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알렉산드르 (2)
참담한 상황이었다.
카이로 왕국은 최전방 방어 진지를 버렸고, 패잔병(敗殘兵)의 몰골로 빠르게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단히 준비해 두었던 것들이 단번에 무너지는 모습에, 다니엘 카이로를 비롯한 카이로의 수뇌부들은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일단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날.
크로노스 제국군과의 거리를 제법 떨어트리자,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한 뒤에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상황을 보고하라.”
다니엘 카이로.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보를 총괄하는 노르베르트 또한, 상당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병력의 피해 현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그나마 단단히 방비해 두었기에 그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만, 어제 단 하루 만에 그 절반인 5만 명의 병사가 죽었습니다. 다니엘 국왕 폐하. 사실상 더는 전면전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크로노스를 상대할 대항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입니다.”
절망적이었다.
문제는.
노르베르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크로노스의 마법사가 사용한 마법은 9서클의 영역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델리아의 수도를 멸망시켰던 마법은 9서클이 맞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어떤 마법 방어로도 크로노스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이며,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크로노스의 마법사는 스스로를 ‘알렉산드르’라고 칭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크로노스에서 알렉산드르는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이름입니다.”
“……알렉산드르 황제.”
“맞습니다.”
“크흠.”
다들 신음을 삼켰다.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알렉산드르 황제!
대체 어째서 그 이름이 거론된단 말인가.
오라의 창시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는, 직접 명령을 내려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렉산드르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전에 황제처럼 위대한 영웅이 되라는 의미로 자식의 이름을 알렉산드르로 짓는 귀족들이 있었으나, 크로노스에서 보낸 그림자들에게 참혹하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런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고로.
동일 인물이거나, 혹은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인정받은 인물일 확률이 높았다.
어떤 것이든 불안감은 팽배했다.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알렉산드르의 이름은 특별하다. 그가 알렉산드르의 이름을 물려받은 후계자라면, 그는 분명히 크로노스 제국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특별히 육성된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동일 인물이었을 때의 가능성이다. 스스로를 알렉산드르의 강림이라고 발언한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가 억겁의 세월을 살았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크로노스는 실제로 흑마법과 연관이 있으며, 알렉산드르 황제가 ‘마법’을 익혔다면 불사(不死)의 영역을 허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마른침을 삼켰다.
말을 하면서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만약 그가 정말 알렉산드르 황제라면.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알렉산드르가 9서클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만큼 대륙 정벌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는 의미겠지. 노르베르트의 말대로다. 지금부터 전면전은 불가능하다. 현재 카이로의 전력으로는,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 낼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방법은 하나였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로만 드미트리의 합류를 기다린다. 그것이 무능력한 국왕인 내가, 너희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명령이다.”
그동안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괴물이었다.
* * *
카이로가 한참 도망치던 그때.
어둠의 공간에 들어선 알렉산드르는, 차원 너머 ‘크로노스 남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했다.
카스트로와 로만 드미트리.
격렬하게 부딪쳤다.
카스트로는 어둠의 힘을 각성하며 엄청난 무력을 보여 주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승부였다. 7성의 오라 검사가, 대륙 제일의 검사라고 불리던 카스트로가.
기껏해야 공격을 한 번 막은 수준에 만족하며, 이후 시종일관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처참하게 죽었다.
무너지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알렉산드르는 전율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대체 전생에 어떤 존재였던 거지?”
감탄했다.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무림 출신이면서도, 나름대로 뛰어난 무공을 익힌 그런 수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마와 같은 이름은 아득히도 높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알렉산드르로서는 무공을 확인했는데도 정체를 유추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강력한 무력과 더불어 과감한 행보는, 로만 드미트리가 무림에서 어쭙잖게 이름을 알린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거물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소문이 있지 않은가.
무림에는 천하십대고수와 같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들이 있다고.
이름들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현재의 로만 드미트리를 설명할 수 없었다.
“참 불공평하구나.”
시기심이 일었다.
화가 났다.
만약.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의 전생과 비슷한 조건을 갖추었다면, 굳이 어둠의 힘을 빌려 강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대륙 정벌을 이루어 냈을 것이고, 후대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르를 위대한 황제, 오라의 창시자가 아니라 제일의 검사로 기억했을 것이다.
참담했다.
태생이 비참했기에.
자신의 현실을 들추는 것 같은 상황에서, 알렉산드르는 들끓는 열등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인이 되고 싶었다.’
꿈.
대륙 정벌에 버금가는 강렬한 열망.
알렉산드르는 로만 드미트리가 진심으로 부러웠고, 그렇기에 카스트로를 내보내 그의 무력을 시험해 보았다.
마지막 관문이었다.
자신이 창시한 오라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긴다면, 그때는 패배를 인정하고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가 되었다.
그분이 말한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상을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이기 이전에, 알렉산드르는 자신만의 열망을 실현시킬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너는 반드시 내 눈앞에 나타나겠지. 그때가 샐러맨더 대륙을 정벌할 시발점임과 동시에, 너의 진실을 들여다볼 순간일 것이다.”
쿠르르르르르릉.
어둠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르는 어둠에 휩싸이며, 열망으로 들끓는 눈빛을 빛냈다.
* * *
일련의 상황.
크로노스의 지휘관인 브루스 백작은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알렉산드르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보였다.
“……저희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 주십시오.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알렉산드르 황제 폐하라 밝혔지만, 저희로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국의 배후.
그곳에 알렉산드르가 있었다는 것은, 브루스 백작 정도 되는 귀족들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리 보고되지 않은 9서클 마법사가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스스로를 알렉산드르 황제라고 밝혔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오래전에 죽었을 알렉산드르 황제가 살아 있는 것도, 오라의 창시자라고 불린 그가 9서클의 경지에 오른 것도, 어느 것 하나 말이 되는 일이 없었다.
당연한 물음이었다.
상식의 범주에, 알렉산드르는 차갑게 브루스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설명?”
“그야 당연히…….”
“나는 알렉산드르 황제다. 세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희는 내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월의 흐름 따위로 내 존재를 판단하지 마라. 오라의 창시자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너희가 모르는 이면에서 크로노스 제국은 내 통치 아래 존재해 왔다.”
말문이 막혔다.
알렉산드르.
그가 크로노스의 배후라니.
믿기지 않았다.
선뜻 황제에 대한 예우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쯧쯧.”
퍽.
피가 튀었다.
혀를 차자, 브루스 백작의 머리가 폭발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죽은 상황에도, 그들은 섣불리 분노하는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 감히 나를 마주하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동안 너희 또한 만족해 왔지 않았나. 나의 통치를, 크로노스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강력한 힘을. 그렇다면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다고 한들, 알렉산드르의 이름 아래 무릎부터 꿇고 고개를 조아렸어야지.”
시선을 돌렸다.
다들 얼어붙었다.
알렉산드르는 그중 한 명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지휘관은 네가 맡는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콰르르르르릉.
마력이 일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알렉산드르가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내 의견에 반하는 존재들은 앞으로 나와라. 만약 모두가 내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씰룩.
웃었다.
“지금 당장 무기를 쥐고 나아가, 카이로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 * *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최전방 방어 진지를 무너트린 이후.
크로노스는 계속해서 밀고 들어갔고, 카이로는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항전을 포기했다.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야 할 카이로의 요새들이 텅텅 비었고, 간혹 크로노스 제국군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마법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법 폭탄이 반응하기도 전에, 알렉산드르가 손가락을 치켜드는 순간 마법 폭탄이 힘을 잃고 파괴되고 말았다.
파스스.
마법사.
그들의 세계에서 서클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9서클의 영역은 범접할 수 없는 세계였고, 알렉산드르 하나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며칠이 흘렀다.
한 요새에 도달했을 때, 크로노스 제국은 이전과는 다른 광경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르 님. 카이로가 농성(籠城)을 벌일 모양입니다. 요새 안에 병력이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성벽 위에 다니엘 카이로가 존재하는 것 또한 확인했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새로운 지휘관.
브루스 백작의 부관인 고든은,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완벽히 받아들인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따라야 했다.
알렉산드르는 오랜 세월 황실을 장악했고, 그의 눈에 드는 순간 출셋길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도 요새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알렉산드르의 힘이 필요했다.
크로노스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나, 알렉산드르가 도와준다면 일이 편해질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르가 성벽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나타났군.”
“……그게 무슨?”
“멍청한 녀석. 보고도 모르겠나.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 이후, 항전을 완전히 포기하고 도망치던 카이로가 갑자기 농성을 택한 이유를. 그들은 이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순간.
고든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알렉산드르가 말하는 바를 눈치챘다.
“그래. 로만 드미트리가 합류한 것이겠지.”
* * *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카이로에 합류했다.
본래의 계획은 크로노스의 본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가 카이로 왕국에 나타났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알렉산드르는 모든 흑막의 배경이다.
그를 처리한다면 크로노스를 무너트릴 수 있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기존의 계획을 변경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카이로만으로 막을 수 없음을 알았다.
카이로 왕국을 무대로 싸우자는 알렉산드르의 무력시위가, 로만 드미트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때였다.
끼익.
양측이 대치하는 상황.
성문이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걸어 나오는 모습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천천히 걸어갔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알렉산드르. 네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확실한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겠지.”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알았다.
단 한 번도 직접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대륙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알렉산드르가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만날 것을 예감했다.
알렉산드르의 목적이 대륙 정벌에 있다면, 군림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자신과는 반드시 승부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알렉산드르가 나타났다는 보고에,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검을 뽑았다.
경계하는 적들을 바라보며, 점점 걸어가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을 보겠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공격하라!”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라!”
사방에서 나타나는 병사들.
그들은 카이로와 움베르토의 깃발을 펄럭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악에 받친 함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결전(決戰)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