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화 (400/615)

400화 알렉산드르 (5)

알렉산드르의 전생(前生).

김판석으로 살았을 시절, 그는 고된 일과를 마치고 객잔에서 술을 한잔 기울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런 일이 있었어?”

“크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객잔은 왁자지껄했다.

다들 김판석과 비슷한 처지였고, 고급 기루인 청화루는 얼씬도 하지 못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말이 끊이질 않았다.

김판석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까무잡잡한 얼굴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던 그에게, 이야기꾼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말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자네들. 허공답보(虛空踏步)라고 들어 봤나.”

“……허공답보?”

“그래, 이 사람아. 저 무림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글쎄, 허공을 밟아 하늘을 날아오를 수가 있다네.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지. 왜 옆 마을 최 씨네 할머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무림인을 실제로 목격했다가, 자신을 찾아온 저승사자인 줄 알고 놀라서 돌아간 사건도 있지 않았나.”

“에이,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그날도 어김없었다.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지적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며 사실을 주장하는 이야기꾼의 모습에, 한편에 앉은 김판석은 소리 없이 웃었다.

무림에 관해서는 허황된 이야기가 많았다.

홀로 수천의 무림인을 도륙했다느니, 맨손으로 불을 피운다느니, 검 한 자루로 산을 베어 버린다느니 등등, 같은 인간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불신과 동시에 흥미를 주었다.

‘무림은 대체 어떤 세상일까.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걸까.’

그 무렵의 김판석에게.

무림은 알게 모르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무림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걸음을 멈추어 귀를 기울였고, 특히 자신이 그 대단한 무림인이라고 밝힌 삼류 무인을 만났을 때는 의구심을 완전히 거두었다.

마치 간과 쓸개를 전부 내어 줄 것처럼.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 보기 위해, 먼저 술병을 건네 술잔을 채워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무림에 대한 정보가 쌓였다.

그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며, 어떻게 무공을 터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들은 확실했다.

무림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김판석은 무림인을 하늘의 별처럼 우러러보았고, 단잠에 빠질 때면 무림인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이 난리가 났다.

십만대산의 주인인 천마신교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는 소문으로 흉흉하던 시기였는데, 그날은 마교의 무인들이 산에서 내려와 길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주변을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피던 그는, 이야기꾼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었지. 현재 천마신교를 이끄는 분은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그분이 드디어 무림을 정벌했다네. 정파 무림, 사파 무림, 새외 무림을 모두 무릎 꿇리고, 천마신교의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이지!”

무림 정벌.

엄청난 단어였다.

현실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아아.’

그때.

본능적으로 알았다.

선두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존재가, 평소 이야기꾼이 얼굴을 붉히며 찬양하던 천마라는 존재임을.

천마신교의 주인. 그를 확인하는 엄청난 순간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김판석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목이 터질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쳤다.

“천마재림 만마앙복(天魔再臨 萬魔仰伏)!”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를 찬양했다.

그의 귀환을 반겼다.

마침 바로 앞으로 이어지는 행렬에, 김판석은 큰 용기를 내서 천마의 얼굴을 확인했다.

순간.

전율이 일었다.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천마는, 그것을 압도하는 강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천마 백중혁.’

마교의 절대자.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얼굴을, 김판석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 *

심장이 뛰었다.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알렉산드르는 천마 백중혁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을 잊어버릴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마 백중혁이었다니.’

경악했다.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의 엄청난 무력을 마주하며, 알렉산드르는 천마신교의 여러 인물을 떠올렸다.

‘천마신교에는 천마 백중혁을 따르는 사천왕이 있다고 들었다. 홀로 정파 무림을 막아서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광마의 환생일까, 아니면 가장 많은 무림인을 죽였다고 알려진 혈마의 환생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천마 백중혁 다음으로 제일 뛰어난 검술을 펼치던 검마의 환생일까.’

사천왕.

이야기꾼이 침을 튀겨가며 말하던 인물들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무림의 세계는 잘 몰랐지만, 천마신교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았기에 그들의 이름만큼은 알았다.

하지만.

단 한 명.

천마일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에게 있어, 김판석에게 있어 천마 백중혁의 존재는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꾼이 내게 말했었지. 천마 백중혁은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역대 천마들도 번번이 실패했던 무림 정벌을, 그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루어 냈다. 나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평화로운 나날에 백중혁의 백성인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겼지.’

충격적이었다.

백중혁.

그는 완벽한 지도자였다.

사람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강력한 무력과 명확한 법도를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사람다운 삶을 부여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이 모일 때면 모두 백중혁을 찬양했다.

알렉산드르도 마찬가지로, 그분 덕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렇기에.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천마 백중혁을 대적한다는 것은, 상상에서조차 허락되지 않는 신성한 영역이었다.

‘아아.’

몸에 힘이 풀렸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황을 되새겨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자신과 천마 백중혁은 동시대의 인물이었는데, 현재의 로만 드미트리와 자신은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하고 억겁(億劫)의 세월을 살았다.

실제로 살아온 세월을 비교한다면, 강산이 수도 없이 변했을 만큼 엄청난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 것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였던 건가.’

천마 백중혁이라면.

무림을 정벌한 그라면

방금까지도 현실을 부정하던 알렉산드르는, 이 충격적인 패배를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알렉산드르가 충격에 빠진 그때.

로만 드미트리도 상대의 기억을 읽었다.

심연 속에 빠져들어, 가장 최근부터 과거의 순서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차례로 확인했다.

한순간.

기억이 멈추었다.

알렉산드르의 시점으로 고개를 조아리자, 머리 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 짓눌렀다.

“마왕(魔王)님이시여. 로만 드미트리로 인한 혼란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루나 왕국의 계집도 차원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제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마계의 왕.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알렉산드르의 의식이 마계에 도달했고, 감히 마왕을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명령이 내려지길 기다렸다.

머리 위로.

탁한 음성이 들렸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지상계와 마계의 동화다. 마계의 존재들이 지상계에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원의 벽을 무너트려야만 한다. 알렉산드르, 나의 종이여. 너로 인해 차원의 균열은 시작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살육을 벌여라. 죽음과 피로써 세상을 혼란에 빠트려라. 사람들이 고통에 울부짖을수록, 차원은 그 힘을 서서히 잃게 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크로노스의 배후에 누가 있으며, 알렉산드르가 대륙 정벌을 통해 이루려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마계.

그 세상을 받아들일 것이다.

세상을 어둠으로 완전히 물들여, 마왕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알렉산드르는 영생을 살아가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마왕과의 약속이었다.

알렉산드르 황제로 살아가던 시절, 귓속에 들려오던 악마의 속삭임은 먼 훗날에 있을 찬란한 미래를 약속했다.

그런 이유로.

크로노스 제국은 전쟁을 감행했다.

발할라 제국의 진실이 밝혀지는 상황에, 예정된 것보다 일찍 전쟁의 시기를 앞당겼다.

츠즈즈즈즈.

상황이 바뀌었다.

기억은 완벽하지 않았다.

부분부분 보였고, 과거로 빠져들며 알렉산드르가 살아온 삶을 보여 주었다.

‘알렉산드르. 그는 오래전부터 대륙을 정벌할 힘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대륙 정벌이 아닌 마계와 지상계의 동화였다. 그렇기에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지. 차원이 힘이 충분히 약해지도록. 마계와 지상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마왕을 따르지 않는 인간들이 살아갈 세상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

알렉산드르의 목적을 확인했다.

참으로 같잖은 인간이었다.

인간으로서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 알렉산드르는 강렬한 열망을 위해 마왕이 내민 손길을 덥석 붙잡았다.

오라의 창시자라 불리면서도.

제국의 황제이면서도.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더 엘프의 말에 따르면, 차원의 균열은 애초에 알렉산드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차원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몸을 차지하면서부터 균열은 시작되었고, 마왕은 ‘알렉산드르 자체’를 원했다기보다는 균열을 일으킬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눈에는 보였다.

마왕과 알렉산드르의 관계는 정상적이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는 영생에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다.

기억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츠즈즈즈즈.

전생을 떠올렸다.

김판석이 산을 오르다 차원 이동에 휩쓸리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 * *

그 장소.

익숙했다.

전생의 백중혁은 종종 수련을 위해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한 산에 자리 잡아 자신의 무공을 되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시작이었다.

최근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던 도중에 댐이 터지듯 깨달음이 밀려들었고, 백중혁은 갑작스럽게 새로운 경지로 나아갔다.

천의 경지.

자연에 동화되었다.

자연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시작된 고통에, 며칠 밤낮으로 자신과의 사투(死鬪)를 벌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역대 천마 중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기에 백중혁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을 그때, 백중혁은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장소로 한 인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일반인이었다.

무공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 정도는 필요해 보였다.

신경을 껐다.

그가 누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중혁은 스스로에게 집중했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 빠져들어 자연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육체가 재구성되었다.

환골탈태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뇌리를 관통하는 강렬한 기운을 느꼈을 때는 스스로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때였다.

화악.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요동쳤다.

엄청난 힘의 파동에 균열이 생겨났고, 감각에 포착되던 일반인은 그 힘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제야 알았다.

‘알렉산드르는 나로 인해 탄생한 존재였다.’

신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그 힘에 휩쓸린 존재는 차원의 경계를 넘어섰고, 그는 새로운 세상에서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얻었다.

* * *

슥.

손을 뗐다.

알렉산드르.

그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관계였다.

그때의 백중혁은 무고한 인간이 자신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알아낸 뒤에 그와 관련한 사람들에게 넘칠 만큼의 보상을 지급했다.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기에, 백중혁으로서는 그날의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알렉산드르가 되었다.

차원의 경계는 시간을 초월했고, 백중혁으로 살아가는 동안 알렉산드르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것 또한 천명(天命)이란 말인가.’

모든 일.

그냥은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아온 삶은 익숙함을 느낄 정도로 비슷한 면모가 많았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적합한 형태였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자연스럽게 알렉산드르의 계획을 막아서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분명.

명확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의 몸을 차지한 것은, 그 시작부터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스스스.

억압이 풀렸다.

알렉산드르가 몸을 비틀거렸다.

그가 힘겹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나의 백성이었구나.”

그 말에.

알렉산드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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