황이 틀어지자마자 국경을 넘었다는 것.
에드윈 헥토르는 처음부터 발할라와의 관계를 호전시킬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