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8화 (438/615)

438화 통합 랭킹 (5)

타닥, 타닥.

피부가 타들어 갔다.

8서클의 마법은 경기장을 불구덩이로 만들었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는 몸을 완전히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헬파이어에 그대로 노출되었다면 귀혼마공의 재생력으로도 버티지 못했겠지만, 케빈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아니.

이것마저도 케빈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드미트리의 다른 누군가였다면, 열기에 녹아내리는 피부를 확인하고는 항복을 외쳤을 것이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 드미트리는 이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웃었다.

사람들은 불에 타는 통증이야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하건만, 케빈의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 한 번에 스스로의 팔을 잘랐던 사람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을 무너트리지 못했고, 오히려 좌중을 압도하는 의지를 보였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오며, 케빈이 검을 늘어트린 채로 일그러진 악귀의 웃음을 보였다.

“다시 갑니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에드윈 헥토르가 한 발 물러나며 마나를 끌어올리는 모습에, 케빈의 감각이 미칠 듯이 확장되었다.

통제(統制)의 영역.

귀혼마공을 극성으로 발현했다.

머릿속이 악마의 속삭임으로 물들었고, 케빈의 움직임은 이전보다도 빨라졌다.

하지만.

“파이어 스톰(Fire Storm).”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에드윈 헥토르도 물러나지 않았다.

패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케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헥토르 왕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했기에, 화염의 폭풍을 일으킨 그가 의지를 발현해 폭풍의 방향을 움직였다.

케빈이 움직이는 곳마다 화염이 들이닥쳤다.

버닝의 효과로 마법의 위력은 향상되었으나, 연달아 사용하는 마법으로 인해 마력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공격이 빗나갔다.

계속해서 화염이 폭발하는데도,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내는 케빈의 움직임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러고는.

번뜩.

순식간에 코앞에 도달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반격함과 동시에 블링크를 사용했고, 세상이 다시 재구성되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케빈이 따라붙은 상태였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이전에도 케빈의 움직임은 정말 빨랐는데, 귀혼마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블링크를 사용한 당사자와 동일하게 도달하는 수준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의 폭발.

명백하게 자신의 머리를 노리는 공격에, 에드윈 헥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블링크.”

번뜩.

다시 한번.

10cm 거리로 이동했다.

케빈이 곧바로 바로 옆 공간을 베어 버리자, 에드윈 헥토르의 몸이 재구성되기 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블링크, 블링크.”

예측 마법이었다.

케빈이 따라붙을 것을 예상해 블링크를 연달아 사용, 감각이 완전히 완성되기도 전에 자신의 몸을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덕분에 케빈의 공격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마치 환영이 나누어지듯 수많은 에드윈 헥토르가 생겨났고,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에드윈 헥토르는 도망만 치지 않았다.

번뜩.

“익스플로전.”

화르르르르르르륵.

찰나의 순간.

케빈의 바로 옆에 나타난 에드윈 헥토르가, 완전히 활짝 열린 상단전을 활성화시켜 화염 마법을 발현했다.

가까운 거리만큼 그 파괴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들이닥치는 화염에 케빈은 빠르게 오라로 몸을 보호했으나, 순식간에 주변 공간이 모두 화염으로 물들었다.

접전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마법사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마법사 그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확.

화르르르르르르륵.

화염이 휘몰아쳤다.

그곳을 뚫고 나타난 케빈은, 오라로 몸을 보호해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나머지는 귀혼마공의 재생력에 맡겼다.

사람들은 말했다. 근접 전투에서 오라 검사와 마법사는 천적이라고.

상단전의 발달로 마법사들의 단점은 일부분 해결되었지만, 단순히 두 직군의 관계를 떠나서 케빈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법사들이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강력한 신체 능력.

예민한 감각.

그리고 괴물 같은 재생 능력.

천적(天敵)이었다.

끝까지 따라붙어 공격해 오는 케빈의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승부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력을 발현해, 마지막으로 헬파이어로 정면 승부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번뜩.

“……?!”

분명히 사정거리 밖이었다.

확신을 지니고 마법을 사용하려는 그때, 에드윈 헥토르는 가슴팍을 물들이는 고통을 느꼈다.

피가 튀었다.

비틀거렸다.

그제야 알았다.

방금의 일격.

자신도 한 방을 숨겨 놓았듯, 케빈 또한 마지막 한 방을 숨겨 놓았다는 사실을.

* * *

“쿨럭.”

무릎을 꿇었다.

피를 한 움큼이나 뱉어 냈다.

속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는 창백한 얼굴로 케빈의 모습을 보았다.

‘겨우 몇 년 만에 이렇게 발전하다니.’

에드윈 헥토르와 케빈.

전장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남부 전선에서 둘은 적으로 만났고, 직접적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이만한 존재감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그것이 케빈에 대한 기억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케빈이 드미트리의 악마로서 명성을 떨쳤다고는 하나, 그래도 에드윈 헥토르는 직접 경험했던 순간들을 분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드미트리의 저력이었다.

우승을 꿈꾸었던 자신이 케빈에게 무릎을 꿇은 순간,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대한 나라인지를 깨달았다.

‘이번 대회가 마무리되면 모두가 알게 되겠지. 어떤 이들은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한 명의 힘으로 제국을 일구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나와 같은 참가자들이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참가자들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 드미트리의 위상은 위대해질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었다.

힘겨운 얼굴로 물었다.

“방금의 일격. 이번 대회를 위해 준비한 건가.”

케빈.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저돌적인 스타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파악했으나, 공간을 파고드는 쾌검은 들은 바가 없었다.

케빈이 다가왔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벅벅 닦아 내며,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목에 겨누었다.

“그만 끝내시죠.”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이.

케빈은 담담한 얼굴로 내려보았다.

에드윈 헥토르가 피식 웃었다.

끝났다.

이 괴물이 자신을 압도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2라운드.

모두가 예상한 결과였으나, 그 내용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 * *

방금의 경기.

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각국을 대표하는 존재들은 충격적인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군요.”

“드미트리의 악귀가 이 정도로 강하다니. 우리가 대체 무엇을 계획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크로노스의 수뇌부.

벨라트로 백작이었다.

멘데스를 내세워 우승을 희망했으나, 막상 확인한 진실은 자신의 꿈이 얼마나 허무맹랑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벨라트로 백작이 말했다.

“드미트리는 이미 타국이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軍事力)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크로노스가 내세웠던 유력한 우승 후보는 크리스의 상대가 되질 않았고, 발할라의 검사는 에드윈 헥토르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저 무대를 보십시오. 드미트리의 악귀가 보여 준 저 모습을. 전장에서 저런 괴물을 만난다면, 우리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압도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아니고.

겨우 그 밑에 있는 검사 따위에게.

벨라트로 백작은 심장을 물들이는 공포감에,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앞으로 드미트리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대륙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갖춘 힘과 권력이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달라진 현실에 순응해야만 합니다. 헥토르 왕국 또한 에드윈 헥토르 왕자가 개인의 강력한 무력을 증명했기에, 그들을 예전처럼 일개 왕국으로 대했다간 우리는 권력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

발할라의 수뇌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했다.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두 제국의 시대가 저물어가며, 드미트리와 헥토르 같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

에드윈 헥토르.

역사를 장식할 새로운 영웅들이었다.

그들이 끌고 갈 미래를 떠올리자, 벨라트로 백작은 오늘따라 술에 취하고 싶었다.

이번 대회는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였기에, 오히려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무대가 되었다.

그렇게.

2라운드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확신했다.

크리스와 케빈.

둘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에드윈 헥토르가 무너지면서, 더는 그들을 상대할 존재는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3라운드 크리스, 케빈 승리.

4라운드 크리스, 케빈 승리.

접전조차 없었다.

압도적인 역량으로 상대를 무너트린 두 존재의 행보에, 사람들은 단 하나의 관심사에 집중했다.

결승전!

며칠 뒤.

모두가 기다리던 그 순간이 다가왔다.

* * *

이변은 없었다.

크리스와 케빈은 결승전에 이름을 올렸다.

마침내 두 존재가 격돌하는 상황에,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누가 승리할까?”

“난 크리스.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나기 이전부터 드미트리의 천재 검사라고 불릴 정도로 근본이 있는 인물이야.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왔던 만큼, 드미트리에서 그의 위치가 실력을 증명한다고 생각해.”

“난 반대. 다들 에드윈 헥토르 왕자와의 대결을 봤잖아. 에드윈 헥토르는 분명히 우승 후보에 어울리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케빈은 마치 맹수처럼 상대를 물어뜯어 버렸어. 그 칼날이 크리스를 향한다고 생각해 봐. 과연 크리스라고 해도 무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이번 대회에서, 케빈이 크리스를 쓰러트리고 서열이 정리될 것이라고 확신해.”

난리였다.

각각 보여 준 모습이 워낙 대단하기에, 여론은 반반으로 나뉘어 우승자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결승전 당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상석에는, 이번 자리를 빛내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가 참석했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께서는 누가 우승할 것 같으십니까?”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가볍게 묻는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가 웃음을 보였다

“글쎄. 누가 우승하든 그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통합 랭킹전을 개최한 목적을 이루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강자들이 드미트리의 검사들을 상대로 차례로 무너지며, 우리는 그 어떠한 공포정치를 펼치지 않고도 각국의 수뇌부들을 압도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만약 우승자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황제 폐하에게 도전할 것입니다. 케빈과 크리스, 둘 중 한 사람의 도전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끝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주제가 생겨났다.

바로 우승자의 권한.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전하는 그 기회에, 사람들은 혹시라도 이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떠들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위대한 업적은 시간이 갈수록 희석되는 법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을 실제로 확인한 사람들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 소문으로만 들었던 사람들.

황제의 자리에 올라 싸울 기회가 적어진 만큼, 몇몇 부류들은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보였다.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일부 과장될 수는 있지 않은가.

혹시.

만약.

어쩌면.

도전자가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면 어떻게 될까.

전장에서 전설을 목격했던 사람들이야 기겁할 말이었지만, 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無知)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상식 밖의 진실을 듣는 것만으로 받아들여야 했기에.

그들은 전설을 직접 확인하는 유일한 기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할 정도로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공포 정치를 행하지 않고도 각국에 명확한 서열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 대륙을 정벌할 수 있었는지를 매년 뼛속에 각인시켜 주기 위해. 조나단 기사단장. 크리스와 케빈. 그 누가 나를 상대로 무대에 올라오든, 나는 그들을 그간의 관계를 배제한 도전자로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우승자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번 대회.

황제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목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의 청을 받아들였다.

의도적이었다.

충분히 필요하다는 판단에, 로만 드미트리는 도전의 무대를 만들었다.

매년 반복되는 대회.

매년 탄생하는 우승자.

그리고 우승자와의 대결.

일련의 과정이 황제로서의 위상을 높인다는 확신에, 조나단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분이야말로 대륙 역사에 남을 드미트리 제국의 초대 황제다. 대륙을 들썩이던 모든 축제가 마무리되고 나면. 철옹성(鐵甕城) 같은 드미트리의 권력은, 대륙 전체를 발아래 두겠지.’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참가자들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선수들 위치로.”

때가 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케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경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뛰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들.

그 중심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검은, 하늘과도 같은 주군이 직접 만들어 준 명검이었다.

패배할 수 없었다.

패배할 생각도 없었다.

케빈이 마침내 무대에 오르자, 자신에게 무려 2번의 패배를 안겨 주었던 필생(畢生)의 경쟁자가 보였다.

‘크리스.’

드디어.

스스로를 증명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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