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6화 (456/615)

456화 마계 정벌 (11)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로만 드미트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라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이번 계획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마왕이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땅은 마계다.

케케묵은 대륙의 역사는 마계의 악마들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분류했고, 대단한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치장한 과거의 영웅들은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낸 것만으로도 영웅이라 불리며 칭송받았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의 틀을 부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마왕의 머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과거의 영웅들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툭.

데구루루.

바닥에 머리를 던졌다.

마왕의 머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순간에 그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눈으로 빨려드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승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넋을 잃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왕은 죽었다.”

울컥했다.

사람들은 감정이 들끓는 기분을 느꼈다.

“이로써 우리의 세상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지상계의 침공을 주도하던 마왕이 죽어 버린 이상, 마계의 악마들은 더는 우리의 세상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대륙의 역사를, 지나간 순간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우리가 행하려는 일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지를 말했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 안전한 길을 택하려고 했다면, 우리의 안전은 보장되었을지 몰라도 후대의 사람들은 분명히 똑같은 고통을 감당했을 것이다.”

시야에 보이는 사람들 전부 멀쩡한 행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엉망이었다.

모두가 피에 절어 있었으며,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승리였다.

그 사실을 서로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의 용기와 희생이 대단한 것임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자신은.

힘이 있기에 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가 이룰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만을 믿고 기꺼이 사지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마왕의 머리를 베었다.

이들에게 미래를 선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결말은 바라지 않았다.

“기억하라. 후대의 사람들은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며, 그들은 너희로 인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격양되었다.

끝났다.

대륙 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싸움.

마침내 그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돌아가자. 우리의 세계로.”

그 말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이 떠나갈 듯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지상계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도착했던 위치로 돌아가야만 했다.

바깥에 신호를 보내면 통로를 열어 줄 것이고, 병사들은 영웅으로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것이다.

“나는 돌아가는 대로 일주일 내내 맥주를 퍼마실 거야.”

“크으,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네.”

“나는 뭐 할 거냐고? 당연히 내 예쁜 와이프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지. 신혼인데도 날 이해해 준 와이프를 생각해서라도, 너희처럼 술에 찌들어 있을 수는 없어. 듣기로는 황제 폐하가 엄청난 전쟁 보상금을 내려 줄 것이라던데, 나는 그 돈을 가지고 와이프랑 행복하게 살 거야.”

“새끼, 멋있네.”

처음과는 달랐다.

마계에 도착한 순간부터 마왕성에 도달할 때까지, 병사들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옆에서 같이 걷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주변의 풍경이 홱홱 바뀌면서 거리가 빠르게 줄었다.

다들 희망에 차올랐다.

이제는 미래를 생각해도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

이사벨은 감회가 새로웠다.

신탁의 진실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 왔는데, 이렇게 희망으로 가득한 모습을 바라보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 왔던 평화를 쟁취했다는 사실에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레오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레오와 병사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이 마계의 침공을 늦추지 않았다면, 지금 희망을 말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죽어 버렸을 것이다.

‘우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어요.’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이사벨 또한 많은 부분을 희생했으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마음의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레오와 병사들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자신도 새크리파이스를 사용함으로써 수명이 많이 줄었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당신들의 가족은 제가 보살필게요. 인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를 모두에게 알릴 것이고, 가족들이 당신들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만들게요.’

새로운 목표였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자신을 믿어 준 사람들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성녀로서의 짐을 내려놓은 인간 이사벨은, 이번에도 타인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것은 희생과는 달랐다.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전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이나 걸려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제 지상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면, 그들이 마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 줄 것이다.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 긍정적인 감정이 차올랐다.

곧 있으면 사람들이 환대해 줄 상황을 생각하니, 병사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흥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소란을 억제하지 않았다.

그들이 감정적으로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할 만큼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크그그그그극.

세상이 요동쳤다.

차원이 뒤틀리면서 통로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이사벨의 머릿속에 한줄기의 벼락이 내리쳤다.

번뜩.

[나의 아이야. 네게 진실을 말해 주마.]

신의 목소리였다.

이사벨은 눈을 부릅뜬 채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홀로의 공간을 바라보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일어난 혼란이 가라앉자, 이사벨은 고개를 돌려 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대체…….”

로만 드미트리.

그의 숨겨진 진실은, 이사벨을 충격에 빠트렸다.

* * *

통로가 열리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 대화를 요청한 그녀는, 자리를 옮기고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였다.

“……진실을 들었어요. 지상계로 돌아가면, 언젠가는 이 세계에서 추방당하게 된다는 것을요.”

목소리가 떨렸다.

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분명히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을 때도,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이 생각하는 최우선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했단 말인가.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는다고 한들, 마계를 점령하고 완벽한 평화를 얻는다고 한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본인이 존재할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그동안 아득바득 노력했단 말인가.

설명이 필요했다.

적어도 이사벨이 아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택할 부류는 아니었다.

“내가 원한 일이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질 않아요. 왜 그런 선택을…….”

“이사벨.”

차분한 목소리였다.

본인의 일을 얘기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저마다의 목표가 있다. 네가 인류를 위해 희생했던 선택은 순수한 의미의 희생이었다면, 나는 내 선택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완전한 평화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 스스로도, 위험의 요소가 존재하는데도 외면하는 것은 나다운 일이 아니다. 그뿐이다. 단 며칠을 살아도 나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길 바라기에, 신이 떠들어 대는 말들로 인해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정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이제는 잘 알았다고 생각했건만, 스스로 파멸을 택한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대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예요?”

“그렇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기 저 사람들에게 당신은 신과 같은 존재예요. 모두가 당신을 우러러보는데, 당신이 사라지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어요. 차라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요. 일단 지상계로 돌아가지 않고 시간을 벌면서, 다 같이 머리를 맞댄다면 분명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신의 뜻을 거슬렀다.

아니, 어쩌면 신은 그녀가 이렇게 나오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의 말처럼 해결의 여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건 로만 드미트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완전한 평화는 나의 존재로 완성된다. 사람들은 내가 무사히 귀환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진정으로 눈앞의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사벨. 이 또한 나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로서, 너에게 단 하나의 명령을 내리겠다.”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통로가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이사벨에게 통보하듯 마지막 메시지를 말했다.

“네가 아는 진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나는 끝까지, 이 세상을 군림하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 * *

오스칼 호수.

오델리아의 멸망 이후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그곳에, 얼마 전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의 국적과 인종은 전부 달랐다.

대륙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오스칼 호수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빼곡하게 몰려든 인파 속에서 저마다 자리를 잡고 기도를 돌렸다.

“신이시여, 부디 우리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반드시 무사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인류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여보, 제발 살아만 돌아와요.”

그들도 알았다.

마계 정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인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사람들의 의지에, 그들로서는 가만히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짐을 챙겨 오스칼 호수로 떠났고,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은 밤낮이 수도 없이 바뀌는 상황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빌고, 또 빌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인류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이, 반드시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그들의 선두에는 로메로 드미트리도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인 리한나 드미트리, 그리고 각국 주요 인사들의 가족들도 며칠 밤낮을 새우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과 그들은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가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처지였고, 그들의 의지가 모여 매일 밤 오스칼 호수를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통로 너머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대륙 연합군이 복귀한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오스칼 호수 주변이 들썩거렸다.

“제발…….”

“부디 인류를 구원해 주소서.”

아직 결과는 알지 못했다.

걱정과 기대.

복잡한 감정들이 한데 모였다.

시간이 흘렀다.

통로가 연결되는 상황에, 사람들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만약 이 너머로 패잔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로만 드미트리조차 패배한 상황에 사람들은 인류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간절하게 빌었다.

인류가 승리했기를, 승리했다면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가족들도 무사하다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가 반드시 살아 있기를.

의지가 모였다.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는 그때, 마침내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며 거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보았다.

저벅저벅.

통로 너머로 걸어오는 한 명의 사내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

사람들은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확실했다.

선두의 사내가 로만 드미트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세상을 뒤엎을 듯 소리를 질러 댔다.

“황제 폐하시여!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시여!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시여!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열광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폭발적인 환호성에, 상황을 확인하지 못한 뒤편의 사람들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알았다.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인류가 살아남았음을.

그리고 가족들이 돌아왔음을.

훗날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이날의 일을 절대 잊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신(神)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 세상에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

* * *

마계 정벌 이후.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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