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3화 (403/615)

403화 대륙 정벌 (2)

성문이 열렸다.

그야말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왕국 연합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그들로서는 도박이었다.

헤르만의 파격적인 결단에 흐름에 쓸려 가듯 성문을 열었지만, 포로를 허락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라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

안함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항상 강자의 위치에서 살았던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이렇게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왕국 연합은 당당했다.

크로노스가 의도적으로 함정을 유도한 것일 수도 있으나, 앞서 걸어가는 한 존재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만일의 변수가 생긴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존재였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로 걸음을 옮겼고, 왕국 연합과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애매하게 뒤섞여 있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아직 서로를 아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백기를 내걸었다고 해서, 물과 기름이 단번에 섞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투항한 자들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킬 것이다. 크로노스의 진실을 몰랐을 때는 서로에게 창칼을 들이밀었으나, 진실을 알고 너희는 스스로 성문을 열어 투항할 것을 밝혔다.”

순간.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말에,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가 앞으로 왕국 연합의 소속으로 살아갈 날들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은 상식을 벗어나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러 왔다. 카이로, 드미트리, 움베르토. 지금 너희가 마주하는 소속 국가의 병사들은, 모두가 한 번쯤은 제국의 만행에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일 것 같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명령과는 별개로, 너희는 왕국 연합 안에서 차별과 비난을 받으며 무너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너희의 평판이다.”

참담한 현실이었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한 진실을 들쑤셨다.

그들이 현실을 인지하도록, 크로노스의 몰락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너희가 앞으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너희를 향한 평판과 내가 내리는 보상은 달라질 것이다. 너희는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삶을 바꿀 기회를 주겠다.”

분위기가 변했다.

앞으로의 전쟁.

크로노스 제국은 이전과는 다른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너희에게 묻겠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 * *

침묵에 빠져들었다.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국(賣國).

나라를 배신한 사람들에게,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국의 등에 칼을 꽂으라는 잔인한 제안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그들 중.

유일하게 헤르만만이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다른 사람들은 망설이는 마음에 입을 다문 것이라면, 그는 오로지 개인의 이득만을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은 빈말이 아니야. 사람들은 그가 적을 가혹하게 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충분히 관대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존재들은 전장에서 만난 적들뿐. 오늘처럼 자비를 베풀 기회를 주었을 때, 그것을 쟁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편견도 가지지 않아. 현재 드미트리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동북쪽 연합회나 파비우스 백작과도 같은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를 증명하는 예시지.’

그는 일개 병사이나.

대륙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드미트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기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과감히 배신하는 선택을 내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파비우스 백작과 같은 예시는 배신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도 없애 버렸다.

그는 한때 베네딕트 후작을 따르는 사람이었으나, 과감하게 노선을 갈아타면서 드미트리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고 있었다.

파비우스 백작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인을 바꾸고도 중용 받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었으나, 사실 박쥐와도 같은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로만 드미트리 또한 대단했다.

그것이 바로 선례였다.

선례가 증명했다.

눈앞에 지금 금줄이 내려왔다는 것을.

헤르만은 사람들이 망설일 때,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헤르만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크로노스를 배신한 이상, 저희로서는 반드시 왕국 연합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크로노스의 병사들에게 선택할 기회가 있음을 알리고, 저 자신을 그 예시로 삼아 그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제게 목숨을 바치는 대가를 충분히 부여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저를 대우해 주는 만큼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베푸는 자비를 목격하게 될 것이고, 드미트리의 포용력에 일을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존재감이 불쑥 튀어나왔다.

겨우 일반 병사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헤르만은 방금의 발언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재밌는 제안이군.”

그는.

파비우스 백작과 비슷했다.

상황에 따라 빠르게 결단을 내려, 자칫 비열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배신행위를 정당하게 포장했다.

물론 조건을 내건 것은 그의 욕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파비우스 백작을 받아들였을 때와 같이, 로만 드미트리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존재들을 오히려 선호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관계는 단단해지는 법이다.

헤르만은 이제 겨우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을 나이로 판단하지 않았다.

“네게 약속하지.”

웃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전장에서 충분한 공로(功勞)를 세운다면. 새로운 드미트리에서, 너는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패전 소식에, 멤피스 후작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동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최전방 방어 진지가 스스로 성문을 연 이후, 그들을 따라 투항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번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르가 제국의 배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던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병사들의 배반.

단순히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값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맞으나,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끝까지 싸우려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황제.

새로운 검술 혁명으로 그의 명성이 퇴색되었지만, 그가 이루어 낸 역사는 크로노스 백성들의 자부심이자 자랑거리였다.

오라가 알렉산드르 황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사람들은 크로노스가 제국으로서의 확실한 근본을 갖추었다고 말해 왔는데, 이번에 밝혀진 추악한 진실은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제국의 자랑거리는.

추악한 영생을 택했다.

검을 버리고 흑마법을 익혔고, 9서클이라는 강력한 경지에 올랐으나 그것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알렉산드르는 망자를 부리는 마법을 사용했고, 그간의 상황을 보았을 때 크로노스 황제는 알렉산드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진실이란 말인가.

흑마법을 익힌 악인이 주도하는 나라였다는 생각에, 병사들로서는 전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를 버렸다.

목숨을 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크로노스 제국 전체에 번지는 무력감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족족 모두 백기를 내걸었다.

“후작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수하가 간절하게 말했다.

멤피스 후작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답답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금줄이라 생각하고 움켜쥐었건만, 그가 패배하면서 상황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알렉산드르는 죽었다.

크로노스 황제는 그동안 꼭두각시로 살았으니 믿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전쟁을 감행하자니 그를 감당할 자신을 떠나서 사람들을 진정시킬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승리를 확신하고 존재를 드러냈다.

차라리 조용히 죽어 버렸다면 일이 편했을 텐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빌어먹을, 알렉산드르.’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자신이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복잡한 문제였다.

황제라는 연줄이 끊어진 상황에서, 멤피스 후작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드미트리, 민심, 다른 귀족들의 반발까지.

그동안은 황제의 배경을 이용해서 귀족들의 반발을 억눌러 왔으나, 며칠 지나면 자신의 자리마저도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고민했다.

이윽고.

멤피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를 준비하라.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갈 것이다.”

단 하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 있었다.

* * *

그시각.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발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격을 중단한 상태였다.

헥토르를 공격하던 병사들을 뒤로 물린 뒤에, 발할라의 수뇌부들이 모여 열띤 회의를 진행했다.

“발할라 백성들의 민심이 좋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르 황제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와 관련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만약 발할라가 끝까지 크로노스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면. 발할라의 백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발할라의 백성들은 농사나 짓는 그런 부류들이 아닙니다. 이미 나라를 한 번 뒤엎은 사람들이기에,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요. 지금부터 우리는 현명하게 판단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발할라 황제를 죽인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실을 내세우면서 크로노스를 끊어 내야만,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진실을 알았다.

스노딘 백작을 필두로 매국을 저지른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그들은 자칫 잘못했다간 화살받이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을 크로노스 제국의 책임으로 몰아야 했다.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전쟁을 속행했다가는 크로노스와의 관계를 의심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발할라 황제를 죽인 로만 드미트리를 내버려 두는 꼴이 됩니다. 크로노스와 별개로 전쟁을 치를 수도 없습니다. 반란을 시작으로 연달아 전쟁을 치르며 제국의 국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9서클 마법사인 알렉산드르를 쓰러트린 괴물을 대체 어떻게 상대한단 말입니까. 답이 없습니다, 답이. 지금부터는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우리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전쟁을 속행하든.

포기하든.

모두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확인했다.

그가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고 발언권을 얻는다면, 발할라 제국은 회생이 불가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대륙의 판도가 변하고 있었다.

이번 문제.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권력이 결정될 것이다.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그때, 한편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참 이해가 되지 않네요. 크로노스를 포기하고 로만 드미트리가 주장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대륙의 판도는 바뀔지언정 발할라 제국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아이른 남작이었다.

지난 회의.

한 번 발언했다가 신랄한 비난을 받았던 그가, 수뇌부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웃음을 보였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이 중에서 크로노스 제국이나 알렉산드르 황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다들 발끈했다.

아이른 남작의 말을 인정했다간.

매국노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격렬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이른 남작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왜 이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하십니까. 저는 진심으로 발할라를 이끄는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야만, 지금 제가 초대한 손님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손님이라니?”

“그게 무슨…….”

그때였다.

끼익.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발할라의 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드미트리의 파비우스 백작님이 입장하십니다.”

파비우스.

그리고 호위로 따라나선 케빈과 병사들.

일단의 무리가 들어서는 모습에, 발할라 수뇌부들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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