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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화 (413/615)

413화 크로노스의 몰락 (4)

음산한 공간이었다.

크로노스 황제 외에는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넓고 휑한 공간에 들어선 멤피스 후작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탁자 위에 잘 관리되어 있는 양피지(羊皮紙) 하나가 있었다. 사실 늘 궁금했었다.

밀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자신 정도가 전부였는데, 크로노스 황제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본능적으로 양피지를 어루만졌다.

자신을 통제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양피지 안의 내용을 찬찬히 읽었다.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의 문(門)이 열렸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가운 기운은 세상을 얼어붙게 했고, 세상에 남겨진 재앙은 영원토록 지속되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언제고 신의 뜻을 대신할 자가 나타나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놓친다면, 세상은 영원토록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신탁이었다.

멤피스 후작으로서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 아니기에, 세상에 남겨진 재앙이 알렉산드르를 뜻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의문이 들었다. 이 신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크로노스 황제는, 아니 알렉산드르는 이 내용을 수도 없이 되새기며 무엇을 이루려고 했었던 것일까.

그때였다.

파스스스.

양피지에 변화가 생겼다.

글자들이 소멸하더니, 새롭게 조합되며 이전과는 다른 내용을 드러냈다.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어둠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여. 경계하라. 준비하라. 발악하라.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에 들이닥치는 날, 인류는 유례없는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둠의 문이라니.”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둠의 문.

그 단어를 읽는 순간, 멤피스 후작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계.’

알렉산드르는 어둠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마계의 지배자를 모신다는 의미이며, 대대로 어둠의 문은 지상계와 마계의 통로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신탁의 뜻은 명백했다. 알렉산드르는 마왕을 강림시키고자 했다.

어둠의 존재들이 이 세상에 들이닥친다면, 사실상 그동안의 대립 구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간들이 모조리 죽어 나갈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는, 로만 드미트리조차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이것은 오히려 내게 기회다. 내가 알렉산드르의 흔적을 추적해서 마계의 지배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새로운 세상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알렉산드르를 받아들인 그들이라면 분명히 지상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터. 내가 제2의 알렉산드르가 될 수 있다.’

눈빛이 열망으로 일렁였다.

어차피.

벼랑 끝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숨어 지내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신탁은 분명히 피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말했다.

답답했던 속이 이제야 조금 진정되는 것만 같았다.

완전히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멤피스 후작은 예상치도 못한 돌파구를 찾았다.

하지만.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벌컥.

“멤피스 후작님! 로, 로만 드미트리가 밀실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기사의 보고.

창백한 얼굴로 말하는 기사의 모습에, 멤피스 후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

기사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어떻게든 진입하는 것을 막아 보겠다고 달려들었던 기사들은, 몇 번 공방을 주고받지도 못하고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미동도 없는 동료들의 모습에 기사들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퇴로가 없는 밀실에 갇혀 버린 형국이 되었다.

기사들 뒤로.

멤피스 후작이 벌벌 떨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불안한 눈빛을 보이던 그가, 한 존재를 발견하고는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저벅저벅.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더 멀리 갔어야지. 안 그런가, 멤피스 후작.”

로만 드미트리.

바로 그였다.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멤피스 후작은 입만 달싹일 뿐, 이 상황에 관한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끝났다.

넓디넓은 전장에서 만났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인데, 밀실엔 자신이 도망칠 공간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크로노스 황제를 모시던 최고 권력자였던 자신이, 지금은 벼랑 끝에 몰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명령을 이행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투항할 테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멤피스의 기사들.

그들이 무기를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투항을 제안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눈치를 살피더니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멤피스 후작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에, 멤피스 후작이 기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녀석들이 감히! 멤피스 가문의 은혜를 받았던 너희들이 어떻게…….”

“닥쳐!”

말을 끊었다.

기사가 고개를 홱 돌며, 모시는 사람에 대한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보였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네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너 같은 녀석을 따르다가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씨발,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막말로 우리는 정말 명령을 따른 죄밖에 없잖아.”

다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고개를 처박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가 알기로는 투항하는 자들은 살려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를 살려 주신다면, 멤피스 가문의 모든 것을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바치겠습니다.”

“버러지 같은 녀석들.”

“예……?”

순간.

당황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고개를 들자,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기회를 부여하는 존재들은 이 상황과 무관한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내몰린 자들은 기회를 부여하나, 혼자만 살아 보겠다고 밀실까지 도망친 너희들은 얘기가 다르다. 나는 변절자(變節者)를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변절에도 그 시기가 있는 법이지.”

“제, 제발 자비를…… 악!”

번뜩.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가장 앞에 있던 기사를 베어 버리자, 황급히 뒤에 있는 기사들이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 들며 반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그사이에 크리스와 케빈이 앞으로 치고 나가더니, 상대가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단번에 목을 날려 버렸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멤피스 후작만이 남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멤피스 후작의 시야에 양피지가 보였다.

“로, 로만 드미트리! 네게 거래를 제안한다!”

단검을 들었다.

갑자기 양피지를 벅벅 찢어 버렸다.

안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도록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더니,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피지 안에는 이 세상에 들이닥칠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만약 나를 살려 준다면. 내가 확인한 모든 내용을 말해 주겠다. 로만 드미트리.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이미 실체화된 위험은, 그 실체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너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단검을 치켜들며, 제발 로만 드미트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타협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곧바로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멤피스 후작을 포박하라. 멤피스 후작은 이곳이 아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통스럽게 처단할 것이다.”

* * *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비릿한 피 냄새를 밀어내자, 집에 꼭꼭 숨어 있던 크로노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병사들이 투항하면서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로만 드미트리는 광장에서 종전(終戰)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겠다고 말했다.

크로노스의 광장.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공간에는, 멤피스 후작과 같은 크로노스의 수뇌부들이 처형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크로노스는 패배했다.

난생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이었고, 이윽고 로만 드미트리가 인파를 뚫고 나타나더니 처형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보였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하고자 한다. 크로노스 제국은 그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 크로노스 황제, 알렉산드르와 같은 인물들의 욕망이 대륙을 어둠으로 물들였고, 그동안 너희가 누려 왔던 부귀영화는 다른 나라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졌다. 나는 지금부터 그 근간을 바꿀 것이다. 크로노스는 더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선포였다.

설득이 아닌 강제적인 명령.

사람들이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전쟁에서 패배했기에 현실이 변화하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변화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앞으로 내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명확한 법도를 따른다. 너희가 크로노스의 출신이라고 해서 배척하지 않을 것이며, 사사로운 감정이 법도 위에 존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위반할 수 없는 체계다. 설령 나조차도 법도를 어길 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생겨날 변화의 흐름에,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했다.

“만약 이전과 같은 삶을 바란다면. 내 그늘에서 벗어나라. 이 땅에서 새롭게 만들어 갈 세상에, 나는 너희를 강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나의 체계를 따르고자 한다면. 과거의 영광 따위는 모두 잊어라. 너희가 너희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나는 너희를 기꺼이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숨이 막혔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거대한 흐름은 순응할 수밖에 없었고, 로만 드미트리야말로 새로운 지도자임을 인정했다.

그는.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크로노스가 그동안 저질러 왔던 악행을 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갈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패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기존의 권력 체계에서 남들을 부리며 살았던 존재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을 수는 있으나, 세상이 바뀌더라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은 새로운 희망을 부여했다.

백성이란 그렇다.

그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판은 깔렸다.

이제는 상황을 마무리할 차례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지금부터 처형식을 진행하겠다!”

* * *

처형은 정적으로 이루어졌다.

환호하는 사람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대에 오른 이들은 참담한 얼굴로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퍽.

툭.

데구루루.

피가 흥건한 바닥에, 또 다른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는 멤피스 후작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었고, 충성의 대가로 이 처형대에 오르게 되었다.

처형은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끌려 나오면 흐느끼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머리를 날리자마자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우악스럽게 끌려 나왔다.

퍽.

퍽, 퍽, 퍽.

죽음의 소리였다.

사형 집행자(執行者)는 벌써 여러 사람을 죽였지만,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역할을 이어 나갔다.

크로노스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발할라와 양대산맥이라 불리며, 오라의 창시자인 알렉산드르를 배출한 명실상부 대륙 제일의 강국.

사람들은 크로노스가 언젠가는 대륙을 정벌할 날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간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나둘.

처형할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처형대 밑에서는 분주하게 머리를 잃은 시체를 옮겼고, 어느새 멤피스 후작 단 한 명만이 남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차례를 기다리며 죽음은 받아들였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에 후회가 남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멤피스 후작은 알렉산드르와 직접 소통하며 크로노스가 벌인 악행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즉각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처형대에 묶어 두어 비참한 현실을 수도 없이 되새기에 할 것이며, 모두가 지켜보는 이 공간에서 그는 서서히 말라죽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멤피스 후작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그게 무슨!”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어렵게 죽음을 받아들였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그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그냥 죽여라!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이다. 나를 욕보이지 말고,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날려 버리란 말이다!”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러자.

로만 드미트리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쪼그려 앉아 멤피스 후작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널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 처형대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너를 따르던 녀석들에게 선택지를 주기 위함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공간에서 너를 구하겠다고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면, 나는 그 녀석들의 뿌리까지 뽑아내 모조리 박멸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있는데도 분노를 억누른다면, 그들은 다른 기회가 생기더라도 감히 이빨을 드러내지 못하겠지.”

의도적이었다.

공개되어 있는 공간.

일부러 경계를 소홀히 하여,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멤피스 후작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손에 닿는 거리에 두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너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하다. 이 나라의 권력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추악한 욕망에 지배되지 않았다면, 크로노스의 백성들은 가족을 잃을 일이 없었겠지. 만약 누군가가 내가 정한 법도를 어기고 너를 해하려 한다면, 나는 그 존재를 본보기 삼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내린 형벌대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이곳에서 쓸쓸히 네가 말라 죽는 날이 찾아온다면…….”

웃었다.

그 웃음이, 멤피스 후작에게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이 나라는 완전히 나의 통제 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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