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마계 정벌 (4)
쿠르르르르릉.
“키엑.”
“크르르르륵.”
엄청난 장관이었다.
넓은 평야를 가득 메울 만큼 수많은 숫자의 마물들이, 떼로 무리를 지어 어딘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발걸음에 땅이 뒤흔들렸다.
만약 인간들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의 모습에 전의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중 핏빛의 망토를 두른 사내가, 바로 옆에서 동행하는 검은 로브의 존재에게 말했다.
“벨제르트 님. 마계 역사상, 전 군단이 이렇게 움직인 전례가 있었습니까? 마계가 통일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설마 겨우 인간 나부랭이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통일되기 전에는 군단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끌끌끌, 그렇습니까?”
핏빛의 사내가 실실 웃었다.
그의 이름은 피비르.
마계의 2군단장이었다.
대혼란, 혹은 대전쟁이라고 불리던 시기에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존재이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검은 로브의 존재도 그와 같은 과거를 지녔다.
1군단장 벨제르트. 마계의 악마들에게 공포의 상징으로 불리는 두 존재가, 지금 마왕의 명령을 받아 인간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피비르는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계에 틀어박혀 지낸 시간이 적지 않기에, 오랜만에 다가온 학살의 순간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도 대단합니다. 인간 주제에 감히 마계의 영역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이만한 병력이라면, 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 전력을 갖추었든 절대 살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피비르에게서 걱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산책을 나온 듯 여유로운 그와는 달리, 벨제르트는 마왕의 명령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매우 위험한 인간이다.’
조금 전.
바벨이 당했다.
예고되지 않았던 전투라 할지라도, 바벨이 그렇게 쉽게 당할 정도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벨제르트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을 잠깐이나마 경험한 기억이 있었다.
셰피르와의 전투. 그날 로만 드미트리는 마계에 발을 들였었고, 그때 전투를 벌였던 공간은 바로 벨제르트의 영역이었다.
강렬한 기억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이 셰피르의 몸을 갈랐을 때, 벨제르트는 눈을 부릅뜨며 그 방향을 보았다.
‘그것은 파멸적인 힘이었다. 그런 힘을 사용하는 존재라면, 제아무리 인간이라 할지라도 만만히 볼 수 없겠지. 그리고 그것은 마왕의 반응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진실이다. 피비르의 말처럼 순순히 무너질 존재였다면, 마왕은 군단 전체를 이렇게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진 않았겠지.’
스스스스스.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어둠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벨제르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는 겨우 인간 따위에게 바벨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피비르. 조심해라. 상대는 바벨을 죽였다.”
“바벨은 태생이 천박한…….”
“피비르.”
“알겠습니다.”
피비르가 말을 삼켰다.
마계의 존재들에게는 명확한 서열이 존재했다.
마왕이 범접할 수 없는 천외의 존재라면, 그다음 서열이 바로 1군단장 벨제르트였다.
피비르로서는 절대 항명할 수 없는 존재. 서열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벨제르트의 강압적인 태도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벨제르트 님.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척후병(斥候兵)이었다.
혹시라도 적들이 도주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고자 일부의 병력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로만 드미트리로 추정되는 인간이 이곳을 향해 홀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분명히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뚝.
벨제르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예상이 빗나갔다.
인간들의 행보에, 벨제르트가 사나운 얼굴을 보였다.
“미친 녀석.”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 존재는,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 * *
척후병의 보고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걸음을 옮겼다.
보랏빛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며, 전생의 한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많은 사람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지.’
무림 정벌.
대륙 정벌.
항상 정점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기에, 세상이 바뀌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중혁으로서 천마의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과 피를 대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판단에 이제는 마계 정벌을 넘보았다.
후회는 없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자신은 똑같이 살아갈 것이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속에 또 다른 가치를 품었다.
‘의미 없는 희생을 방관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되, 나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존재들이 최대한 낙오되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 만약 전생의 내가 무림을 정벌할 당시 지금의 무력을 갖추었다면,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말했다.
백중혁은 천하제일인이라고.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지(地)의 경지에 불과했고, 완벽하지 않았기에 광마와 같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할 정도의 평화를 경험하며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완벽했더라면, 한 단계만 더 나아갔더라면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정점의 자리는 생각보다 공허했다.
많은 사람을 잃었기에,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로만 드미트리는 잘 알았다.
그래서.
전력을 다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방법은, 자신이 최대한 많은 적을 처리하여 사람들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선두에 섰다. 전면전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뜻을 전했다.
“나를 제외한 전부 후방을 맡아라. 내가 지나간 전장을 정리하며 따라붙는 것이, 너희가 이번 전쟁에서 맡을 역할이다.”
경악스러운 발언이었다.
모두가 반발했으나, 그렇게 해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제대로 반박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벨과의 전투.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바벨의 강력한 무력은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크리스.
케빈.
에드윈 헥토르.
현재 대륙 연합군에서 강자로 분류되는 이들조차도, 바벨과 같은 괴물을 상대했다간 목숨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군단장급의 괴물들은 9서클 마법사인 알렉산드르조차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기에, 인간들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단 한 명.
로만 드미트리만은 달랐다.
그는 천외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였고, 군단장들의 존재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눈앞의 승리만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삶을 생각했다.
쿠르르르르르릉.
땅이 뒤흔들렸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그러고는 천천히.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저벅저벅.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마물과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단 한 명의 인간.
세상이 뒤흔들렸다.
마물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군림보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번뜩.
콰르르르르릉.
가장 처음 맞닥트린 존재들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수십의 마물들을 단번에 찢어발긴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밀려드는 파도를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사방에서 사나운 울음이 들렸다.
마물들이 얼굴을 들이밀며 로만 드미트리를 물어뜯으려고 했고,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사방을 압박했다.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은 형세였으나, 들끓는 마력은 아직 첫 번째 걸음을 끝내지 않았다.
콰앙!
파파파파팟.
“키엑.”
“크에에에엑!”
일격에 수십.
검을 휘두를 때면, 수십의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흩뿌렸다.
머리를 들이밀던 마물은 머리가 잘려 나갔고, 손톱을 휘두르던 마물은 팔이 잘려 나갔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는 존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
‘천마검법 전반부 이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학살이었다.
강력한 외피를 자랑하는 마물조차도 오라의 폭풍에 휩쓸렸고, 로만 드미트리는 계속해서 적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보랏빛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늘을 둘러보아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겠다고 달려드는 마물들이 전부였다.
“카악-!”
그들은 목숨을 버렸다.
수백만, 아니 그 이상의 마물들이 동원되었다.
벌써 수천의 마물들을 도륙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대세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미미한 숫자에 불과했다.
마물들은 마왕의 명령을 받들었다.
물러나는 이들에게는 마왕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기에,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콰득.
머리가 부서졌다.
푸확.
가슴팍이 찢겨 나간 마물이, 피를 토해 내면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릉.
그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가 어떻게 발악하든 어김없이 짓밟아 버렸다.
눈이 팽팽 돌고 1초 사이에 수많은 공격이 뒤얽히는 상황에서, 단 한 번의 공격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천마군림보의 걸음을 거듭했다.
첫 번째 걸음, 두 번째 걸음, 세 번째 걸음으로 나아갈수록 강해지는 파괴력에, 어느 순간부터는 일격에 수십이 아니라 수백의 마물이 휩쓸렸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소멸했다.
마물들을 찢어발기며, 로만 드미트리가 피로 흠뻑 물든 모습으로 그들의 사이를 헤쳐 나왔다.
숨을 들이켰다.
마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어둠의 마력은 인간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드나, 로만 드미트리는 마력을 걸러 단전으로 흡수해 버렸다.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의 적,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익숙한 환경이었다.
수많은 적을 상대하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체력을 비축했다.
이 너머에.
마왕이 존재했다.
언젠가는 그를 상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퍽.
마물의 머리를 짓밟았다.
자신을 따라올 이들이 버겁지 않도록, 맞닥트리는 적들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었다.
더.
더, 더, 더.
피로 물들었다.
살의로 넘실거렸다.
그간 억눌렀던 천마로서의 광기(狂氣)가 폭발하자, 시간이 갈수록 마물들의 사체가 쌓여 가기 시작했다.
* * *
2군단장 피비르가 현장에 도착했다.
먼발치에서 상황을 확인한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무력에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낱 인간이 이런 파괴력을 보이다니.”
압도적이었다.
마물들로 들끓는 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들어 도륙하는 모습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바벨을 쓰러트렸는지를 증명했다.
저건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물의 단단한 외피를 단번에 찢어발기는 파괴력에, 사방에서 공격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게다가 지속되는 싸움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은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한 존재임을 증명했다.
팔락.
벨제르트가 도착했다.
그도 상황을 파악하더니, 조금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비르. 인간이 더 날뛰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였다.
마왕은 인간들의 척결(剔抉)을 명령했고,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간 마왕은 절대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감
상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앞으로 각 차원을 점령하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굳이 인간들을 상대하는 과정에 마물들을 전부 죽일 이유는 없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스르륵.
피비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망토로 본인의 몸을 가리자, 보랏빛 세계에 그대로 스며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피비르의 특기였다.
마계의 대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피비르는 몸을 숨기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적들을 처리했다.
이번에도 그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인간 따위에게 전력을 다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일격.
싸움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이 상황을 정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순간에도.
콰득.
콰르르르르르릉.
마물들이 죽어 나갔다.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에, 피비르는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없앴다.
때를 노렸다.
‘건방진 인간 녀석. 인간들의 세상에서 너는 한계를 초월한 존재일지 몰라도, 끊임없이 투쟁해 온 우리에게 너는 익숙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것이 패착이다. 종족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마계의 영역을 침범해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인간들을 몰락의 길로 빠트릴 것이다.’
웃었다.
혼란이 극에 달했다.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팟.
팔락.
망토를 젖혔다.
존재를 드러내며, 피비르가 마력을 폭발시켰다.
“블러드 익스플로전(blood explosion).”
자신을 이 자리에 올린 공격이었다.
마력이 단숨에 폭발하며, 로만 드미트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공간을 휩쓸어 버렸다.
“죽어라!”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1초?
아니다.
1초, 그 이하의 영역.
강렬한 폭발이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키는 순간, 피비르가 눈을 부릅떴다.
푸확.
“크억?!”
비명을 내질렀다.
찰나의 순간.
피비르가 무얼 해 보기도 전에,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그의 가슴팍을 찢어발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