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에필로그, 새로운 나날들 (2)
10년 전.
다니엘 카이로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자기 주관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카이로를 좀먹는 외부 세력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 전형적인 망국(亡國)의 현실이었다.
그가 이 나라의 미래라면, 동생의 복수는커녕 카이로 자체가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론은 폐관 수련을 택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그는 너무나도 달랐다.
강직한 얼굴의 그가 하수인들을 뒤로 물리자, 하수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국왕의 명을 따랐다.
미세한 포인트였다.
10년 전에는 하수인들조차 다니엘 카이로를 우습게 여겼는데, 그들의 표정과 행동거지에서 국왕에 대한 존경심이 보였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다니엘 카이로의 태도.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들에게서 느껴지는 강인함에, 발론은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닥에 앉았다.
하수인들에게는 괜찮다고 손짓하며, 다니엘 카이로가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발론은 촉망받는 검사였다.
니콜라스 백작과 같이 카이로의 미래였고, 그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10년 전에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달라진 현실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발론은 정신없이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복수의 목표를 잃어버린 지금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을.
속이 편해졌다.
모든 것을 토해 낸 발론은,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다니엘 카이로를 바라보았다.
“카이로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드미트리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물리쳤다고요. 지금 물어보려는 것이 주제넘은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드미트리를 왕국으로 받아들인 그때의 선택이 어렵지는 않으셨습니까? 결과론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선택일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다니엘 카이로가 웃었다.
세상은 변화를 맞이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에 지금은 드미트리를 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하지만, 발론의 질문처럼 다니엘 카이로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사실 이에 대해 여러 번 되새겼었다.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카이로를 위한 최선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내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기에, 나의 문제점을 해결해 줄 최선의 대안을 선택해야만 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절대 버리지 않는 분이다. 나는 그분의 능력과 성품에서 카이로의 미래를 보았고, 그분에게 내 자리와 카이로의 미래를 걸었을 뿐이다.”
“……그 선택에 지금도 만족하십니까?”
“아니.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카이로가 자체적으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 발론. 네가 없는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했다. 나는 과거의 일에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고, 그렇기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카이로는 신하의 나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카이로의 문제들을 드미트리에게만 기댄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립묘지의 지대는 높았다.
저 멀리에서 해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니엘 카이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다.
“인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크로노스가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언젠가는 카이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나는 카이로가 스스로 버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외부의 위험을 이겨 내기를 바란다.”
발론을 바라보았다.
길을 잃었다던 그의 눈빛은, 감정의 흐름에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카이로의 미래고, 국왕으로서 내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날.
발론은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
성숙해진 다니엘 카이로는, 복수가 끝난 자신의 삶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복수를 위해 10년간 노력했던 그의 결실은, 해가 저물어 가는 풀밭 위에서 다니엘 카이로를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 * *
그 무렵.
아르카디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크 엘프들이 아르카디아로 이주하면서, 먼저 자리를 잡은 일반 엘프들과 분쟁이 일어났다.
일반 엘프들의 수장.
테르샤가 말했다.
“다른 건 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역에 넘어와서 살생(殺生)을 저지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크 엘프들이 아르카디아로 이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희는 반기는 입장이었지만, 계속해서 선을 넘는다면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각 종족의 대표들과 루나의 영주인 로드웰 드미트리가 지켜보는 상황에 테르샤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다크 엘프들은 순순히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크 엘프들의 대표인 다르칸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엘프들의 요구는 매우 부당합니다. 그들이야 풀떼기와 과일만 먹어도 살 수 있겠지만, 다크 엘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이 아르카디아에서, 사냥에 적합한 땅은 엘프들의 영역을 포함해 몇 없습니다. 물론 가축을 길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모든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면 다크 엘프들의 뼛속에 새겨진 전투 본능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주기적으로 반드시 사냥에 나서야만 합니다.”
“모순적인 발언입니다. 식량 문제를 거론하더니, 그냥 사냥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다크 엘프들의 본능입니다. 당신들에게 자연과의 교감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설전이 벌어졌다.
다크 엘프와 일반 엘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런데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그들과는 다르게, 각 대표는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둘의 관계.
처음부터 앙숙이었다.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으나 모든 것이 다르다 보니, 그들은 아르카디아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종족 회의가 소집되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루나의 영주로서 이곳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고, 모든 종족의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판결을 맡았다.
결국.
로드웰 드미트리의 몫이었다.
“플로라. 네 생각은 어떤가.”
그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그동안 아르카디아의 행정 업무를 맡았던 그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르카디아에서의 공존을 위해서는 모든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적당한 수준의 타협은 가능합니다. 다크 엘프들이 육식과 사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근방에서 사냥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어느 정도의 해결 방법을 제안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엘프들의 영역을 단순히 침범하고 싶다는 의도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냥감을 엘프들의 영역에서 포획하는 것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쌍방의 책임이 되겠지요.”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다크 엘프들이 원하는 자유로운 사냥, 엘프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살육, 두 종족이 바라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공존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표면적인 이유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발생한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다크 엘프들의 영역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면, 그때는 이런 분란도 없을 것입니다.”
임시방편임을 강조했다.
추위로 얼어붙었던 땅이 완전한 모습을 되찾는다면, 다크 엘프들은 엘프들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더라도 욕구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덧붙일 말이 없었다. 두 종족의 대표가 말을 아끼는 모습에, 로드웰 드미트리가 웃으며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플로라 로렌스의 의견에 따라 이번 문제를 정리토록 하겠다.”
탕탕!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디아.
적어도 이 땅에서, 로드웰 드미트리는 모두가 신뢰하는 존재였다.
* * *
그날 저녁.
로드웰 드미트리는 훈련장에 있었다.
수도 없이 반복하는 동작에,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로드웰. 정말 대회라도 나갈 생각이야?”
훈련장 한편.
플로라 로렌스가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소리를 듣고 찾아온 그녀의 모습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동작을 멈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루나의 영주이기 전에 한 명의 검사야. 랭킹전이 나라는 검사를 증명받을 수 있는 자리라면, 내 위치를 내려놓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겠지.”
“……대단하네.”
플로라 로렌스가 가볍게 웃었다.
3년 전.
아르카디아행을 택했던 둘은, 비슷한 나이와 서부 전선에서부터 같이 했던 경험으로 친구가 되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영주와 참모일 뿐이었다.
하지만 둘이 있을 때는 말을 편안하게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겼다.
검을 한편에 내려놓고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대회가 끝나고 나면 로렌스 가문에 정식으로 요청할 거야.”
“뭐를?”
“너와 내 결혼.”
흠칫.
순간 플로라 로렌스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무 말도 못 하자, 로드웰 드미트리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형님이 결혼 생각이 없어서 나도 내 의지를 억눌러 왔지만, 로렌이가 사고를 친 마당에 더는 기다릴 수 없어. 그러니까 알고 있으라고. 로렌의 결혼식이 끝나고 대회를 모두 끝마치면, 나는 아버님을 찾아가 진심을 말할 거야.”
로드웰 드미트리의 진심.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3년 전에 거절했던 그 시점부터, 로드웰 드미트리는 한결같은 태도로 자신의 마음을 증명했다.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닌 진심이라고.
그 마음이 싫었다면 거절했겠지만, 3년이 흐른 지금 플로라 로렌스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 * *
현재 드미트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로렌 드미트리.
드미트리의 삼남이 혼인 소식을 밝힌 것이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계속해서 혼인을 미루면서, 사람들은 다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둘째도 아닌 로렌 드미트리가 먼저 사고를 쳐 버렸다.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가문으로 데려오더니,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다면서 부모님에게 선포를 해 버렸다.
지금 와서는 웃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그때는 뜬금없는 선언에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드미트리가 어디인가.
바로 황제의 가문이다.
로렌 드미트리와의 혼인은 황제의 가문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로메로 드미트리는 가문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허락하자는 것이었다.
정략결혼으로 한번 좋지 않은 경험을 했었던 그로서는, 아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면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다.
단.
인성에 결함이 없다는 전제하에.
다행히도 로렌 드미트리가 데려온 여성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로렌 드미트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워낙 특별한 날이다 보니 황실기사단의 단장인 조나단 기사단장이 특별히 문지기를 맡았다.
“어서 오십시오.”
“드미트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
대단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마계 정벌 이후.
세상은 그야말로 드미트리의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양대산맥으로 있을 때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드미트리를 인정했다.
드미트리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였다.
단순하게 모든 짐을 다른 국가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계 정벌을 주도했던 것처럼 제국의 위엄을 보였다.
그런 이유로.
이번 행사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다.
드미트리 가문의 행사이기도 했고, 이와 같은 자리는 거물들과 친분을 맺기가 매우 수월했다.
기회의 장.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조나단 기사단장은 같이 들어오는 두 인물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환해졌다.
“파비우스 후작님!”
“오오, 오랜만입니다.”
드미트리의 실세.
파비우스였다.
그가 환한 얼굴로 손을 맞잡았고, 그의 바로 옆에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파비우스처럼 대단한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이번 행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학과장이면서, 로렌 드미트리와 혼인을 약속한 에이미의 사촌 오빠.
그렇다.
“반갑습니다, 조나단 기사단장님.”
헨리 앨버트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조나단 기사단장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