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드미트리 쟁탈전 (4)
아레스의 배신.
치명적이었다.
성문이 무너지고 밀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화염 속에서 적들을 맞닥트렸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적들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로드웰 드미트리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팟.
화르르르륵.
머리를 날렸다.
화염이 퍼져 나가며 주변 일대를 쓸어 버렸으나, 곧바로 공간을 메우는 적들의 모습에 숨을 돌릴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매번 로만 드미트리 개인의 능력으로 이겨 냈던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이번만큼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버텨야 한다.
시간을 끌면 루나 왕국이 도착할 터.
로드웰 드미트리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화염이, 그대로 달려드는 병사들을 단번에 쓸어 버렸다.
화르르르르르륵.
난전(亂戰)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잊었다.
본능적으로 베고 피하고,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서 무지막지하게 날뛰었다.
크로노스 제국 병사들의 눈빛에 공포가 어렸다.
그들은 억지로 내몰렸기에 공격하고 있었지만, 로드웰 드미트리는 이미 그들에게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때였다.
로드웰 드미트리의 예민한 감각에, 정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웰 드미트리를 도와라! 성문이 무너지면 끝이다! 1조는 나를 따라, 지원 사격에 집중한다!”
콰앙!
화르르르르륵.
마법이 작렬했다.
고개를 홱 돌려 성벽 위를 확인해 보니, 좌측 성벽에 있었던 플로라 로렌스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상부에 보고해 그녀가 움직인 것이다.
좌측 성벽의 수비 체계를 다잡은 이후, 일단 성문이 뚫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다.
사전에 얘기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크로노스의 기사가 로드웰 드미트리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성벽 위에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퍽.
화살이 미간을 관통했다.
플로라 로렌스였다.
그녀가 로드웰 드미트리의 모습을 주시하며,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주변 상황을 빠르게 대응했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혼잡하게 뒤얽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상황을 알아주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눈앞의 현실에 집중할 차례였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고, 피와 화염으로 휘몰아치는 공간에서 악착같이 발악했다.
결국.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승리의 대가로, 중상을 입은 로드웰 드미트리는 곧바로 병상으로 옮겨졌다.
* * *
영광스러운 승리에는 이면(裏面)이 존재했다.
로드웰 드미트리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병상으로 옮겨졌고, 그 숫자는 건물 여러 채를 전부 채우고도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그때만 해도 로드웰 드미트리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본인의 한계를 끌어올리면서 싸우다 보니, 전신에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생명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겨우 정신을 차린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했다.
‘……참 못난 아들이구나.’
서부 전선.
그곳에서 눈을 잃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더 강해져서 이와 같은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마음 같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상대하는 적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로만 드미트리처럼 강하지 못한 그로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고 약속할 수 없기에, 어머니의 슬픔을 받아 주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동안.
로드웰 드미트리는 이상한 말들을 들었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올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존재가 있었다.
첫 번째는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로드웰 도련님.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플로라 로렌스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서 적절하게 지원하지 않았다면, 도련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번처럼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알았다.
플로라 로렌스가 자신을 지원하기 위해, 지휘관들에게 연락해 지원 의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것을 말이다.
결과론적으로 그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좌측 성벽의 수비 체계를 확실하게 다잡고 성문을 지원했기에, 드미트리 성벽은 아레스라는 변수를 겪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아버지인 로메로 드미트리였다.
“로렌스 가문에서 네 치료를 위해 여러 가지 약재를 보내왔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지. 듣기로는 플로라 로렌스가 직접 돌아다니며 어렵게 구했다던데,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거라.”
그때까지는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상처 부위를 확인하러 온 치료사의 말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공통점을 깨달았다.
“오늘은 플로라 님이 없으시네요? 그동안 플로라 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매일같이 찾아오셔서 상처 부위를 확인하시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얼마나 들들 볶던지.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회복하실 수 있었어요. 참, 플로라 님은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얼마나 예쁜지, 치료사들을 위해 종종 먹거리를 챙겨 오시기도 했고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주변에는 플로라 로렌스가 있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플로라 로렌스는 엄연히 로만 드미트리의 결혼 상대였다.
파혼해서 그 관계가 어그러졌다고 해서, 귀족 사회에서 그 사실을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관계.
로드웰 드미트리와 플로라 로렌스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리한나 드미트리가 혼인을 언급했을 때.
정말 당혹스럽게도, 로드웰 드미트리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플로라 로렌스였다.
* * *
사람의 마음은 계기가 필요하다.
플로라 로렌스를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로드웰 드미트리는 크나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나는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가졌다.’
파혼(破婚).
귀족 사회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꼬리표에, 파혼 상대가 하필이면 자신의 형이자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인 로만 드미트리였다.
플로라 로렌스와의 관계는 미래가 뻔히 보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며, 어쩌면 파혼의 이유조차 의심하는 부도덕한 이야기가 나돌지도 몰랐다.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본인이었다 할지라도, 형의 파혼녀를 받아들인 동생의 이야기가 그리 달갑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을 되새겼다.
어쩌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면, 플로라 로렌스와의 관계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카이로 서부 전선에서 그녀와 같이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서는 전과를 세웠으며, 이후에도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관계를 이어 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전장에서 서로의 호흡을 맞추면서, 서로가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인정했다.
수년간 이어져 온 관계였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눈을 잃었을 때 플로라 로렌스는 그 선택을 말렸었고, 성문을 막아서다 쓰러졌을 때는 병상을 지키며 돌보아주었다.
어쩌면 파혼이라는 편견에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애써 의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정략결혼은 둘의 관계를 말했겠지만, 뒤얽혀 온 관계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는 서로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누군가와 함께라면,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신의 옆에 플로라 로렌스가 있기를 바랐다.
카이로 서부 전선에서 그랬듯.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에서도 그랬듯.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그녀가 곁에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밤새 고민했다.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을 관계이며, 당사자인 플로라 로렌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관계에, 홀로 이토록 심각해져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늦은 저녁.
로드웰 드미트리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진심을 알았다면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앞으로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형을 찾아가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한때 나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렸다. 온갖 좋지 않은 일들을 벌였지만, 새롭게 변한 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간의 편견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로드웰. 내가 좋지 못한 과거를 살았던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별명, 그리고 파혼했던 나의 과거까지도.”
로드웰을 보았다.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선택에 힘을 실었다.
“내 뜻을 묻는 것이라면, 나는 너를 믿는다. 너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행하라. 무엇을 선택하든,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로드웰 드미트리는 내 동생이다.”
그날.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신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 * *
당혹스러웠다.
플로라 로렌스를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 이름을 들으니 리한나 드미트리도 섣부르게 반응할 수 없었다.
‘설마 했는데…….’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다.
둘의 관계가 진척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로드웰 드미트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세심하게 챙겨 주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동료 이상의 감정이었다.
아마 본인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나, 심상치 않음을 3자의 시선에서는 보였다.
이해했다.
서로가 그 관계를 받아들이기에는, 복잡한 상황이 현실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한나 드미트리가 말했다.
“플로라와 혼인이라도 할 생각인 거니?”
“……제 일방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형을 찾아가 제 마음을 밝혔고, 그 이후에는 플로라 로렌스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모두가 알다시피 드미트리와 로렌스는 혼인을 언급하기에는 파혼 문제로 한번 어긋났으며, 지금으로서는 섣부르게 둘의 관계를 언급할 수 없다고요. 저도 어머니가 혼인을 말하지 않았다면 제 감정을 몰랐을 겁니다. 당장 로렌스 가문과의 혼인을 얘기하겠다는 것이 아닌, 제 감정을 확실하게 매듭지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상의 관계가 되든, 아니면 지금처럼 동료로서의 관계로 남든.”
플로라의 입장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로드웰과 플로라.
둘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지금 로드웰이 하려는 말은, 이 관계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리한나 드미트리는 빤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절해야 했다.
드미트리 제국의 위상, 사람들의 평판, 복합적인 문제를 고려했을 때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 또한 알았다.
플로라 로렌스가 전장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를, 로드웰 드미트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플로라는 리한나 드미트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반려였다.
아르카디아에서 어떤 일이 생기든, 플로라가 같이 있다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리한나 드미트리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렌스는 드미트리 제국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란다. 과거의 어떤 일이 있었든, 로렌스와 사돈의 인연을 맺는 것은 충분히 기뻐할 일이지. 하지만 로드웰. 한번 어긋났던 관계이니만큼, 로렌스만큼은 정말 신중하게 인연을 맺어야만 한다. 듣기로는 이번 아르카디아행에 플로라 로렌스도 포함되었다고 들었다. 2년. 그 안에 플로라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내게 네 결정을 말해다오. 만약 플로라와 네 뜻이 같다면 나는 기꺼이 아들의 미래를 축복해 주겠지만, 반대로 그때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내 뜻을 따라 새로운 인연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어미의 생각에 동의하니?”
한발 물러났다.
아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적어도 기회는 주고 싶었다.
파혼으로 시작되었던 로렌스와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든, 아들의 마음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 * *
그 시각.
카이로의 수도.
로드웰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로렌 드미트리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로렌 드미트리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로렌 드미트리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혼인과 관련한 이야기는 논의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입장이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로드웰 드미트리에게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두 순진하게 남들이 하는 것처럼 움직이지는 않았다.
로렌 드미트리의 혼인 문제는 졸업 전까지는 논의를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 선점하고 난 뒤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혼인하면 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중.
드미트리로 인생 역전한 사나이도 있었다.
‘만약 로렌을 우리 가문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다.’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우위를 점할 방법이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교수님,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들어오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로렌 드미트리.
그의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교수인 헨리 앨버트가 방긋 웃음을 보였다.
“우리 예쁜 로렌이 왔구나.”
직권남용(職權濫用).
헨리 앨버트는, 자신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