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2화 (432/615)

432화 예술의 경지 (2)

카앙!

경쾌한 소리였다.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강철을 내리칠 때마다, 발렌티노 후작은 움찔거리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야말로 대륙 제일의 장인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발렌티노 후작이었지만, 그조차도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세간에 떠돌던 말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불길을 다스렸다.

온몸을 불태우며 넘실거리는 화염을 보고 있자니,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랜 옛날. 영웅들의 무기를 만들었다던 전설의 대장장이에 관련한 기록이 있었지. 그는 엄청난 거구에 괴력의 소유자였으며, 강철을 두드릴 때마다 화염으로 뒤덮일 정도로 불을 다스리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였어. 나는 그게 옛날 사람들 특유의 허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가 아닌데도 정말 불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지금 전설을 재현하고 있어!’

저 광경을 보라.

타오르는 불길.

일정한 간격의 망치질.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발렌티노 후작은 워프 게이트의 우선순위를 위해 500골드를 지출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바라보자 그따위 지출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문득 처음 블레이즈를 확인했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그때는 세상에 이런 검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것은 앞으로의 전설을 써 내려갈 로만 드미트리의 시험작에 불과했다.

“아아.”

감탄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잊었다.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들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공간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시간의 개념조차도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인파를 뚫고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후작님!”

발렌티노의 기사였다.

웬만해서는 끝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발렌티노 후작의 감상을 방해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조금 있으면 상단의 일로 선약이 있으십니다. 지금도 시간이 많이 촉박한 상황이라, 얼른 이동하지 않으면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만 합니다. 발렌티노 후작님, 후작님!”

재차 불렀다.

아무리 말해도 돌아보지 않던 발렌티노 후작이, 한 여덟 번쯤 불렀을 때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위약금 내.”

“……예?”

“위약금 전부 지급하라고. 발렌티노 상단과의 계약서에는 항상 특약(特約)이 있지. 내가 만약 인생을 걸 만큼의 예술 작품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단 한 번은 계약을 미루는 걸 양해해 주겠다고. 수십 년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것을 사용해야겠어.”

“그렇다면 위약금을 지급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내 선물이야. 케케묵은 특약을 이해해 준 사람들에게,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양해해 달라는 선물.”

확실했다.

발렌티노는 미쳤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 함은, 상단 일을 잠시 미루고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발렌티노 후작은 황홀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에 빠져들었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

감탄한 것은 발렌티노 후작만이 아니었다.

대장장이들을 이끌고 명당을 차지한 헨드릭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쿵쾅거리는 심정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대단해.’

오래전.

헨드릭은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명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대장장이의 모습을 보여 주던 로만 드미트리.

그날 이후로 로만 드미트리를 완전히 인정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때의 기억이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그리고.

꿈이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헨드릭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작업을 확인했을 때는, 넘실거리는 화염에 시선이 끌려 작업 과정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었지. 그런데 이 정도였다니. 불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것도 대단하지만, 평생을 대장간에서 살아온 내 눈에 황제 폐하의 작업은 조금의 거슬리는 부분도 없어.’

경악스러웠다.

헨드릭이 누구인가.

마스터 블랙스미스.

대장간 기술로 명성을 떨친 드미트리의 마스터인데, 그가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기술은 완벽했다.

정확히는 기본기가 탄탄했다.

일정한 흐름에 따라 내리치는 망치질과 빨갛게 달아오른 강철을 다루는 능력.

공간을 집어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화염은 단순히 퍼포먼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필요한 만큼의 열기를 강철에 부여했다.

눈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이야 진즉에 인정했지만, 세세하게 분석해서 보니 기본기가 상상 이상으로 탄탄했다.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전생.

천마 백중혁이 한 자루의 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대단한 장인들의 가르침을 받아왔는지를.

처음에는 그 또한 조잡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실력이 향상되었고, 천마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가르침을 요청하는 그를 거절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의 대장간 기술은 중원 무림의 집약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중원 무림의 대장간 기술이, 로만 드미트리의 손끝에서 발현되었다.

카앙!

불꽃이 튀었다.

전생과 현생.

기술이 조화를 이루었다.

불길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작업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헨드릭은 고개를 돌려 휘하 대장장이들을 보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저것이 바로 너희가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이다. 만약 너희가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해 황제 폐하의 발끝에라도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내 뒤를 이을 새로운 마스터 블랙스미스가 될 것이다.”

극찬이었다.

화들짝 놀라는 대장장이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작업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앞으로 하루에 1시간. 평소 작업하던 시간에서 1시간을 제외해, 모든 대장장이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작업을 지켜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값진 수업일 테니, 이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대장장이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날.

날이 저물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발렌티노 후작과 대장장이들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하루, 이틀…… 열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과하게 몰려들었으나, 신기한 것도 계속 지켜보면 무뎌질 수밖에 없기에 시간이 갈수록 일반인들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아직도 찾아오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첫날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고, 그 와중에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 무리.

헨드릭과 대장장이들이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지켜보겠다고 생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헨드릭의 명령처럼 하루에 1시간 정도 로테이션으로 자리를 지켰다.

어떤 이는 지켜보는 내내 넋을 잃은 반응을 보였고, 어떤 이는 열심히 기록했으며, 어떤 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동작을 따라 하며 몸으로 익혔다.

사실 그들의 모습은 이해가 되었다.

대장간 일을 업으로 삼을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은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두 번째 무리였다.

어느새 햇볕을 가릴 천막과 의자를 갖다 놓은 발렌티노 후작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벌써 열흘째 로만 드미트리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헨드릭과 대장장이들은 그래도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발렌티노 후작은, 단 한 번도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었다.

생리현상과 음식을 먹는 등, 기본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방법은 간단했다.

“천막을 가려라.”

“예.”

촤르르르륵.

발렌티노 후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하인들이 천막의 입구를 가렸다.

간단하게 천으로 시야를 가리는 정도였고, 발렌티노 후작은 넓지 않은 그 공간에서 체면 따위는 버리고 생리현상을 해결했다.

그것은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하인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대령하면, 발렌티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음식을 먹었다.

황당한 것은.

기름진 음식은 생리현상을 부추기기에,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시간조차 단축하기 위해 최대한 속이 편한 음식으로 먹었다.

이에 대해 하인들은 딱히 불만이 없었다.

발렌티노 후작은 정말 독특한 인물이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확실하게 보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열흘이 흐르면서 상단의 문제들이 쌓여 가며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발렌티노 후작은 천막 안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그건 예정대로 진행해.”

“프랑크 상단에 연락해. 물량을 모두 매입하겠다고. 발렌티노 상단이라면, 다 감당할 수 있잖아.”

“빌어먹을. 주변 상단들에 요청해서, 최대한 인력을 모두 끌어와.”

바빴다.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을 힐끗힐끗 확인하면서도, 발렌티노 후작은 정말 중요한 일 처리는 본인이 직업 해결했다.

물론 그것은 하루에 1시간도 되지 않았다.

정말 축약해서 자신의 결재가 반드시 필요한 일들만 처리할 뿐, 대부분은 평소에 믿고 맡기는 인물들이 모두 처리했다.

그야말로 광기(狂氣)였다.

역시 탐욕의 수집가라며 감탄하는 사람들도, 저러니까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면서 혀를 찰 정도였다.

밤낮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관심도 점점 옅어져 갔다.

언뜻 들려오는 소문에, 발렌티노 후작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 * *

공방 안과 밖.

완전히 분리되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로만 드미트리는 밤낮이 수도 없이 바뀌는 동안 작업에만 몰두했다.

카앙!

화르르르르르르륵.

화염이 폭발했다.

멸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마다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미 수천 번 진행된 작업에 불길의 세기는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강철을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눈빛이 열망으로 들끓었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가슴 속에는 강한 확신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내 인생 최고의 역작(力作)이 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 방식은 독특했다.

전생의 삶에서 비롯된 것인데, 항상 현재 수준에 맞추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검에 녹여 냈다.

삼류 무인일 때는 삼류의 검을.

이류 무인일 때는 이류의 검을.

일류 무인일 때는 일류의 검을 만들었다.

그만큼 경지가 상승할 때마다 검을 만드는 완성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작업은 전생의 기준을 완전히 벗어났다.

단순히 현재의 수준이 검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앞두었을 때 만들었던 검이 제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화마의 불길이 넘실거리며 전혀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천의 경지에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생의 기술, 현생의 기술, 그간의 경험과 알렉산드르와의 전투 모두를 천의 경지가 단번에 아울렀다.

카앙!

카앙, 카앙!

망치질이 거세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을 만들기 위한 고뇌는 확신으로 변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눈앞의 순간에 빠져들었다.

희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발악에 불과했던 것이,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삶의 또 다른 희열을 주는 요소로 발전했다.

카앙!

끊이지 않는 망치질.

넘실거리는 불길.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작업 날을 기준으로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 * *

새벽이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을 고요한 시간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완성했다.’

이 안에.

전생과 현생의 삶을 담았다.

단언컨대, 두 삶을 통틀어 이보다 뛰어난 검은 존재하지 않았다.

‘네 이름은 스피릿(spirit)이다.’

혼을 담았기에.

이름을 그리 명명했다.

작업을 모두 끝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한산한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이 그를 반겼다.

“……화, 황제 폐하. 작업을 끝내신 겁니까?”

밖은 제법 추웠다.

모포를 온몸에 두르고, 벌벌 떨면서도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눈을 빛내는 인물.

바로 발렌티노 후작이었다.

상당히 꾀죄죄한 몰골에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발렌티노 후작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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