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마계 정벌 (2)
“크륵, 크르르륵.”
바벨이 숨을 헐떡였다.
잘려 나간 팔을 움켜쥔 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이게 인간의 힘이라니.’
방금의 일격.
보고도 막질 못했다.
어둠의 마력으로 둘러싸인 손톱이 부서지며, 자신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상식의 세계가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인간들의 역사에 그동안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지만, 그들은 마계의 기준에서 하찮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역사가 만들어 낸 영웅.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안일한 생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뚝, 뚝.
피가 떨어졌다.
바벨은 고통을 삼키며, 살의로 넘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너는 다르다 이건가.”
인정했다.
알렉산드르.
마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하수인이 패배한 것은, 그의 한계를 증명하는 결과가 아니라 상대가 상식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안일한 마음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과거에 마계에서 벌어졌던 대전쟁처럼,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면 죽어야 한다는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그뿐이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이 들끓었다.
어둠의 마력이 피어오르며 그의 상처 부위를 감쌌고, 육체가 재생되지는 않았지만 팔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상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어둠의 마력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마계의 악마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사(不死)의 존재를 상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주.
눈빛이 변했다.
빨갛다 못해 핏빛으로 물들더니, 바벨이 거친 기세를 토해 내며 땅을 박찼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찢어발겨 주마.”
그러고는.
팟.
콰르르르르르릉.
사라졌다.
거대한 거구인데도 불구하고,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였다.
확.
바로 옆.
바벨이 공간을 파고들었다.
곧바로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를 날려 버리려는 순간, 바벨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
시선이 마주쳤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스피드였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눈동자는 정확히 바벨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공격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양손에 돋아난 손톱을 들어 올리자, 엄청난 충격에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어둠의 마력으로 만들어 낸 팔이 부서졌다.
충격받은 표정으로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어느새 따라붙은 로만 드미트리가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몸이 들썩였다.
공격이 작렬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일었다.
콰앙, 콰앙, 콰앙!
머릿속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폭주는 몸 상태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비장의 기술이며, 상위 군단장들조차도 자신이 폭주를 발현한 상태를 버거워했다.
그런데 스피드와 힘, 모든 면에서 밀려 버렸다.
마치 자신의 발악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바벨은 정말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번뜩.
“크아아아악!”
다른 팔마저 날아갔다.
간신히 버텨 내던 손톱이 부서지자, 그는 양팔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인정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괴물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으며, 더욱 황당한 사실은 이 인간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공격만으로도 바벨은 감당하지 못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이보다 강한 존재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나 이 녀석은 마왕에 버금가는 괴물일지도 몰랐다.
파스스스.
폭주가 풀렸다.
너무나도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수급되는 어둠의 마력보다 소멸되는 마력의 양이 많았다.
확실했다.
도망쳐야만 했다.
일단 도망친 뒤에, 마계를 침공한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고해야만 했다.
그러나.
번뜩.
푸확.
몸이 비틀거렸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에, 바벨은 자신의 머리가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3군단장 바벨.
마계를 호령한 괴물이라기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허무한 최후였다.
* * *
그 순간.
번뜩.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떨어진 거리.
바벨의 죽음을 느꼈다.
마계의 문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난 힘의 충돌에 바벨의 생명력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3군단장이 패배했단 말인가.”
웃음이 나왔다.
바벨이 3명의 군단장 중에서 제일 말석(末席)이라 할지라도, 수천 번의 싸움 끝에 군단장의 자리를 쟁취해 낸 괴물이었다.
그런 바벨이 한낱 인간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어둠의 마력을 무한으로 공급받는 마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절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
분명히 그일 것이다.
알렉산드르의 계획을 망친, 인간들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는 괴물이 바벨을 쓰러트린 존재였다.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으나, 사실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는 군단장급조차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의 결과로 로만 드미트리는 스스로를 증명했다.
마계에서 전투를 벌였는데도 순식간에 끝나 버린 싸움은, 그가 압도적으로 바벨을 무너트렸음을 의미했다.
흥미가 돌았다.
마왕의 계획.
여러 의미를 담았다.
바벨이 말한 것처럼 인간과 같은 나약한 존재들이 한 세계를 군림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흥미를 자극할 강자들이 나타나길 바랐다.
마계는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다.
약하다면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압도적인 지배는 마왕에게 엄청난 무력감을 선사했다.
시험해 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가 군단장들을 압도할 만큼의 강자라면, 그것은 마왕에게 있어 엄청난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쿠르르르르릉.
마력을 일으켰다.
권능을 발현해, 자신을 따르는 존재들에게 말했다.
“나의 병사들이여.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감히 마계의 땅에 발을 들였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피와 죽음으로, 그들에게 처절한 대가를 치러라.”
파스스스.
어둠의 마력이 퍼져나갔다.
강력한 권능.
마계에 발을 들인 인간들은, 승리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절망적인 현실을 맞이할 것이다.
* * *
바벨의 죽음.
전투를 종결시켰다.
지휘관을 잃은 마물들은 죽거나 도망쳐 버렸고, 압도적인 승리에도 병사들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마물들의 사체를 불태워라.”
“빠르게 움직여!”
승리.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의 목표는 마계 정벌이기에, 겨우 한 번의 승리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시작일 뿐임을 알았다.
섣부르게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리기보다는, 지난 보름 동안 치열하게 훈련했던 매뉴얼에 따라서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척척척.
사체를 한곳에 모았다.
그러고는 불을 질렀다.
신성력의 축복을 받은 불길은, 마물들의 사체를 활활 불태우더니 어둠의 마력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일련의 모습.
이사벨은 단번에 의도를 알아차렸다.
‘최소한의 변수조차 차단하겠다는 건가.’
마계의 악마들.
그들은 죽음조차도 통제했다.
생명이 끊어졌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사체들을 모아 불태우는 행위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병사들의 반응이었다. 한뜻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사벨은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계.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사벨은 진실을 알고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누구도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역사는 마계의 악마들이 얼마나 잔인무도한지를 증명했다.
어차피 인간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기에, 다들 그들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다.
금기(禁忌)였다.
상대할 생각은커녕,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간의 상식과는 달랐다.
병사들은 대담하게도 마계의 땅에 발을 들여 전투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면서 적절한 대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사벨이 바랐던 이상이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하나가 되길 바랐으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기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변화시켰단 말인가.
신의 뜻이라 아무리 부르짖어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리도 강인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진실을 알아야겠어.’
궁금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마계로 넘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가가더니, 숨소리조차 흐트러짐이 없는 그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제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마계의 문을 스스로 여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 * *
설명은 크리스가 맡았다.
한참을 말했다.
아르카디아의 붕괴, 제2차 대륙 전쟁, 알렉산드르의 죽음, 일련의 상황들을 거쳐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제국의 탄생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대륙 연합군이었다.
충분한 설명에.
이사벨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정말 신탁의 주인공이었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대륙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어 낸 존재라면, 그가 신탁의 주인공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설명을 듣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겠으나, 크리스가 담담하게 말하는 사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발할라와의 격돌.
대륙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그때의 사건을 들을 때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비에토 공작이 실제로는 알렉산드르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던 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결단을 내린다고 했지만, 이사벨로서는 조금 더 평화로운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무조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달랐다.
적어도 마계의 위협을 받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결단력이 필요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이토록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굳이 마계로 넘어올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레오와 병사들.
그들은 자신을 따라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스스로가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조금 더 확실하게 알았더라면. 자신이 정말 신탁의 주인공일 만큼 강했더라면.
혼자 살아남은 상황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눈앞에 존재하는 연합군은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기에 시간은 촉박했다.
3군단장 바벨은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를 알기에, 이사벨은 현실을 직시하며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을 물었다.
“드미트리가 대륙을 통일했다는 사실은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왜, 마계의 문을 스스로 연 거죠? 어둠의 마력이 들끓는 이 세상은 마계의 악마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에요. 마계의 통로를 알아냈다면 차라리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직접 마계로 넘어왔는지를 이해할 수 없어요. 설마 인류의 복수를 하겠다는,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은 아니겠죠?”
어떤 이유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마계에 발을 들인 것은, 정말이지 자살행위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마계를 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마계 정벌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상식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