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단 한 명의 존재감 (2)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크로노스 제국군을 진두지휘하던 솔레르 백작의 머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에,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이런 미친.”
“솔레르 백작님이 죽었어!”
경악했다.
상대는 단 한 명일 뿐이다.
그런데 홀로 크로노스 제국군을 쓸어 버리더니,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간단하게 솔레르 백작을 처리해 버렸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포가 그득그득 차올랐다.
드미트리와의 전면전에서, 승리를 확신했던 30만 대군은 카이로의 영토를 밟은 이후 대부분 돌아오질 못했다.
그때와 지금.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8서클 마법사인 셰피르를 보유했을 때는 승산이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저 괴물을 감당할 방법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멈추지 않았다.
솔레르 백작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는 눈에 보이는 족족 모조리 도륙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오라의 폭풍이 일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오라 검사들을 베어 버리는 모습에, 솔레르 백작의 부관(副官)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퇴, 퇴각하라! 일단 병력을 보존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릴 것이다!”
“모두 퇴각하라!”
계획에는 없던 행동이었다.
필사(必死)의 의지로 움베르토를 무너트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건만, 부관은 이대로라면 드미트리와의 전면전에서 벌어졌던 참담한 패배가 반복되리라고 생각했다.
승리를 확신했던 사람들은 자신감의 대가로 대부분 죽었다.
솔레르 백작이 패장들을 통해 조언을 들었던 것처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박힌 공포의 기억은 이대로 싸우는 것이 크로노스를 위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일단.
살아야 했다.
해결책 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였다간,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에 새로운 글귀를 추가시키게 될 것이다.
“크악!”
“도망쳐!”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겨우 한 명의 존재에 수십 만의 대군이 도망치는 모습을, 크로노스 제국군은 그 누구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값은 그만큼 대단했다.
병사들은 서로를 밀치며 빠르게 벗어나려고 했고, 동료에게 밀려 꼬리를 잡힌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드미트리의 악마를 상대로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번뜩.
콰르르르르릉.
모조리 목이 날아갔다.
사지가 찢기고, 피가 흩뿌려졌다.
부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며, 병사들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전열을 포기하고 일단 도망치라는 명령만 반복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물었다.
크로노스의 대군을 이끌고, 이렇게 도망치는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무시하고 움베르토를 무너트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단 한 명의 괴물이 크로노스를 모조리 갉아먹을 것이다.
한 명의 차이를 무시했다가 벌어진 참담한 결과는 지난 전쟁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부관은 이게 겁쟁이의 선택이 아니라, 지휘관을 잃은 부관으로서 크로노스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고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거듭했다.
병력을 살리고.
반격을 도모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이기에, 전장을 넓게 활용한다면 분명히 기회가 생긴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였다.
얼마나 도망쳤을까.
수풀로 우거진 일대에 진입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주변에서 의문의 인물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노스다!”
“공격하라!”
“크로노스의 잔당을 모조리 죽여라!”
파파파파팟.
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화살.
그리고 땅에서는 마법 폭탄이 폭발하며, 가장 먼저 도망치던 병사들이 그대로 폭발에 휩쓸렸다.
함정이었다.
부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체 왜. 왜 여기에 함정이 있어?!’
소름이 돋았다.
설마.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들이 도망칠 것을 예상했단 말인가.
의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부관은 자신의 발밑에서 터지는 강력한 폭발에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콰앙!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 * *
함정을 주도한 사람.
움베르토의 수뇌부였다.
이름은 베리슨 남작이었는데, 그는 지난 회의에서 이번 작전에 대한 상당한 불신을 보였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이번 작전.
무모했다.
지원군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뿐인데, 그로부터 경악스러울 정도로 황당한 작전이 전달되었다.
“움베르토의 병력 일부를 빼돌려 퇴로를 차단하라. 함정을 설치하고 기다린다면, 도망치는 적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할 수 있다.”
말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베리슨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합류한다고 한들, 크로노스의 대군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가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힘은 믿었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겠지만, 움베르토의 피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의 작전은 대승을 전제로 깔았다.
본인의 합류만으로 크로노스 제국은 도망칠 것이니, 움베르토는 수성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병력을 일부 빼돌리는 대담한 선택을 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반발했다.
수성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퇴로에 병력을 심어 두는 것은 정말 비효율적인 판단이라고 말이다.
설전을 거듭한 결과.
고집을 꺾었다.
완벽하게 신뢰했다기보다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 보여 주었던 말도 안 되는 업적들을 믿었다.
사실 조금 전까지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일이 틀어지는 것 같으면, 작전을 포기하고 움베르토를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크로노스 제국군이 도망쳤다.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맹수의 아가리에 그냥 뛰어드는 꼴과 같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악.”
사방에서 마법 폭탄이 폭발했다.
미리 설치해 둔 마법 폭탄으로 인해 수천의 병사가 단번에 휩쓸렸고, 크로노스 제국군은 당황해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들이 온몸을 관통했다.
방패 대형을 형성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화살은 팔을 관통하고 미간을 단번에 꿰뚫었다.
퍽.
혼란이 일었다.
동료들이 연달아 쓰러지는 모습에, 크로노스 제국군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공격해!”
“길을 열어라!”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들의 뒤에.
로만 드미트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그에게 꼬리를 붙잡히는 순간 모조리 죽을 것을 알기에, 불리한 지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펼쳐졌다.
아무리 크로노스가 강군이라고 할지라도, 자리를 미리 선점한 움베르토의 방어를 뚫기는 쉽지 않았다.
시체가 쌓였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적들의 모습은 공포를 선사했지만, 베리슨 남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불신했던 그가.
지금은 맹목적인 믿음을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버텨라! 버티고 버티다 보면, 로만 드미트리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파팟.
파파파파팟.
“크악!”
후미에서부터 일어나는 학살에, 베리슨 남작은 잔뜩 들뜬 얼굴로 병사들에게 결사의 항전을 명령했다.
* * *
해가 저물어갈 시각.
움베르토의 성으로 복귀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움베르토의 병사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감사합니다! 덕분에 움베르토가 위기를 넘겼습니다!”
난리가 났다.
그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단 한 명으로 인해 생겨나는 변화를.
일방적으로 적들을 도륙하는 모습에 크로노스가 방황하기 시작했고, 움베르토는 그 균열을 노려 단번에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며칠 전까지 생존을 걱정했던 움베르토였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전설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그들은 광신도처럼 소리를 꽥꽥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움베르토의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베리슨 남작을 필두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던 그들이, 먼저 선뜻 나서며 활짝 웃음을 보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홀로 크로노스 제국의 진영을 쓸어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대륙 제일검이라고 불리는지, 저는 이번 전쟁을 통해 완벽하게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움베르토가 멸망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의 눈빛엔 호의가 가득했다.
아직도 얼떨떨했다.
단 한 명.
지원군은 한 명에 불과했다.
드미트리의 본대는 각기 카이로와 헥토르로 떠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합류로 불리하다고 생각되던 전쟁을 단번에 역전시켰다.
보통 사람들은 개인이 다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인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강하다면, 숫자의 차이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크로노스도 알았다.
전장을 여러 곳으로 쪼갠 이유는, 개인의 존재감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겼다.
기쁨도 잠시.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지금부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상석을 내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베리슨 남작이 입을 열었다.
“일단 움베르토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크로노스의 공격으로 인해, 움베르토의 피해는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혹시 모를 추가 공격을 대비해서 자국에 방어 병력을 남겨 둔다면, 지금으로서는 움베르토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가 10만이 채 되질 않습니다.”
현재 상황은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다.
카이로.
헥토르.
무법 지대.
세 곳에서는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고, 빠르게 도와주지 않는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단 남부 삼국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드미트리의 병력을 카이로와 헥토르에 보낸 것처럼, 움베르토의 병력은 동선상의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무법 지대를 먼저 해결하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남부 삼국의 상황을 안정시킨다면. 그 이후에 다른 전장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동조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지도를 내려다보니, 차례로 전장의 상황을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현명하게 병력을 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카이로의 서부 전선. 크로노스 제국은 대군을 동원해 카이로를 공격했지만, 카이로는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상황이 희망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동안의 전쟁을 통해, 카이로 왕국은 언제라도 크로노스가 휴전 협상을 백지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지만, 움베르토를 공격한 크로노스 제국군의 패배로 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또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카이로를 무너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할 확률이 높습니다.”
시선을 옮겼다.
헥토르의 땅이 보였다.
“두 번째는 헥토르의 남부 전선. 사실 그들이 오랜 시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에드윈 헥토르 왕자가 7서클의 경지에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천공의 마탑 마법사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 냈습니다. 마법사들은 수성에 특화되었고, 마법 전력의 힘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부터가 문제입니다. 발할라는 제 발을 묶어 두는 것에 실패했고, 목표를 잃은 병력은 남부 삼국이 아닌 모두 헥토르로 향할 것입니다. 헥토르가 감당해야 할 상황이 발할라와의 전면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전장.
모두 심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무법 지대는 달랐다.
“앞선 두 전장에 비해 무법 지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무법 지대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들은 결국 폭도들일 뿐입니다. 체계화된 무장을 갖추지 않았기에, 무법 지대를 점령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지 않는다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성 물자와 마법 병기가 없는 폭도들로서는, 높디높은 성을 단시간에 함락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선택이 필요한 때였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저는 남부 삼국의 상황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할 생각입니다.”
* * *
과감한 결단이었다.
당황하는 베리슨 남작과는 다르게, 칼데론 드레이크는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소름이 돋았다.
‘전장의 우선순위라니. 로만 드미트리는 항상 전장의 본질을 보는구나.’
로만 드미트리의 말.
옳았다.
움베르토로서는 남부 삼국의 문제를 해결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사실 전쟁 전체를 보았을 때 무법 지대는 우선시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무법 지대의 폭도들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들이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성을 단시간에 함락시킬 수는 없다.
시간의 차이였다.
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우선순위를 나열했다.
‘카이로와 헥토르는 두 제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왕국 연합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움베르토 왕국을 도와줌으로써 본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친 직후. 가장 위험한 전장은 움베르토였고,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전장의 우선순위대로 행동했다는 의미지.’
고로.
그를 믿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드미트리와 연관된 전장을 우선으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움베르토를 도와주는 모습으로, 전쟁 전체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남부의 무법 지대보다, 지금은 일단 카이로와 헥토르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둘 중 어디를 우선으로 하느냐입니다. 왕국 연합의 병력은 제한적입니다. 애매하게 병력을 나누었다간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기에, 저희는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차례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움베르토의 지원 병력도 많지 않기에,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전장.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들조차도 나라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 움베르토에서의 싸움만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고 확신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동조했다면.
더는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특히 베리슨 남작과 같은 부류들은, 이번 전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말을 잡았다.
움베르토의 병력을 상징하는 나이트(knight)를 움직여, 모두가 보란 듯이 한 곳에 내려놓았다.
탁.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말이 옮겨진 장소.
그곳은 예상 밖의 포인트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크로노스 제국을 향해 진격할 것입니다.”
북진(北進).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가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