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제2차 대륙 전쟁 (2)
발할라의 지휘관.
백전노장(百戰老將) 마론 자작은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로만 드미트리의 걸음을 늦춰라. 그를 죽이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영토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벌어들인다면 전쟁이 끝나고 네게 부귀영화를 선사하겠다. 명심하라. 그 이전에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국경을 빠져나간다면, 네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로서는 날벼락과도 같은 명령이었다.
대대적인 개편에서 자작의 작위를 얻은 그는, 꿈같은 권력자로서 삶이 아닌 전장으로 내몰렸다.
만약 상대가 일반적인 존재였다면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남부의 수십만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에다, 상대를 처리하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시간만 버는 임무이니 말이다.
문제는.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것이다.
일단 병력을 움직여 포위망을 형성한 그는, 신중한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그 이상은 먼저 달려들지 마라. 우리가 근처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의 이동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로만 드미트리를 먼저 공격하는 경우는 단 하나다. 워프 게이트와 같은 이동 장치를 활용하려고 할 때. 그때는 상대를 죽이겠다는 목적이 아닌, 우리가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동 장치의 파괴를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다들 비장한 표정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그들은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라고 믿었다.
살살 거리를 유지하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발목을 묶어 둘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크악!”
“막아! 포위망이 뚫려서는 안 돼!”
대화는 없었다.
서로의 의사 교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로만 드미트리가 갑작스럽게 달려들더니 길목에 존재하는 병사들을 다짜고짜 도륙해 버렸다.
거리 조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눈앞에 도달했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는 와중에 저 멀리 사라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였다.
신출귀몰(神出鬼沒).
눈으로 쫓아갈 수 없었다.
나름대로 정교하게 구성했다고 생각한 포위망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후퇴하라! 다른 부대들이 2차, 3차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으니, 우리는 병력을 보존하고 그들과 합류한다!”
작전을 바꾸었다.
이미 한쪽 포위망이 붕괴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꼬리를 붙잡겠다고 의미 없는 희생을 허락하느니, 차라리 돌아가서 다시 한번 포위망을 형성하는 게 실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마론 자작의 병력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1차 저지선이라면 2차, 3차, 그렇게 수많은 병력이 남부 밀림 지대를 중심으로 저지선을 형성했고, 어떤 방향으로든 그들에게 가로막힐 수밖에 없도록 판을 만들었다.
백전노장.
마론 자작의 경험은 말뿐인 것이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을 살려, 그가 악착같이 로만 드미트리를 막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이.
“네가 지휘관이구나.”
“?!”
마론 자작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서걱.
* * *
헥토르 왕국.
그곳도 비상이 걸렸다.
에드윈 헥토르는 왕국의 수뇌부들을 소집, 곧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버틀러가 말했다.
“조금 전, 발할라 제국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왕자님의 예상대로입니다. 발할라 제국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남부 밀림 지대에 고립시키고, 크로노스 제국과 같이 왕국 연합을 무너트릴 속셈이 분명합니다.”
발할라의 북진.
그들이 헥토르 왕국을 첫 목표로 삼은 이유는 드미트리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벌어진 내란과 남부 밀림에서의 전투로 발할라 제국의 힘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헥토르 왕국만의 힘으로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헥토르는 카이로 왕국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최근에야 식량 문제를 해결하면서 회복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발할라와의 전력 차이가 명백했다.
그들이 국경에 도달하는 순간 단번에 휩쓸리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길을 열어 줄 수는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적들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공백을 이용해, 우리를 짓밟고 드미트리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생각이겠지. 우리는 어떻게든 발할라의 진군을 막아야 한다. 이 나라의 사활을 걸고,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발할라의 영토를 빠져나올 충분한 시간을 벌어들여야만 한다.”
로만 드미트리의 생존.
그것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한계로 이동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라면 길을 막아서는 발할라의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발할라를 벗어나리라고 믿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왕국 연합은 대부분 로만 드미트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방식으로 전쟁을 진행해 왔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을 알았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감당해야 할 책임이 늘어날수록, 로만 드미트리 혼자서 그 모든 영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
고로.
결과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왕국 연합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두 제국의 연합을 무너트릴 수 있다.
“남부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켜라. 패전(敗戰)은 곧 헥토르, 나아가 왕국 연합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과 발할라 제국은 힘을 합쳤다. 세간의 소문대로 발할라가 정말로 크로노스의 개라면, 이번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것이 앞으로 대륙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의지를 불태웠다.
명령을 이행하러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자, 에드윈 헥토르도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헥토르 왕국은 현재 왕국 연합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남부의 삼국도, 드미트리와 카이로도. 당장 본인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길을 해결하기 바쁘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세력은 단 하나다.’
최근.
헥토르는 대단한 세력을 영토에 들였다.
그들은 바로.
대륙 제일의 마법사 집단이라고 불리는 천공(天空)의 마탑이었다.
* * *
왕국과 마탑.
둘의 관계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왕국은 마탑을 위해 영토를 내어 주나, 그렇다고 마탑에게 명령을 내릴 절대적인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에드윈 헥토르의 부탁에, 천공의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주어야지. 크로노스 황제는 마법사 실종사건의 주범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마법사가 고통을 받았고, 천공의 마탑은 그를 피해 이곳 헥토르로의 이주를 택했다. 그런데 이대로 왕국 연합이 무너진다면 천공의 마탑으로서도 앞으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또한, 헥토르가 발할라 제국을 물리치기 위해서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받으마.”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천공의 마탑주.
그는 무려 7서클의 마법사였다.
게다가 천공에는 수많은 마법사가 소속되어 있기에, 그들의 합류는 공성전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할 것이다.
이로써 발할라 제국과의 전력 차이를 메울 해결책을 마련했다.
만약 천공의 마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에드윈 헥토르는 발할라와의 전면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천공의 마탑주가 말했다.
“그런데 에드윈.”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동안 가르쳤던 ‘그것’은 열심히 수련했나.”
그것의 정체.
바로 천공의 비기였다.
에드윈 헥토르가 천공의 마탑주와 사제(師弟)의 연을 맺은 직후, 그는 자신을 7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만들어 준 비기를 전수해 주었다.
그때부터 에드윈 헥토르는 열심히 수련했다.
실제로 마법적으로 발전하는 느낌을 받았기에, 이것을 토대로 6서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질문은 조금 느닷없었다.
하지만 스승으로서 물어볼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에드윈 헥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덕분에 확실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래?”
이상했다.
천공의 마탑주가 실실 웃었다.
그것은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인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악귀와도 같은 표정을 보이며 그가 탐욕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충분히 무르익었겠구나.”
그 순간.
팟.
화악!
어둠의 기운이 폭발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황급히 마력을 일으켰지만, 어떻게 대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어둠의 기운에 잠식되어 버렸다.
* * *
어둠 속.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끈적끈적한 늪지대에 빠진 것처럼 몸은 자유롭지 못했고, 사방이 어두웠기에 시력이 온전한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청력만큼은 건재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둠에 잠식되어있는 지금, 천공 마탑주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너로서는 의문스럽겠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내가,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실실 웃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상대의 표정이 떠올랐다.
“멍청한 녀석.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천공의 진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해 봐. 크로노스 제국에서 마법사들의 실종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왜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인 천공의 마탑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크로노스 제국은 천공의 마탑이 이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시늉을 보였지만, 결국은 순순히 길을 내준 이유가 무엇일까.”
숨이 막혔다.
에드윈 헥토르는 목을 움켜쥐고 싶었으나, 보이는 것도 손에 느껴지는 감각도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크로노스 황제 폐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였다. 내가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한 이유는, 네 재능을 잘 키워서 집어삼키기 위함이었지. 그런데 네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된 핵심 인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때를 미루었다. 당장에라도 네 심장을 씹어 먹고 서클의 마나를 흡수하고 싶었지만, 찬란한 네 재능보다 ‘에드윈 헥토르’라는 존재의 사회적인 위치가 활용성이 있다 보니 욕구를 참을 수밖에 없었지. 그동안 네가 널 얼마나 잡아먹고 싶었는 줄 알아? 참고로 말하자면 마법사들의 실종 사건에는 내가 저지른 사건도 몇 개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남들을 집어삼킴으로써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샐러맨더 대륙.
알렉산드르는 최초의 선구자라고 불린 만큼, 그가 내린 뿌리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크로노스 황제도.
발할라 황제도.
비에토 공작도, 천공의 마탑주도.
모두 알렉산드르의 충성스러운 개였다.
그들은 특별한 조건이 부합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로만 드미트리라는 강적의 출연에 조용히 존재감을 숨겼다.
마치 물밑에서 공격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악어처럼.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난리를 피우든 존재를 감추던 그들이, 이번 발할라 사건을 기점으로 모두 이빨을 드러냈다.
동시다발적이었다.
알렉산드르가 승리를 확신했던 이유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정말 철저하게 그 누구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도록, 그는 오랜 시간 대륙 정벌의 야망을 준비해 왔다.
“원대한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 헥토르 왕국은 너만 없다면 무너져 버릴 테니, 이제는 너를 집어삼켜 내 목적을 이루겠다.”
꾸르르륵.
어둠 속에 잠겼다.
심해(深海)에 빠져들듯.
그렇게, 에드윈 헥토르는 정신을 잃어 갔다.
* * *
순간.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떠올랐다.
“크로노스 제국은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한다. 인간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어떠한 명령이든 따르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리지. 우리는 그동안 크로노스가 흑마법을 기반으로 해서 벌인 일들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확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삼아야만 한다.”
훈련 과정에 있었던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꼭두각시로 전락한 존재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게 너희일지라도, 나의 가족일지라도. 크로노스에게 잠식되어 드미트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존재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드미트리의 법도를 바로 세울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경고성 발언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전생에는 실제로 그러한 예가 있었고, 그간의 정으로 법도를 어긴다면 세력 전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런 경험을 했었다는 것.
그것은 현생의 인연들로서는, 정말로 다행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너희에게 정신 지배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 주마.”
로만 드미트리는 세상 그 어떤 무공으로도 정신을 무너트릴 수 없는, 환마의 방어 무공을 모두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 순간.
번뜩.
에드윈 헥토르가, 눈을 부릅뜨며 어둠 너머를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