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드미트리 쟁탈전 (5)
사실 로렌 드미트리의 공략은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때는 수개월 전.
문제의 시발점은 한 교수였다.
헨리 앨버트와 같은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소속으로, 학생들의 교양을 도맡은 브래들리 교수가 어느 날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였다.
“헨리 교수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와 정말 알고 지내는 사이가 맞습니까? 아니, 남부 전선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교수님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 같은데, 이곳 왕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직접적인 교류를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교수님이 경험했던 일들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 현장에 있었던 일원 중 한 명이지 않은가 싶어서 말하는 겁니다.”
브래들리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남부 전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는 헨리 앨버트의 모습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실제로도 의문스러운 점은 많았다.
카이로 왕실과의 통신을 직접 맡았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이었다면, 전쟁이 끝나고도 드미트리 가문과 교류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한 번 수상하다고 생각하니,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 번의 의문 제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헨리 앨버트로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의심하는 상황을 그냥 넘겨 버릴 수 없었다.
‘만약 브래들리 교수로 인해서 내 밑천이 드러난다면. 빠르게 이 자리에 오른 만큼,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브래들리 교수의 말.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실제로 헨리 앨버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고, 드미트리 가문에 이 사실을 묻는다면 교수로서의 권위는 단번에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사실 그렇다고 그동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분명히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조금 부풀렸을 뿐이지, 남부 전선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떠나, 진실이 밝혀진다면 문제가 될 것은 분명했다.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의구심을 떨쳐 내고 이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자신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다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브래들리 교수가 나를 의심하는 이유는 드미트리와 생사의 고비를 넘겨 놓고, 그들과 아무런 교류도 없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만약 내가 현재 대세인 드미트리 가문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진실이 어찌 되었든 굳이 나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겠지.’
그때만 해도 드미트리는 제국의 위치가 아니었다.
아직은 대륙의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헨리 앨버트의 생각처럼 드미트리가 새로운 판도를 주도하는 대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카이로에서 드미트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카이로 국왕이 드미트리를 적극적으로 따르기에, 이번 기회에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은 간단해.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단순히 남부 전선에서 있었던 한순간의 인연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헨리 앨버트라는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면 돼.’
결론은 바로.
결혼을 통한 사돈의 연이었다.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헨리 앨버트의 수업이 진행되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헨리 앨버트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었다.
‘절대 내 의도를 들켜서는 안 돼. 앨버트 가문의 이름으로 정략결혼을 들이밀었다간, 현재 드미트리 가문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퇴짜를 맞을 것이 분명해. 앨버트와 드미트리의 결합을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남녀가 서로의 감정을 강력하게 주장해야만, 실질적인 이득을 떠나서 앨버트 가문과의 결합을 진지하게 고민하려 하겠지.’
막말로.
급이 맞질 않았다.
카이로에서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앨버트 가문과는 달리, 드미트리는 혼인 의사만 밝힌다면 각국의 실세들이 달려들 가문이지 않은가.
정략결혼을 들이미는 것은 정말 멍청한 행동이었다.
스스로의 위치를 알기에, 헨리 앨버트는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번 문제에 접근했다.
학생들이 모두 자리했다.
로렌 드미트리의 모습을 슬쩍 확인한 헨리 앨버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수업을 진행했다.
“지금부터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수업의 주제.
영웅의 자질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분석한 글이 유행하면서, 그와 관련한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특별한 상황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부 전선의 전쟁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영웅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사실 진정한 시작점은 그 이전의 삶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바로 블러드 팽 사건. 사람들은 굳이 그들을 건드려 피해를 감당할 필요가 있냐고 말할 때,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하게 그들의 본진을 공격해 단번에 일망타진했습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문제, 하지만 대응이 달랐던 겁니다. 그렇게 영웅이란…….”
수업은 전지적 로만 드미트리 시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가 살아온 삶을 다루며,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살렸다.
어느새.
수업은 막바지에 도달했다.
준비한 수업을 모두 끝낸 헨리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추가로 조별 과제가 있습니다. 오늘 수업한 내용을 바탕으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영웅의 삶을 살아온 역사적인 인물들을 조사하시면 됩니다. 누구나 아는 인물이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럼 각 조를 발표하겠습니다. A조는…… 로렌 드미트리, 엠마 아이리스까지가 F조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싱긋, 웃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로렌 드미트리와 같이 F조에 포함된 엠마 아이리스.
그녀는 헨리 앨버트와 사촌 관계에 있는, 평소에도 그가 매우 아끼던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었다.
* * *
헨리 앨버트와 로렌 드미트리.
둘은 제법 친한 사이였다.
헨리 앨버트가 로렌 드미트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수업 외적으로도 종종 만날 만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둘이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때마침 로렌 드미트리가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보였기에,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저녁 약속을 잡았다.
“매번 감사해요. 교수님 덕분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나로서는 정말 기쁜 일이지, 하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로렌 드미트리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준다는 사실에, 헨리 앨버트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모종의 계획을 떠나.
로렌 드미트리는 정말 예쁜 아이였다.
올바른 가치관에 평소 행실도 바르기에, 사실 그가 드미트리 가문의 삼남이 아니었어도 진지하게 정략결혼을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드미트리라는 이름값이 발목을 붙잡았다.
앨버트 가문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이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가는 레스토랑의 음식 실력은 내가 자부하지. 최근 카이로에서 음식 맛으로 상당한 명성을 떨치는 곳이니까, 네가 먹고 싶은 것들 전부 다 시켜.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
수업을 진행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과 사가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교수로서는 최대한 진중한 모습을 추구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도 수업 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 더 본인다운 모습이었다.
헨리 앨버트는 조금은 철없고 헤픈 사람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휩쓸리며 공적으로 살아가는 법도 터득해 갔다.
이윽고.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예약된 자리로 이동했고, 종업원의 추천에 따라 셰프 특별 코스로 주문했다.
그리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그때, 옆을 지나가던 한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헨리 오빠?!”
“엘레나?”
정말 우연히 만난 듯한.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된 만남이었다.
헨리 앨버트의 외삼촌인 베일 자작의 딸 엘레나는, 싱긋 웃음을 보이며 계획된 멘트를 내뱉었다.
“……이분은?”
“아, 내가 가르치는 제자야. 로렌 드미트리라고, 네가 아는 그 드미트리 가문의 삼남이 맞아. 그리고 이쪽은 엘레나 프랑크. 프랑크 왕국과 이름은 똑같지만, 내 외삼촌의 가문이지.”
처음에는 가벼운 자기소개.
그리고 자연스러운 합석.
그렇게 엘레나 프랑크와 로렌 드미트리는, 흐뭇한 헨리 앨버트의 시선을 받으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 * *
헨리 앨버트의 계획은 장기전이었다.
섣부르게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고, 매번 다른 여성을 새로운 환경에서 소개해 주는 자리를 만들었다.
의도적이었다.
헨리 앨버트라 할지라도 로렌 드미트리의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한 번쯤은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도 없이 떡밥을 던졌다.
하지만 아직도 성과는 없었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상황에, 헨리 앨버트로서도 스멀스멀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교수의 직권을 남용했다.
개인 상담 명목으로 로렌 드미트리를 불러들였고, 최근에 고민거리가 없는지를 물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야. 교수가 제자의 고민거리를 알아보겠다는데,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의도는 적중했다.
로렌 드미트리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말했다.
“……흐으. 사실 최근에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분들이 많아서 고민이에요. 드미트리의 상황이 변하면서 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알겠는데, 대놓고 정략결혼 목적이다 보니 조금 껄끄러워요.”
헨리 앨버트의 눈빛이 변했다.
감히 자신 말고 로렌 드미트리를 넘보는 이들이 있다니.
헨리 앨버트가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로렌. 네 말처럼 드미트리는 제국이 되었고, 너에 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어. 그것이 로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되어 버린 거지.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그들의 의도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렇게 접근해 온 사람 중에 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는 선을 그을 자격과 힘이 있어. 절대, 절대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도전부 받아 주는 것은 반대야.”
마음의 문을 완벽히 닫는 것은 막아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귀족 사회에서 네 나이는 슬슬 결혼을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은 맞아.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접근해 오는 사람들보다는 일단 네 주변을 둘러봐. 사실 너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할 뿐, 이미 네가 이성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적절하게 선을 유지했다.
진심으로 로렌 드미트리의 고민을 상담해 주면서도, 자신의 계획을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수준으로.
로렌 드미트리가 한결 가벼운 표정을 보였다.
고민이 해결된 모양이었다.
“매번 감사해요. 교수님의 말씀처럼, 제 생각을 제한하지 않고 감정에 솔직해져 볼게요.”
“그래.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아, 죄송해요. 정말 같이 먹고 싶은데,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선약을 잡았어요.”
촉이 왔다.
헨리 앨버트가 물었다.
“선약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누구랑 만나는 건데?”
“에이미요! 최근에 도움도 받고 해서, 제가 먼저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거든요.”
순간.
헨리 앨버트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에이미가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로렌 드미트리를 만나게 만든 8번째 사촌 여동생인데, 정말 예쁘고 순한 데다 마음씨까지 고운 아이라서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에이미와의 개인적인 약속을 잡았다니.
정말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싱긋, 웃었다.
“그래, 좋은 시간 보내렴.”
들뜬 음성을 꾹꾹 억눌렀다.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르다는 사실을, 헨리 앨버트는 모르지 않았다.
* * *
행복한 나날이었다.
헨리 앨버트는 교수로서의 미래가 탄탄대로인 데다, 로렌 드미트리와 에이미가 종종 만난다는 소식에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러다 정말 사돈의 연을 맺는다면.
드미트리를 등에 업은 자신을 적대할 사람은, 카이로를 넘어서 샐러맨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삶에는 굴곡이 있는 법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무실로 이동하는데, 도중에 만난 브래들리 교수가 음흉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헨리 교수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드미트리와 카이로의 문화 교류를 위해, 드미트리의 섬광 크리스가 직접 아카데미를 방문한답니다. 전장에서 크리스 기사님과 직접 생사의 고비를 넘었던 헨리 교수님이라면, 당연히 그분을 저희에게 소개해 주실 수 있겠죠? 물론 부담스럽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끝나고 간단하게 통성명 정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브래들리 교수의 의도를 알기에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번 만남을 피해 버린다면, 브래들리 교수는 확신을 지니고 날 신랄하게 비난하려 들겠지.’
그래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당연합니다. 브래들리 교수님 말처럼 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겼는데, 통성명이 뭐 대수겠습니까.”
어색하게 웃었다.
크리스 방문까지 D-3일.
탄탄대로였던 인생에 찾아온 최대의 고비에, 헨리 앨버트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