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1화 (441/615)

441화 통합 랭킹 (8)

결승전이 있던 날.

케빈을 무너트리는 크리스의 모습에, 지켜보는 관중들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뚝, 뚝.

팔뚝에서 피가 떨어졌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은 힘없이 늘어졌고, 크리스는 살짝 힘겨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경악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눈빛이 보였다.

크리스와 케빈의 대결에 의견이 분분했던 사람들은, 예상과는 달리 압도적인 결과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

단순히 일반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 라운드에서 탈락한 실력자들, 각국의 주요 인사, 그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무대를 지켜보는 가운데, 케빈을 무너트렸던 일섬의 스피드를 눈으로 따라잡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무대 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사내는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전설을 써 왔던 그라면 비상식의 영역을 이해하겠지만, 크리스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대로였다. 이번 대회는 단순히 기회의 무대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각국에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은 드미트리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철옹성의 성벽이 쌓여 갔다.

드미트리 검사들의 성적, 에드윈 헥토르를 무너트린 케빈, 그런 케빈을 제압해 버린 크리스의 존재.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실제로는 크리스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굴복당하고 말았다.

저벅저벅.

크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핏물이 흐르는 팔뚝은 개의치 않았다.

케빈과의 대결은 그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안겼지만, 드미트리의 이인자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을 나약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한 곳을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압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으로 통합 랭킹의 순위가 결정되었다. 크리스가 케빈을 쓰러트리며, 샐러맨더 대륙 랭킹 1위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와아아아아아!”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사방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팽팽한 긴장감에 숨을 죽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리며 랭킹 1위의 탄생을 축하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랭킹 1위의 자리는 진정한 의미의 1위가 아님을.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네가 나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었지. 통합 랭킹 1위, 황제인 나를 제외하고서 샐러맨더 대륙 제일의 강자로 인정받은 존재에게는 내게 도전할 기회를 부여해 달라고. 크리스. 그래서, 지금 내게 도전할 생각인가.”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과연.

크리스는 불가능에 도전할 것인가.

크리스가 말했다.

“예, 도전하겠습니다.”

* * *

대결은 곧바로 진행되지 않았다.

크리스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충분히 몸을 회복하고 이틀째에 대결을 진행하기로 했다.

상처는 제법 깊었다.

다행히도 외상(外傷) 위주라서 치료 물약으로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그렇게 몸을 추스른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현재 대륙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이번 대회를 통해 랭킹 1위임을 인정받은 크리스가 도전한다는 소식에, 뒤늦게 드미트리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

크리스는 연무장에 홀로 남아, 땀에 완전히 젖을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내가 주군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상대조차 될 수 있을까.’

고대했던 순간이다.

드디어 목표를 눈앞에 두었지만, 크리스는 당황스럽게도 두렵다는 감정이 들었다.

바르코와의 전투.

최초의 분쟁이었던 그때부터 제국을 건국한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바로 옆에서 그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스스로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처참하게 무너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는 이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외(天外).

그곳에 주군이 있었다.

그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결은 최초일 뿐이다. 앞으로 매년 나는 1위의 자리를 지킬 것이고, 이번 경험을 토대로 주군과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케빈이 언젠가는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강한 열망을 표출한 것처럼, 나 또한 목표를 세우기 위한 명확한 경험이 필요하다.’

매 순간.

크리스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괴물을 목표로 삼은 것이 옳은지 의심할 때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어중간한 목표였다면 타협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륙 제일의 검사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 그 목표가 높다고 해서 스스로 타협하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한들, 사람들이 자신을 대륙 제일의 검사라고 인정할까.

아니다.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역사는 로만 드미트리를 언급할 뿐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크리스는 자신을 벼랑 끝에 밀어 넣는 심정으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을 말했다.

그때였다.

“크리스.”

“……스승님.”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연무장을 찾아온 그가, 땀으로 물든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대결을 앞두고 그런 몰골이 되도록 수련에 몰두하다니. 비록 지금의 너에게는 부족한 스승이나, 나는 네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길 바란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의 대결은 하루 이틀을 더 노력한다고 달라질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려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연무장에 나왔지만, 이것이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조나단 기사단장이 말했다.

“사실 케빈과의 대결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네게 비기를 가르쳤으나, 너는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기술을 만들어 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케빈과의 승부를 결정 짓는 순간에 네가 어떻게 공격했는지 확인조차 하질 못했다. 너는 이미 위대한 검사의 반열에 올랐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의 대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둘 다.

대결의 결과를 알았다.

누가 승리할지, 누가 패배할지.

조나단 기사단장은 차마 진실을 입에 올릴 수 없기에, 하나뿐인 제자에게 그 이후의 상황을 말했다.

이번 대결은.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담담히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가, 의지를 다진 눈빛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 * *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수많은 인파의 환호성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순간 숨이 가빠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의 등을 바라보며 살아왔건만, 그를 마주한 채로 상대한다는 사실에 좀처럼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전날.

조나단 기사단장이 말해 준 것이 있었다.

“황제 폐하는 선이 확실한 사람이다. 도전자로서 무대에 오른 너를 상대로,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 손속에 사정을 두실 분이 아니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거라. 그래야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동의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크리스 또한 자비를 베풀길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했던 그때부터, 크리스는 눈앞에 보이는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악착같이 성장했다.

드미트리의 섬광, 통합 랭킹 1위.

그러한 수식어들은 결과를 바랐기에 얻은 것이 아니라, 목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룬 결과였다.

정면을 주시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크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주군이 나를 상대로 시작부터 어떻게 나올까. 주군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시간을 끌지 않겠지만, 나와의 압도적인 차이를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떤 방향이든 내게 승산은 없다는 것이다. 주군과의 대결에서 수를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패배할 싸움이라면, 시작부터 전력을 다해서 분위기를 주도해야만 한다.’

힘들 것이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선 일섬(一閃)의 파괴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로만 드미트리에게서는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 검사들은 대결 전에 어떻게 임할지에 대한 신호를 보여 주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공격을 위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공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크리스에게 선공을 내어 준 뒤에 반응을 지켜보려는 의도일 터. 적어도 현재 눈앞에 보이는 정보로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피가 말랐다.

심판이 깃발을 치켜들고, 관중들이 환호하는 일련의 상황에, 크리스의 감각이 예민하게 변했다.

마나가 들끓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해.

케빈을 단번에 베어 버린 것처럼, 시작부터 일섬을 시도해 분위기를 앗아 올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펄럭.

신호가 떨어졌다.

마나가 폭발하며, 크리스의 검이 공간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것이.

푸확.

“커억?!”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크리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대회가 마무리되었다.

충격적인 결과의 연속에, 사람들은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관련한 전설들은 모두 진실이었어. 그런 대단한 업적을 이룬 분이기에, 크리스조차도 단 일격에 쓰러트린 것이겠지.”

“……위대한 업적을 의심한 내가 참 부끄럽다. 사실 처음에는 역사책에서 영웅들의 업적을 부풀린 것처럼, 직접 보지 못했기에 과장이 섞인 일이라는 의심이 있었어.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야.”

“이번 랭킹전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각국의 실력자들이 모두 도전해 드미트리의 검사들에게 패배했고, 그중에서도 특별했던 크리스와 케빈은 감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드미트리의 시대가 열렸다는 겁니다. 매년 진행되는 이 대회가, 드미트리의 위치를 넘볼 수 없게 만들 겁니다.”

과거와는 달랐다.

한때 대륙의 양대산맥이었던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견제를 통해 다른 나라들을 찍어 눌렀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힘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의미였다.

서로의 힘을 경험하고도 도전하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고개를 숙이고 드미트리의 체계를 따르라고 말했다.

세상이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처럼, 통합 랭킹전이 끝난 이후에 드미트리를 향한 여론은 더욱 공고해졌다.

며칠 뒤.

크리스도 일어났다.

케빈은 이미 퇴원한 상태였고, 병상에 홀로 남은 크리스는 조나단 기사단장의 방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후.

대결을 되새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크리스는 얻은 것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다.

감히 가늠할 수 없었던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직접 경험하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크리스는 전율이 일었다.

이것이었다.

이토록 강력한 존재가 자신의 목표이며, 앞으로도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꿈을 이룰 확률은 매우 희박해진 기분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을 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리스는 만족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도 자신에게 도전했던 케빈처럼.

자신 또한 무모하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통합 랭킹!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대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통치하는 체계를 받아들였고, 과거의 순간들을 지나간 일로 흘려보냈다.

또다시 한 달.

사람들이 일상에 빠져들 무렵, 드미트리에 한 통의 연락이 도착했다.

* * *

수신자는 드미트리 통신부.

발신자는 오델리아 특수 정보부였다.

특명(特命)을 받아 움직이는 그들이, 마침내 기다렸던 소식을 전달했다.

[마계의 통로를 찾았습니다!]

마계.

그것은 간신히 찾은 평화를 어그러트릴, 절대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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