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마계 정벌 (10)
비틀.
몸에서 힘이 빠졌다.
관통당해 버린 심장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고, 구속력을 잃은 어둠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력의 소실로 인해 거대한 몸체가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변한 마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대체 어떻게…….”
마지막 일격.
완벽하게 허를 찔렀다.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었건만, 절묘하게 파고든 공격에 심장을 관통당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을 받아들인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만한 힘을 갖추었다.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도 자신의 파괴력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싸움의 내용을 되새기면 압도적으로 밀렸다.
대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것이 태생의 차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마왕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다.
마왕과 로만 드미트리.
둘은 달랐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둘 다 천외의 경지처럼 보이겠지만,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경험한 것들이 달랐다.
마왕은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났을 때부터 강한 존재였다.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권능을 발현했고, 그렇기에 대등한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항상 그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던 존재가 마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백중혁은 어떠했을까.
삶의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어린 나이에 불과했던 백중혁은 누가 봐도 약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힘이 부족하다면 돌멩이를 사용해서라도, 누가 비겁하다고 비난하든 말든 승리를 위한 최선을 행했다.
그렇게 경쟁자들을 짓밟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천마의 자리에 오르고서 사람들은 백중혁을 전설 속의 존재처럼 여겼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백중혁은 남들의 찬양처럼 고고한 삶을 살아가지 않았다.
그 차이였다.
불리할 때.
대등할 때.
압도할 때.
로만 드미트리의 머릿속에는 모든 가능성이 있었다.
마왕은 불리한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천마검법을 행하지 않고 이기어검의 수를 사용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다, 승리를 위한 지름길이 무엇인지를 로만 드미트리는 알았다.
압도했다.
마왕은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왕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저항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검을 높이 들었다.
“너는 모두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끝이었다.
검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마왕이 발악하며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 네게 거래를 제안한다! 차원의 규율,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 주겠다!”
우뚝.
검을 멈추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멈춘 검에, 로만 드미트리는 싸늘한 눈빛을 보였다.
* * *
벼랑 끝에 몰리고서야.
마왕은 스스로를 알게 되었다.
패배했다고 해서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는 생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마왕이 말했다.
“너는 알렉산드르와 같은 존재다. 알렉산드르는 예고되지 않은 균열이었기에 차원을 무너트리는 힘을 보였다면, 너는 마계로 넘어오면서 차원의 규율을 어겼다. 네가 만약 지상계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지상계는 빠르면 몇 년 안에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마계가 경험했던 것처럼, 아주 빠르게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차원의 규율에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만약 이대로 로만 드미트리가 지상계로 돌아간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마왕이 이 문제를 거론한 이유는, 본인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게 마왕의 자리를 물려주겠다. 네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면, 차원의 규율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라도 균열의 현상을 늦출 수는 있다. 물론 무한한 삶을 살아갈 너에게는 언젠가 다가올 미래는 좋은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지상계의 사람들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찾으면 그만이다. 차원의 공간에는 마계와 지상계만이 아닌 무수히 많은 세상이 존재하며, 나는 그중 인간들이 살아갈 만한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확신한다.”
강렬한 열망이었다.
생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는 살고 싶었다.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에게는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처럼 경험을 받아들일 시간이.
그때 다시 한번 반전을 노려볼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신은 한낱 인간의 삶을 돌봐 주지 않는다. 너의 삶은, 너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
최선의 방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마왕은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대신 한 번 더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생
각해 보면 다른 차원을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그의 곁에서 힘을 보탤 의향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다른 차원을 공격하는 것은 그의 목표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통해서라도 그걸 이루어 낸다면, 지루했던 자신의 삶은 즐거움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마왕이 광기 어린 눈빛을 보였다.
심장에서 피를 쏟아 내며, 로만 드미트리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너는 나와 같은 동류다. 나의 손을 잡아라. 나는 기꺼이, 너와 같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
마왕의 제안.
그것은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방법이었다.
* * *
차원의 규율.
그건 무시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할지라도, 지상계로 돌아가는 순간 세상은 파멸의 길로 빠져들 것이다.
알렉산드르와 자신.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신과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명확했다.
신은 말했다.
“네가 나의 뜻을 거부하고 만약 마계행을 강행한다면. 나는 차원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때는 유예 기간을 거쳐 너를 본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네 영혼은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까.”
그 말.
그것이면 충분했다.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지상계로 돌아갔을 때, 신은 파멸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모든 목적을 이룬 이후에, 로만 드미트리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행할 것이다.
마왕의 제안은 잘못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면, 그 제안은 분명히 고려해 볼 만한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영생(永生)을 바라지 않는다.”
척.
목에 검을 겨누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마왕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무한한 삶은 인간에게 재앙이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고통에 빠트렸던 삶을 되풀이하게 되겠지.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너와 같은 강자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나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의 후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 왔듯, 난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다.”
선택을 되풀이했다.
우화등선의 순간에 천명을 거슬렀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에도 인간으로 죽기를 바랐다.
마왕이 그런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비참했다.
패배한 자신은 이토록 삶에 대한 갈망을 보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목구멍에서 비굴하고 비참한 말들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마지막 제안마저 거절당한 지금, 죽음마저 구차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인간. 마지막으로 묻지. 네가 죽게 되더라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진심을 물었다.
그에.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들었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지도자로서 살아왔던 삶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요소를 남겨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내 선택이다.”
번뜩.
그대로 마왕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 * *
그 시각.
후발대는 지옥에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동화 속 이야기와는 다르게 금세 비명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크악!”
“으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새카맣게 밀려드는 마물들이 병사들의 육체를 물어뜯었고, 악착같이 반항할지라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현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병사들이 죽어 가고 있는 상황에, 그들의 지휘관인 크리스는 이미 살아남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곱게는 죽지 않는다.’
번뜩.
파파파파팟.
일격에 마물들의 머리가 날아갔다.
크리스는 앞으로 나아가며, 눈에 보이는 족족 모조리 베어 버렸다.
이미 육체는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마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고, 로만 드미트리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크리스는 가만히 앉아 있질 않았다.
늘 주변을 돌보았다.
사람들을 체크하며 불가능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빈자리를 체감했다.
‘주군은 단순히 무력만 강한 분이 아니셨어. 대체 어떻게 이 부담감을 안고, 우리 모두를 짊어질 수 있었을까.’
대단했다.
사람들은 운명을 믿는다.
크리스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었다.
사실 이제는 스스로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꿈은 정말 허황되었으며, 만약 영생을 허락받는다고 한들 꿈은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결과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와 같은 사람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이를 악물었다.
오라를 끌어올렸다.
벌써 수백 마리 이상을 베어 버렸으나,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새카만 어둠 너머로.
로만 드미트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모든 짐을 짊어진 그에게, 후발대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다는 참담한 결과를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패배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반드시 승리할 테니, 그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미친 듯이 나아갔다.
대열에서 홀로 이탈했으나, 크리스의 존재는 아무리 많은 마물들을 맞닥트린다고 한들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시간의 개념을 잊어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나아가며, 크리스는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마나가 한계에 이르렀다.
만약 마나를 모두 소모한다면, 선천의 기운을 소모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불태우다 죽을 것이다.
그때였다.
“케엑.”
“크르르르르륵.”
갑자기 마물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해일처럼 밀려들던 마물들이 망설임을 보였고, 어느 순간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크리스가 마왕성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물들이 도망치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전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군께서 승리하셨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해낸 것이다.
* * *
서둘렀다.
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부상자들은 일단 자리에 남겨 둔 채로, 크리스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병사들을 이끌었다.
“서둘러라!”
만약.
적이 마왕만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아직도 전투를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
크리스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고, 드미트리의 검사들은 다들 몸이 정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리스를 따라나섰다.
단순히 마왕을 물리친 것만으로는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점점 선명해지는 모습에, 크리스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마왕으로 추정되는 머리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