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제2차 대륙 전쟁 (1)
움베르토 국경.
최전방 방어 진지를 수호하는 움베르토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국경 너머를 바라보았다.
펄럭.
바람에 깃발이 휘날렸다.
크로노스 제국의 상징을 내세우고 진군하는 적들의 모습은, 마치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인간의 시야로는 모두 담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일까.
곧 있으면 저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자꾸만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칼데론 드레이크.
움베르토의 후계자이자 최전방 방어 진지의 지휘관인 그가, 담담한 얼굴로 부관에게 말했다.
“크로노스의 병력은?”
“……패밀리어(Familiar) 마법을 사용해 정찰한 결과, 얼추 오십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크로노스 제국이 마탑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나, 움베르토만의 힘으로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습니다.”
“이로써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결탁은 사실로 증명되었군.”
발할라 황제의 죽음.
그로 인해 생겨났던 의문이,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으로 해소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 황제를 죽인 이유는 크로노스와의 결탁 때문이었다.
발할라는 대대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악행을 내세웠지만, 발할라 제국의 행보에 맞춰 크로노스가 국경을 넘어선 순간부터는 논쟁의 의미가 없었다.
서로의 실익이 명확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서로를 도와주는 형태는, 드미트리를 도와 악착같이 싸워야 하는 충분한 명분을 주었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말했다.
“이번 전쟁은 국가적인 위기다.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병력은 아직 발할라에 고립된 상태고, 동시에 카이로의 국경을 넘어선 크로노스 제국으로 인해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다. 헥토르 왕국도 마찬가지다. 발할라 제국이 북진을 위해서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는 지금, 헥토르로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겠지.”
그 말인즉.
“지금 눈에 보이는 크로노스의 대군은 남부 삼국(三國)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는 의미다.”
“……크흠.”
“하.”
사방에서 탄식이 들렸다.
칼데론 드레이크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오갔던 사람들이지만,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하는 상황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왕국 연합에 가담한 순간부터, 자유가 어떤 것인지 맛본 순간부터 그들에게 순순히 무릎을 꿇는 선택지는 없었다.
싸울 것이다.
크로노스를 따랐던 오델리아의 최후만 보더라도, 무력한 항복은 움베르토의 몰락으로 직결될 뿐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당장 남부 삼국에 연락을 돌려라. 총력전(總力戰)이다. 각 국경을 수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둔 채, 모두 이곳에 병력을 집결시켜야만 한다. 우리가 만약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크로노스와 발할라라는 두 괴물을 상대하는 상황에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알겠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
움베르토는 크로노스가 내민 손길을 끝까지 거절한 강단이 있는 나라였고, 칼데론 드레이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다.
한때 크로노스가 A급 경계 대상으로 분류했던 인물.
드레이크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의 변수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칼데론 드레이크의 계획은 시작부터 차질이 생겼다.
“지휘관님! 각국으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는데, 무법지대의 폭동으로 인해 병력의 차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법지대(無法地帶)의 폭동.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변수였다.
* * *
삼국 연합의 병력.
그중 상당수는 한때 오델리아 왕국이라고 불렸던, 남부의 무법지대에 투입된 상태였다.
지휘관은 베르베르 후작이었다.
프랑크의 귀족인 그는, 삼국 연합을 대표해서 무법지대의 폭도(暴徒)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무법지대의 폭도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단번에 쓸어 버려라.”
상황은 순조로웠다.
나라가 망해 창칼을 쥔 폭도들은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고, 완벽하게 무장한 삼국의 병사들이 거세게 밀고 나가면서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두세 달 정도. 그 안에는 정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움베르토의 지원 요청을 받기 1시간 전.
무법지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푹.
“크악!”
“마, 막아!”
폭동이 일어났다.
몸을 숨기고 있었던 폭도들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는데, 이전 전투와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일반적인 폭도들은 체계를 갖춘 군대를 상대로는 무력했다.
그래서 무법지대를 정리하는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은 폭도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광기에 물든 것처럼.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달려드는 그들로 인해, 사방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콰득!
폭도가 삼국 병사의 목덜미를 물었다.
복부가 찔리고 우악스러운 손길이 얼굴을 밀어내는데도, 그는 끝까지 병사의 목을 완전히 뜯어 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상대의 숨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폭도는 복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다음 상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죽음보다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득달같이 달려드는 폭도들로 인해서 삼국 연합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그들 뒤에.
폭도들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스스로를 새로운 왕이라고 표현한 그는, 카르만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나의 백성들은 들어라! 감히 남부의 왕국들은 나의 영토를, 너희들의 터전을 차지하기 위해 더러운 속내를 드러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다. 한때는 오델리아라고 불렸으나, 나 카르만에 의해 이곳은 카르만 왕국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카르만을 위하여!”
“카르만을 위하여!”
다들 광기에 물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르만조차도 눈이 붉게 일렁거렸고, 그는 달려드는 폭도들을 뒤따라가며 쓰러진 병사들의 목숨을 끊었다.
푹.
“죽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명의 죽음.
극한의 쾌락을 선사했다.
그러던 중, 바닥에 쓰러진 한 기사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는 대체 무슨 속셈이냐. 이건 이, 일반적인 힘이 아니다. 너는 분명히…… 컥.”
콰득.
검으로 등을 찍어 버렸다.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리자,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뒤로 젖혔다.
카르만이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포로 물든 눈에 히죽 웃음을 보이며, 카르만은 작은 단검을 꺼내 그의 얼굴을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이래서 눈치가 빠른 녀석들이 싫다니까.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내가 특별히 말해 주도록 하지. 나는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오델리아니, 카르만 왕국이니. 이딴 말들은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하지.”
꾹.
손에 힘을 주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단검에, 기사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니까 지옥에 가서 지켜보라고. 제국에 대항하는 버러지 새끼들이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그 말을 끝으로.
“크악!”
카르만은 기사의 얼굴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 * *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마법 통신기를 통해 각기 다른 세 개의 연락을 받았다.
첫 번째는 크리스였다.
[발할라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렸습니다. 워프 포인트에 도착하고 제일 가까운 프랑크 국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 이동해도 최소 3일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프랑크 왕국에 도착하는 대로 드미트리로 복귀, 병력을 집결해 드미트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확보하고 제국의 공격에 대항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하오문, 발할라 지부였다.
[발할라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병력을 집결해 북진을 준비하면서, 남부의 워프 게이트를 차례로 폐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부 밀림 지대로도 병력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주군을 그곳에 고립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드미트리의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조금 전, 크로노스 제국이 카이로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병력은 최소 50만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카이로 왕국을 도와주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명령하셨던 대로 드미트리를 지키기 위한 핵심 전력은 남겨 두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카이로 왕국, 움베르토 왕국이 공격당하고 있으며, 헥토르는 발할라와의 전투를 대비, 그리고 무법지대에서 폭동마저 일어났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왕국 연합이 위험합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의도를 파악했다.
‘내 발을 묶고 시간을 버는 사이, 주변을 정리하겠다는 속셈인가.’
알렉산드르.
그는 분명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쟁을 선포한 이유는 발할라를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여론은 다시 로만 드미트리로 향할 것이다.
발할라 황제가 죽었기에 이전만 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테고, 무덤의 자료를 공개하자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반전의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많은 반발에 부딪히겠지만, 알렉산드르는 발할라의 분노가 극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사삭.
사사삭.
어둠으로 물든 주변으로.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 * *
익숙한 상황이었다.
전생.
그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천마 백중혁의 압도적인 무력을 경험한 정파 무림은, 정면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전장을 넓게 가져갔다.
백중혁을 제외한 모든 전장에서 승리한다면, 결국은 수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확신으로 백중혁을 배제한 주변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참.
같잖은 작전이었다.
자신을 쓰러트릴 자신이 없기에, 시간을 벌면서 전력을 갉아먹는 방법을 택하다니.
그때.
백중혁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주변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인기척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크리스. 지금 내가 말하는 명령을 모두에게 전달하라.]
전생의 백중혁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전장에서 적수가 없었고, 얼마나 많은 적이 달려들든 검 한 자루로 그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전부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벌이었고, 혼자만 뛰어나다고 해서 무림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사람이 필요했다.
일을 믿고 맡길.
그리고 자신이 없는 전장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상대를 짓밟고 굴복시킬 그런 존재들이.
그래서 사람을 받아들였다.
한스를 시작으로 케빈, 크리스, 헨더슨 등등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앞으로 자신이 형성할 울타리가 그 어떠한 위협에도 굳건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전생도 마찬가지였다.
광마 한 명을 처리하기 위해서 수많은 정파인들이 죽어 나간 것처럼, 천마 백중혁의 울타리는 적의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드미트리.
카이로.
헥토르.
그리고 남부 삼국.
거대한 울타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그들 또한 감당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신의 울타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신에게 받은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발휘해, 어떻게든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드미트리는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철옹성(鐵甕城)을 형성할 것이다.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각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라. 내가 없는 왕국 연합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가치를 적들에게 증명하라.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번뜩.
주변에서 붉은 불빛이 일어났다.
그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걸음을 지연시킬 뿐, 그들의 목적은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갈 것이다.]
툭.
마법 통신을 끊었다.
그러고는.
“버러지 같은 새끼들.”
적들을 향해, 수많은 불빛으로 일렁이는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