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제2차 대륙 전쟁 (13)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움베르토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을 그때, 발할라의 지휘관은 헥토르의 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소로운 녀석들. 감히 발할라를 막아설 생각을 하다니.”
조금 전.
발할라는 항복을 종용했다.
순순히 드미트리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 준다면, 헥토르의 공로를 인정해서 속국(屬國)으로 받아들여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무조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전령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과격한 대답을 보내왔고, 발할라의 지휘관은 분노를 토해 냈다.
곧바로 회의가 소집되었다.
수뇌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할라의 지휘관이 강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작전은 간단하다. 곧바로 헥토르의 국경으로 진격, 최전방 방어 진지를 함락하고 워프 게이트를 확보할 것이다. 드미트리 국경과 연결되어 있는 워프 게이트를 확보할 경우, 우리는 드미트리로 이동하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그리고 계획대로 드미트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우리가 이번 전쟁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발할라의 작전.
너무나도 허술했다.
그냥 진격해서 무너트리겠다는 내용인데도,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전쟁 경험이 많은 수뇌부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헥토르가 전쟁을 각오했다면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은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헥토르를 무너트릴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쯧쯧, 그건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못한 판단이다.”
지휘관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상대는 헥토르다.
크로노스도 아니고, 소국에 불과한 헥토르.
발할라의 지휘관 또한, 수많은 전쟁을 통해 전력의 차이를 가늠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헥토르는 과거 카이로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한 약소국이며, 극심한 흉작으로 인해 국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다. 최근에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나라의 사정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들이 발할라와의 전면전을 버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발할라 황실에서 열흘 안에 성과를 보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최선의 작전이 적을 고립시키고 말려 죽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헥토르는 무너트릴 수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바라는 목표는 실패하게 된다.”
이번 전쟁은 속전속결이 중요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발할라에 발이 묶여 있는 지금,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 했다.
전쟁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복귀해서 군대를 되찾았을 때, 그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기회를 무조건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수뇌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현재 발할라의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은, 발할라의 안위보다는 크로노스를 따르는 매국노들이었다.
의견은 짓밟혔다.
고개를 숙이는 수뇌부의 모습에, 발할라의 지휘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 우리는 헥토르의 국경으로 진격해, 감히 발할라의 앞을 막아서는 헥토르를 짓밟을 것이다!”
북진(北進).
헥토르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 * *
발할라의 진격.
헥토르에 곧바로 보고되었다.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벌벌 떠는 병사들의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무장을 갖춰 입고 나섰다.
“헥토르의 백성들은 들어라.”
마나를 일으켰다.
좌중을 압도하는 묵직한 음성에, 백성들이 고개를 들어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발할라가 헥토르를 무너트리기 위해 진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드미트리를 공격할 길을 내어 주지 않는다면, 헥토르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너희에게 묻겠다. 지난 몇 년. 헥토르가 흉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우리를 도와준 나라가 어디인가.”
“드미트리입니다.”
“그래, 드미트리다. 드미트리가 우리를 도왔다. 그런데 우리가 자국의 안위를 챙기겠다고 드미트리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그렇게 비열하게 살아남아 발할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면, 대체 그 누가 우리에게 믿음을 보이겠는가. 발할라와 크로노스는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오델리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면서, 본인들 외에 그 어떤 나라도 독립성(獨立性)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나는 개처럼 살고 싶지 않다. 인심을 쓰듯 던져 주는 것을 주워 먹으며, 노예처럼 제국을 떠받드는 그런 참담한 삶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타협이 없음을 강조했다.
벼랑 끝.
헥토르의 명운은 이번 전쟁에 달렸다.
상대의 회유의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벼랑 밑으로 떨어질지언정 헥토르로서 존재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헥토르는 헥토르로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국에 굴복해서도, 전쟁의 책임을 모두 드미트리에 전가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 헥토르가 어떤 나라인지, 한때는 강대국으로 불렸던 헥토르의 저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 줍시다!”
“개 같은 발할라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시다!”
감정에 동조했다.
헥토르의 별.
헥토르가 자랑하는 영웅이 왕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백성들은 거부할 수 없는 천명(天命)처럼 받아들였다.
“헥토르를 위하여!”
“헥토르를 위하여!”
“헥토르를 위하여!”
들끓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팔락.
에드윈 헥토르는 망토를 휘날리며, 직접 전투에 가담하기 위한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 위치로!”
* * *
전투가 코앞이었다.
성벽 위에서 발할라의 군대를 바라보며, 버틀러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헥토르와 발할라.
전력의 차이가 심각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발악해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승산은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싸우시려는 겁니까?”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 한두 번의 교전은 얘기가 다르다.”
“……그게 무슨.”
이번 전쟁.
에드윈 헥토르는 핵심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발할라가 서두르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다. 목적이 헥토르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닌 우리 너머에 있는 드미트리로 진격하는 것이고, 그들로서는 서두르는 만큼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겠지. 만약 일 년 전의 발할라였다면 그런 과감한 진격조차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발할라는 아니다. 내전으로 속이 곪아 터졌고, 로만 드미트리와의 분쟁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일부 병력은 남부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고 있는 상태. 상대가 제국인 것은 맞으나, 현재의 전력이 제국의 명성에 걸맞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희보다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동의한다. 그렇기에, 적들의 자만심을 이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전투가 중요하다.”
그때만 해도.
왕국 연합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은 시점이라, 에드윈 헥토르는 본인이 반전을 만들고자 했다.
“버틀러,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를 기억하나.”
“……당연합니다. 지금은 드미트리를 따르는 입장이나, 그때의 일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때의 나는 어째서 상황을 주도하고도 카이로에게 패배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유리하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후방의 워프 게이트를 확보한 상태에서, 나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변수만 차단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상대는 겨우 소수일 뿐. 그래서 산으로 병력을 밀어 넣었고, 상식을 벗어나는 괴물 같은 무력에 우리는 수많은 병사를 잃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
참담했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실수를 외면하지 않았다.
본인의 실수를 되새기며,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달음을 얻었다.
“발할라는 그때의 나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헥토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전력이 명백하게 우위라는 생각에. 나보다도 더 안일하게 병력을 밀어 넣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강력한 한 방을 먹일 수 있다면, 그때의 내가 참담한 패배를 맞이했듯 발할라를 한 번은 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방이 반전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꿀꺽.
버틀러가 마른침을 삼켰다.
헥토르의 후계자.
그가 대체 언제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그의 곁을 지킬수록, 에드윈 헥토르를 향한 버틀러의 충성심은 깊어져 갔다.
“알겠습니다. 에드윈 왕자님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같이 뛰어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를 것이다.
정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버틀러는 진심으로, 에드윈 헥토르가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느꼈다.
그때였다.
“공격하라!”
“와아아아!”
저 멀리.
발할라 제국군이 밀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에드윈 헥토르의 신호에 따라 헥토르 왕국군은 전투를 준비했고, 제국군이 펑펑 발사해 대는 마법은 마법 방어진이 보호해 주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었다.
병사들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적들이 충분히 밀고 들어올 때까지 침착하게 때를 기다렸다.
‘예상대로다.’
적들.
전장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지나가는 발밑에는 기름통이 숨겨져 있지만, 그들은 무턱대고 달려드는 선택을 내렸다.
적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순간.
“공격하라!”
에드윈 헥토르가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화살을 발사함과 동시에, 에드윈 헥토르는 상단전을 열어 마력을 폭발시켰다.
화악.
천공의 마탑주.
그를 흡수하면서 그는 7서클의 경지에 올랐다.
그건 단순히.
수치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5서클이었을 때도 그 이상의 위력을 보여 주었던 마법사가, 자신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거론되던 세월의 문제를 해결했다.
마나가 폭발할 듯 일어났다.
상단전의 연구를 통해 그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고서클 더블 캐스팅(double casting)에 성공했다.
“버닝.”
화륵.
화르르르르륵.
몸이 불에 타올랐다.
피닉스의 비기를 받아들인 직후.
“어스퀘이크(Earth Quake), 파이어 스톰(Fire Storm).”
콰르르르릉.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7서클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어스퀘이크의 힘에 땅바닥이 내려앉으며 지진이 일어났고, 움직임에 제한받은 발할라의 병사들을 단번에 파이어 스톰이 쓸어 버렸다.
동시에 기름이 격렬한 폭발을 유발했다. 발할라 마법사들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마력에 빨간 머리카락이 팔락일 때마다, 그는 의식을 여러 개로 쪼개어 적들의 마법을 차단하고 오히려 반격했다.
천공의 마탑주가 했던 말.
에드윈 헥토르의 재능은 진짜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발할라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이자, 재앙이었다.
그날.
발할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성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을 명했고, 그것이 움베르토가 전달받은 헥토르의 첫 번째 승리였다.
* * *
전쟁이 발발하고 약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크로노스 제국군.
움베르토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지휘관 솔레르 백작은 담담한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죽여!”
“움베르토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라!”
움베르토.
그들이 궁지에 몰렸다.
최전방 방어 진지가 무너진 이후 꼬리를 말고 도망치던 그들이, 수도를 앞에 두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그들의 수도는 수성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옹성(鐵甕城)이라고 불리는 중간 포인트에서 성문을 걸어 잠갔고, 솔레르 백작은 곧바로 그들을 공격하는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없다.’
최근 일주일.
예상과는 다르게 좋지 않은 소식이 연달아 들렸다.
발할라 제국은 로만 드미트리를 오래 붙잡을 수 없다고 말했고, 드미트리와 헥토르를 공격한 군대가 각각 패배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였다.
물론 아직 전쟁의 양상은 유리했다.
드미트리를 공격한 부대는 궤멸당했으나 발할라와 헥토르의 싸움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카이로 왕국과 남부 삼국의 경우에는 크로노스 제국의 강력한 공격에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를 맞이했다.
분명히 유리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복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아직은 발할라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지금, 어떻게든 움베르토만큼은 쓸어 버리고자 했다.
솔레르 백작이 소리쳤다.
“상대는 겨우 움베르토의 떨거지들이다. 단숨에 쓸어 버려라! 이번 전투마저 승리한다면, 앞으로 며칠 안으로 우리는 움베르토의 수도에 깃발을 꽂고 광란의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너희에게 약탈과 같은 승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허락하마!”
“와아아아!”
“공격하라!”
기세를 탔다.
함락이 코앞이었다.
그때였다.
“지휘관님. 발할라로부터 마법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전쟁 도중이다.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면…….”
“긴급입니다.”
말을 멈추었다.
긴급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의미.
순간 불길한 느낌에, 솔레르 백작은 마법 통신기를 받아 들었다.
“솔레르 백작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긴급으로 마법 통신을 요청하신 겁니까?”
* * *
통신기 너머.
스노딘 백작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적을 놓쳤습니다.]
“뭐라고요?!”
화들짝 놀랐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다.
그런데 벌써 로만 드미트리의 행적을 놓치다니.
이건 처음 계획과는 얘기가 달랐다.
[저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포위망을 완전히 뚫어 버렸다는 것이고, 그의 비정상적인 이동 속도로 보았을 때 어디에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부대에는 연락을 돌렸습니다만, 솔레르 백작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빌어먹을.”
탈칵.
그것으로.
통신은 끝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질 그때, 솔레르 백작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움베르토.
그들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시간을 최대한 벌 작정으로 꼬리를 잘라 내던 그들이, 아무리 철옹성이라지만 갑자기 결사의 항전을 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최후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방어 시설이 열악한 수도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그 이전에 승부를 보는 것이 승산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그들의 용기가 벼랑 끝에 몰려서 나온 것이 아닌, 한 존재로 인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때였다.
“크악!”
대열의 후방.
비명이 들리지 말아야 할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순간.
솔레르 백작은 고개를 홱 돌려, 비명이 들리는 장소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