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6화 (446/615)

446화 마계 정벌 (1)

머릿속이 완전히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이사벨로서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계에서의 시간.

현실과 동떨어졌다.

그녀의 기억은 크로노스와의 휴전 협상에서 끊겨 버렸고, 그동안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마계행을 결심하기 이전.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찾아갔던 만남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의 목적은 부합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저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 크로노스 제국을 쓰러트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해 온다면. 당신은 그들의 목숨을 포기하고 알렉산드르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습니까?”

협상은 결렬되었다.

세상을 위해 헌신하지 않겠다는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이사벨은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순적이게도 그날의 만남은 신뢰를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한 존재고, 그가 정말 신탁의 주인공이라면 분명히 세상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

마계의 악마들은 크로노스와 다르지 않다.

둘 다 드미트리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적으로 여길 것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충분히 성장할, 그리고 대륙의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이사벨은 적지 않은 시간을 버텼다.

그런데도 마계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크로노스라는 거대한 산을 무너트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할지라도, 짧은 시간에 대륙의 양대산맥을 모두 무너트리고 대륙을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다.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자신조차도 무릎을 꿇고 마계의 통로가 열렸을 때, 제발 인간들이 재앙을 감당할 여력이 있기를.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사벨이 마계로 떠난 것도, 루나 왕국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라고 말했던 것도. 그를 신뢰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는 존재가 이사벨이었으나, 그녀조차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바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기에, 드미트리가 대륙 통일을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척척척.

로만 드미트리의 뒤로.

병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복장에 이사벨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사들의 복장은 통일되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나 가슴팍에 달린 문양은 다른 소속임을 의미했고, 그들의 선두에는 각각의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가 펄럭였다.

드미트리.

카이로와 헥토르.

크로노스와 발할라.

그리고 남부 삼국.

그들이 하나의 소속처럼 움직이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었다.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대륙을 통일했단 말인가.’

소름이 돋았다.

그건 정말이지.

직접 마주하고도 믿을 수 없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 * *

일련의 상황.

3군단장 바벨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크르르륵, 설마 겨우 인간 따위가 지금 마계의 영역을 침범한 것인가.”

그 또한.

이사벨과 다르지 않았다.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으나, 당혹스러워하는 이사벨과는 다르게 분노하는 감정이 앞섰다.

이곳은 마계다.

먹이사슬 최정점에 있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지상계의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의 심심함을 달래 주는 그런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감히 마계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이사벨의 행보에 분노를 느끼던 바벨로서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토해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런 건방진 녀석들.”

쿠르르르르릉.

세상이 진동했다.

어둠의 마력이 들끓으며, 바벨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너희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너희같이 나약한 존재들이 한 세계를 군림한다는 사실이, 너희보다 월등한 우리가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차원의 규율은 부당하다. 우리는 스스로 그 경계를 무너트릴 생각이며, 지상계는 앞으로 마계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

쿵.

쿠르르르르릉.

마물들이 짓밟혔다.

동족들이 죽든 말든, 바벨은 인간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아마 네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이겠지. 감히 마계에 발을 들여, 우리의 하수인을 죽였던 건방진 인간. 지금부터 네 녀석에게 현실을 보여 주마. 겨우 알렉산드르와 같은 하수인들을 죽였다고 해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건방진 것인지를. 스스로가 마계와의 통로를 개방한 이 선택이, 너희 인류(人類)에게 어떤 현실로 돌아올 것인지를.”

콰드드드득.

먹구름이 일었다.

파괴적인 마력에 세상이 뒤틀리며, 바벨의 흉흉한 안광이 살의를 드러냈다.

성녀 이사벨.

그녀의 존재를 믿었다면 오산이었다.

그녀는 성가신 존재일 뿐, 마왕은커녕 자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슥.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죽어라, 우매한 인간들이여.”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갈라지며 벼락이 내리쳤다.

어둠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들끓으며, 세상을 단번에 집어삼킬 것처럼 사방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인간의 연약한 육체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공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이 인간으로서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한들, 마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팟.

콰르르르르르릉.

어둠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분명히 마력에 휩쓸려야 할 나약한 존재가, 어둠의 마력을 찢어발기며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바로 그였다.

* * *

마계에 발을 들인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파악했다.

‘이사벨.’

실종되었던 존재.

성녀가 그곳에 있었다.

사실 그녀의 선택은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고,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은 그녀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증명했다.

참 대단한 존재였다.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들 본인을 희생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건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그녀는 혼자만의 싸움을 택했다.

그녀의 희생.

헛되지 않았다.

덕분에 인간들은 시간을 벌었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한 이후에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죽어라, 우매한 인간들이여.”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바벨.

그가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둠의 마력이 공간을 휩쓰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발검(拔劍)과 동시에 단전의 마력을 분출했다.

번뜩.

어둠의 마력을 베었다.

단숨에 공간을 파고들더니,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바벨을 그대로 몰아붙였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작렬하는 오라에 바벨이 황급히 수비하더니, 이후 곧바로 들이닥치는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찰나의 방심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숨이 막힐 듯 세차게 몰아붙이는 공격에, 바벨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콰앙!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바벨의 외피는 6성의 오라로도 베어 내지 못할 만큼 강력하나,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을 허용하는 순간 단번에 찢겨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둠의 마력을 일으켜 공격을 막아 냈다.

몰아치는 공격을 차례로 막아 낸 뒤,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을 휘둘렀다.

“죽어라!”

팟.

파파파파팟.

공간을 휩쓸었다.

그의 손톱에 닿는 모든 것이 찢겨 나갔고, 로만 드미트리가 한발 빠르게 피했다는 사실에 바벨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바벨의 외형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조그맣게 보이게 만들 정도의 차이였고, 몇 걸음 달려들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콰앙!

콰앙, 콰앙, 콰앙!

거세게 몰아붙였다.

상대를 짓밟을 듯 강하게 찍어 누르며, 공격 중간마다 어둠의 마력을 일으켜 그대로 작렬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반격이었다.

보통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존재들은 이렇게 공방조차 주고받지 못하는데, 바벨은 마냥 밀리는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바벨 주변으로 어둠의 마력이 들끓었다. 이곳은 어둠의 마력이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싸우면 싸울수록 바벨은 무한한 힘을 얻었다.

강했다.

상식의 범주를 벗어났다.

마계의 존재들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그만한 힘을 갖춘 포식자이기 때문이었다.

콰앙!

강한 충돌이 일어났다.

뒤로 밀려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바벨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륵, 네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마계에 발을 들인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마계의 통로가 열리는 순간 이곳의 상황이 모두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마계의 악마들이 금방 몰려들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는 지금, 바벨은 다른 악마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자신이 이 같잖은 인간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자 했다.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몇 걸음 물러났던 그가, 다시 다가오며 말했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란다. 만약 지금 보여 준 모습이 너의 전력이라면…….”

강하다는 사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릴 참담한 현실이, 오히려 로만 드미트리를 즐겁게 만들었다.

“너희는 나를 상대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 * *

바벨과 로만 드미트리의 격돌.

그것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계의 마물들과 로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캬악!”

“키엑!”

“죽여라!”

“드미트리를 위하여!”

장관이었다.

명확하게 둘로 나누어진 무리가 부닥치기 직전, 루나의 사제들이 두 손을 모아 신성력을 일으켰다.

“블레스(bless).”

“블레스.”

화악.

어둠으로 물든 공간.

수십 개의 빛줄기가 어둠을 밀어내더니, 마물들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에게 신의 축복을 부여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대로 격돌했다. 두 무리가 서로 뒤엉키더니, 무지막지한 살육이 벌어졌다.

푹!

콰득.

“키에에에엑!”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병사들은 신성력으로 들끓는 창칼로 마물들을 난도질해 버렸고, 역으로 팔이 뜯겨 나가고 복부가 뚫려도 악착같이 상대의 급소에 무기를 찔러 넣었다.

인류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다.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만큼, 그들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였다.

그중.

단연 발군은 드미트리의 검사들이었다.

크리스를 필두로 케빈과 같은 검사들이, 가장 선두에서 마물들을 말 그대로 도륙해 버렸다.

번뜩.

푸확!

“모조리 죽여라!”

수십, 수백.

순식간에 마물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지금은 지휘 체계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힘의 대결이었고, 크리스는 피에 흠뻑 물들 정도로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을 파고들었다.

세상이 어지럽게 뒤얽혔다.

어디를 보든 마물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지만,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던 크리스에게 이와 같은 상황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번뜩.

마물의 머리를 베고.

번뜩.

동료를 공격하려는 녀석의 등을 베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체격의 괴물이 달려들자, 크리스는 치열한 공방 끝에 마물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마계의 마물은 인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역사는 그 사실을 증명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라는 천외의 존재를 상대해 본 크리스로서는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하늘을 보았기에.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이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쿠웅.

쿠르르르르르릉.

거구의 마물이 쓰러졌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나며 한 존재가 크리스를 노리던 마물들을 쓸어 버렸다.

푸확.

아름다웠다.

붉은 핏물과 어우러지는 신성력.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계속되는 전투로 다소 힘겨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마물을 베어 버리며 크리스에게 말했다.

“일반 마물들은 병사들에게 맡기고,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도와야 해요. 3군단장 바벨은 절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특히 그가 폭주(暴走) 상태에 돌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마계에서의 시간.

단순히 싸우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사벨은 많은 정보를 모았고,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하는 3군단장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협공이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바벨 둘의 대결을 유도하기보다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 같이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크리스의 반응은 덤덤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그것은 주군의 몫입니다. 그러니 주군의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답답했다.

이 상황.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대륙을 통일했으며, 어째서 마계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눈앞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대응이 필요했다.

3군단장의 자리는 단순한 이름값이 아니다. 그래서 협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크리스의 반응은 그녀의 가슴을 타들어 가게 했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상처를 입을 경우, 바벨을 넘어서는 괴물들을 감당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부탁하려고 했다.

승리를 위한 최선을, 그녀로서는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

고개를 홱 돌렸다.

비명의 근원지를 확인한 이사벨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바벨.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존재가, 한쪽 팔이 잘린 채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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