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3화 (453/615)

453화 마계 정벌 (8)

케빈의 발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미 팔이 하나 뜯겨 나간 병사가, 마물의 머리를 베어 버리며 소리쳤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읍시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반드시 마왕을 물리칠 것입니다. 그분의 행보에, 우리가 방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계 정벌.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자신들의 희생으로 인류가 평화를 되찾길 바랐건만, 막상 눈앞에 닥친 현실은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문제를 떠안았다.

그분은 홀로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마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먼저 떠나간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대단하다는 감정이 들면서도 미안했고,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도움은커녕 짐이 된다니.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걸음을 돌린다면, 마왕이라는 목적을 눈앞에 두고 발목이 붙잡힌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을 선사할 것이다.

그럴 수 없었다.

케빈이 말한 것처럼, 그따위 현실을 맞이할 바에는 짐에 불과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릴 것이다.

“드미트리를 위하여!”

푸확.

콰직, 콰드드득.

달려들었다.

마물로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피를 흩뿌리며, 마물들이 몸을 물어뜯든 말든 병사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악착같이 검을 휘둘렀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현상이었다. 병사들이 방어 대형을 포기했다.

차라리 짐으로라도 남지 않기 위해, 대열을 이탈하며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다.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지금처럼 대열을 무너트렸다가는, 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케빈의 말을, 사람들의 심정을 공감하기에, 중심을 맡았던 그조차도 대열을 이탈하며 오라를 일으켰다.

쿠르르르르르릉.

“모두 목숨을 걸어라.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황제 폐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생각을 바꾸었다.

현실적으로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지금부터는 패배 이후를 생각해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대륙 연합군이 전멸당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마왕을 쓰러트릴 발판을 마련하기를 바랐다.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버티고 버티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잔재에 불과한 마물들조차 해결해 달라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짐으로만 남기는 싫기에, 크리스는 지휘 체계를 도맡아야 한다는 역할에서 벗어나 한 명의 검사로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뜩.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오로지 적을 상대하는 것에 집중한 크리스는 맞닥트리는 족족 마물들을 도륙해 버렸다.

크리스.

드미트리의 이인자.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었다.

마물로 득실거리는 공간을 서슴없이 파고들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마물들 수십 마리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드미트리의 검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대형을 이탈했다고는 하나 체계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난전(亂戰) 또한 그들이 훈련하던 방식이었고, 크리스와 케빈이 날뛰면서 생겨나는 공간을 따라붙으면서 적을 하나라도 더 쓰러트리는 것에 집중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피와 죽음으로 가득 찼고, 이사벨은 그 공간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확실했다.

마지막.

결전의 순간이었다.

이 혼란이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미래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사벨이 힘을 끌어올렸다.

사람들의 의지에, 본인 또한 목숨을 걸었다.

“새크리파이스(sacrifice).”

번뜩.

화아아아악.

빛이 일었다.

신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새크리파이스는 생명력을 대가로 한 힘.

사람들의 의지처럼, 이사벨 또한 로만 드미트리의 짐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 * *

저 멀리.

혼란으로 뒤얽힌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죽어 가는 소리가,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왔다.

“전제가 잘못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덤덤했다.

마왕은 진실을 말했다.

서로의 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후발대를 공격했고, 그의 말처럼 후발대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마왕을 마주한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았다.

“나의 사람들이 공격받는다고 해서 나는 서두를 필요도, 조급해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동안 그래 왔듯 제 몫을 해낼 것이다.”

그간의 세월.

로만 드미트리는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사실 단순히 개인의 무력으로는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드미트리 제국을 창설하는 업적을 오로지 본인만의 힘으로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을 경험하면서도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개인은 한계가 있기에, 넓은 땅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받쳐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백중혁이 없는 공간에서 광마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드미트리는 진즉에 멸망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바르코, 베네딕트.

남부 전선.

발할라, 크로노스, 알렉산드르.

처음에는 변방의 영지에서 시작했던 싸움이 대륙 전체로 번지면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

그들은 약하지 않다.

자신의 사람들이 최대한 죽지 않길 바라기에 선봉에 섰다고는 하나, 그들이 보모의 돌봄을 받아야 할 만큼 나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군단장들과 같은 천외의 존재들은 자신이 맡고, 그 이후의 일들은 자신의 사람들을 믿었다.

마왕의 발언은 전제가 잘못되었다.

후발대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의 정신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스릉.

검을 들었다.

오라를 서서히 일으키며, 로만 드미트리가 마왕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부터 나 또한 내 역할을 해낼 것이다. 이 자리에서 너의 목을 베어, 세상 모든 존재에게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똑똑히 증명할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마침내 서로의 거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왕과 로만 드미트리가 서로를 향한 살의를 폭발시켰다.

* * *

쾌속(快速)의 영역이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기에도 부족한 시간.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든 로만 드미트리가 공격을 시도하자, 마왕도 마력을 일으키며 손을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었다.

손과 검이 부닥쳤는데도, 마치 마법 폭탄이 폭발한 것처럼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마왕이 치고 들어왔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천마군림보를 발현했건만, 방금의 일격에도 충격이 전혀 없는 모양인지 마왕의 손에서 강대한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끓었다.

콰앙!

퍼퍼퍼퍼퍼퍼퍼펑.

어둠의 마력이 공간을 휩쓸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한 주변 공간이 그대로 휩쓸렸고, 주변의 지형지물이 일부 소멸(消滅)해 버릴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눈빛은 예리함을 잃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으로 넘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그것을 뚫고 오는 것이 보였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팟.

파파파파팟.

천마군림보를 거듭해서 걸었다.

순식간에 폭발력을 더하며 발현되는 공격에, 격렬하게 분출되는 오라가 어둠의 마력을 단번에 갈랐다.

번뜩.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방금 마왕이 사용한 공격에 3군단장은 모두 무릎을 꿇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왕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아직 전투는 시작에 불과하건만, 이 짧은 시간에도 로만 드미트리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거야! 로만 드미트리, 너의 전부를 보이거라! 데몰리션(demolition).”

콰릉.

콰르르르르릉.

피하지 않았다.

천마검법.

마왕은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그로부터 아지랑이처럼 수백 갈래의 마력이 뿜어지더니, 그것이 거대한 채찍처럼 하나로 뭉쳐서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정면 대결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천마군림보를 발현한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이 데몰리션의 힘에 갈라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콰지지지지지직.

힘의 파동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오라를 깨부수고 들어오는 데몰리션을 막아 냈다.

콰앙!

파파파파파팡.

뒤로 밀려났다.

생소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적을 상대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단언컨대 이와 같은 파괴력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너는 다르다 이건가.”

마왕.

그는 천외의 존재였다.

각각 지상계를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는 3명의 군단장이, 왜 마왕을 마주하고 충성을 맹세했는지 알 수 있었다.

3군단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약 그들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어도, 아니 마계의 존재들이 모두 달려들었어도 마왕 단 한 명을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존재감이 부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약한 외관이었으나, 마왕은 전생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강자가 분명했다.

“나는 항상 나를 위협할 강자가 나타나길 원했다.”

꽉.

검을 움켜쥐었다.

마왕과 같은 발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마왕은, 서로의 존재를 기쁘게 여겼다.

무림.

마계.

두 세계의 절대자였다.

각각의 세계에서 체계를 무너트릴 만큼 엄청난 힘을 보유했고, 그렇기에 그들은 반강제적으로 고독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투쟁을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으나, 자신들의 힘을 받아 낼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차원을 넘어, 그들은 서로를 마주하는 현실에 놓였다.

기뻤다.

상대가 강하다는 사실이.

지상계의 평화, 마계의 붕괴 등등 여러 문제가 뒤얽혔으나, 지금은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했다.

마음껏 즐겼다.

이 순간을, 이 느낌을.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군림보의 힘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마왕이여. 너의 강함을 인정한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다섯 번째 걸음, 여섯 번째 걸음, 일곱 번째 걸음.

천마군림보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끓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일격을 지금 마왕을 상대로 사용하고자 했다.

파파팡.

콰콰콰콰쾅.

공간이 찢겨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모습을 보였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마왕 또한 로만 드미트리가 달려드는 모습에, 마력을 일으키며 정면으로 맞닥트리고자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가 아홉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뻗었다.

‘천마검법 후반부 삼초식.’

단 한 번의 일격.

번뜩.

검이 공간을 가르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콰앙!

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 * *

쿠릉.

쿠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일격이었다.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평평한 평지였던 것이 수천 개의 마법 폭탄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곳곳이 패었고, 보랏빛으로 물든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며 시야를 방해했다.

천마군림보와 천마검법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일격이었다.

무림을 정벌하고 오랜 수련 끝에 완성한 경지였지만, 두 번의 삶을 살아가며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쓰러트리겠다는 목적으로 이 힘을 사용한 경우는 없었다.

당연했다.

벨제르트와 같은 괴물조차도.

후반부 이초식에 무릎을 꿇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간 이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어떤 적을 맞닥트리든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전력을 발현했다.

그 강력한 일격은, 설령 상대가 신일지라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쿠르르르르르릉.

“……이게 인간의 힘이라니. 너는 신의 영역에 닿은 존재구나.”

먼지구름 너머로.

생명체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인간의 형태였던 마왕이, 지금은 거대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에 돋아난 뿔과 새빨간 안광. 마왕의 본래 모습이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작지 않은 충격을 입은 모양인지, 그의 몸 곳곳에는 찢겨 나간 상처와 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웃었다.

인간 수백 명은 동시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입이, 톱니바퀴와 같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동안 살아오며 나는 단 한 번도 본체를 드러낼 만큼의 적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마계의 대혼란 때도, 마계를 들썩이던 3군단장들은 인간 형태의 나를 상대로 무릎을 꿇었지.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나와 같은 영역에 도달한 존재다. 만약 마계가 아닌 지상계에서 너를 맞닥트렸다면, 나조차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쿠르르르르릉.

마력이 들끓었다.

몸체가 더욱 커지며, 그의 주변으로 마력이 일렁였다.

“이곳은 나의 세상이다. 그것이 너의 전력이라면, 인간들은 인류의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방금의 일격.

전력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전력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마왕은 본인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웃음을 보였다.

전력이 막혔다.

분명히 실패했건만,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방금의 일격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검사는 일격으로 승부를 보는 세계가 아니다.

수많은 공방 끝에 적을 쓰러트렸을 때, 그제야 비로소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

그 말인즉.

“정말 즐겁구나.”

전력을 막아 냈다는 것.

그것은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검을 섞을 수 있는, 자신을 상대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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