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악역(惡役) (2)
격렬한 전투였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밀려드는 적의 모습에, 크리스가 선두의 적을 베어 내며 소리쳤다.
“대형을 유지하라! 적들의 공격에 휘말리지 말고, 훈련 때와 같이 열 명씩 지정된 위치를 고수하라!”
그동안의 훈련.
난전(亂戰)을 대비한 훈련도 있었다.
드미트리의 전투는 보통 로만 드미트리가 선봉으로 나섰고, 그렇게 한바탕 쓸어 버린 전장을 병사들이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웬만한 적들을 상대로는 충분히 먹혔다.
하지만 발할라 제국을 상대하는 지금 무분별하게 달려들었다간, 압도적인 머릿수에 휘말려 피해가 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대형을 이루었다.
천마신교의 전술이었다.
전장을 세세하게 나누어 열 명씩 조를 이루었고, 그들은 서로의 등을 맞대며 유기적으로 공수 역할을 전환했다.
5명이 공격을 시도한 이후 적들의 공격을 나머지 5명이 수비, 이후에 수비하던 이들이 반격을 시도하면 공격하고서 숨을 돌리던 이들이 다시 수비의 역할. 열 명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열 명의 대열이 쌓여서 백 명을, 그렇게 천 명의 위치를 구성했다.
안정성을 택한.
매우 수비적인 전술이었다.
들어오는 적을 맞받아치는 형태였지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을 믿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폭발음이 들렸다.
대열과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휩쓸고 다니는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안정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라도 빠르게 제거해야 로만 드미트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텐데, 여기나 저기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수적 우위가 생각처럼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번뜩.
팟, 파파파팟.
크리스는 논의였다.
열 명의 대열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흩뿌렸다.
크리스는 의도적으로 고수라고 판단되는 적을 처리했다.
병사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적들은 균열을 일으키기에, 그는 빠르게 움직이며 위험 요소를 맡았다.
케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미트리의 악귀가 날뛰었다.
로만 드미트리처럼 전체 전장을 무대로 삼지는 못하지만, 대열을 갖춘 병사들의 선두에는 케빈이 길을 열고 있었다.
확실히 드미트리의 저력은 대단했다.
겨우 수천의 병력을 대동하고 수십만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은 일이나, 시간이 갈수록 크리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아.’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
적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드미트리는 항상 어떤 변수든 대비하는 상황을 훈련하지만, 전대 발할라 황제를 처리하고서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대는 발할라 전체였다.
분명히 얼마 전만 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하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다 보니, 언제까지 버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퍽.
적의 심장을 관통했다.
부르르 떨며 쓰러지는 적을 내팽개치며, 크리스는 피로 물든 얼굴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남부 밀림 경계에 워프 포인트를 설치해 두었다. 그곳까지 도망간다면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하다. 워프 포인트의 한계로 단번에 드미트리로 이동할 수는 없지만, 당장 따라붙는 병력만 따돌려도 숨을 돌릴 여유가 있겠지. 문제는 남부 밀림이 매우 넓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적만 수십만 명. 만약 발할라가 병력을 더 불러들였다면,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수밖에 없겠지.’
크로노스 제국.
그들과 전쟁을 치렀을 때와는 달랐다.
이곳은 발할라의 영토이며, 발할라 제국의 전사들은 일반 병사들보다 뛰어났다.
실제로 크리스의 공격에 반응하는 존재들도 있었다.
짐승의 감각을 발현하는 야인들은 쉽게 당해 주지 않았고, 그렇게 수차례 반복되는 공방이 조금씩 피로감을 주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드미트리의 편이 아니기에, 크리스는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드미트리를 도와라!”
“세계수의 구원자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다크 엘프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일련의 상황.
다크 엘프들은 혼란스러웠다.
발할라 황제를 죽인 로만 드미트리의 행동은, 다크 엘프들로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르칸 님.”
“저희에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일반 엘프들이 재촉했다.
명령권은 다르칸에게 있었다.
이번 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고, 상식적으로는 발할라를 도와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것이 옳았다.
다크 엘프와 발할라는 공존하는 사이다.
발할라 제국은 남부 밀림에 터전을 잡은 다크 엘프들의 영역을 인정해 주었고, 다크 엘프는 선대의 약속을 이행하며 서로를 도왔다.
그런데 만약.
방관하거나, 드미트리를 돕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발할라의 영토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남부 밀림의 전사들이 다크 엘프들을 공격할 것이며, 그것은 다크 엘프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마른침을 삼켰다.
드미트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대의 약속도, 다크 엘프 일족의 명운도.
세계수의 뜻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엘프 종족에게 세계수는 절대적이었고, 세계수가 축복을 내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존재라고 볼 수 없었다.
이는 흑백논리(黑白論理)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의라면, 그들을 적대하는 발할라는 악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가슴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다크 엘프 일족은 세계수의 뜻을 따른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남부의 무덤에 들어갔다. 발할라 황제를 죽인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며,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서 남부 밀림에서 빠져나가도록 목숨을 바칠 것이다!”
“족장님의 뜻을 따릅니다!”
“공격하라!”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들이 활을 들었다.
손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검은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적들을 향해 발사했다.
파파파파팟.
퍼퍼퍽!
“크악!”
“다, 다크 엘프들이 발할라를 배반했다!”
“다크 엘프들도 죽여라!”
화살 공격은 매서웠다.
단단한 강철 갑옷마저도 단번에 관통해 버리는 일격에, 발할라의 전사들은 눈에 불을 켜며 다크 엘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전진은 드미트리에 의해 막혔다.
크리스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더니, 다크 엘프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가 길을 막겠습니다! 원거리 공격을 부탁드립니다!”
그때부터.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안정적으로 수비를, 다크 엘프들이 원거리에서 화살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그리고.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다르칸은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다.
그의 검에서 휘몰아치는 검은 오라가 발할라의 전사들을 베었고, 그도 대열과는 상관없이 전장을 휩쓸고 다녔다.
엘프 특유의 통통거리는 움직임이 압권이었다.
사방에서 공격이 치고 들어와도 유연한 움직임으로 비껴 내더니, 얇고 기다란 검으로 순식간에 상대의 미간을 관통해 버렸다.
퍽-
그 뒤로.
다크 엘프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했다.
사방에 작렬하는 마법에, 어느 순간부터 발할라의 전사들은 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가 기세를 잡았다.
시험의 무대.
그곳에 들어찬 발할라의 전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가며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와 뒤따라오는 병사들의 격렬한 저항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며 길을 형성했다.
그래서일까.
드미트리의 병사들과 다르칸을 따르는 다크 엘프들은, 어쩌면 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마침내.
밀림지대에 들어섰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이건만, 빽빽하게 자라난 거대한 나무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번뜩.
나무들의 나뭇가지 위로.
수많은 붉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남부 밀림의 전사들.
그들이 황명에 따라,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 * *
원숭이의 형태를 한 사내였다.
나뭇가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말했다.
“내 이름은 무로로다. 로만 드미트리. 나는 네가 시험의 무대에 통과했다는 말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비록 발할라 태생은 아니나, 축제의 무대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발할라의 내란에도 가담한 너라면 남부의 무덤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지. 그런 네가. 대체 왜 발할라의 황제를 죽였지?”
혀를 날름거렸다.
언뜻 드러난 얼굴은, 수많은 전투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밀림 지대에 들어간 이후, 발할라의 전사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무로로의 명령을 기다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남부의 무덤에서 비에토 공작이 크로노스 제국의 개라는 정황을 발견했다. 발할라의 전사들은 마법 방해로 나와 비에토 공작이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그는 진실을 인정하고 나를 도발했다. 나는 발할라의 황제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하는 그를 죽였을 뿐이다.”
“재밌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무로로가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원숭이 일족의 족장.
그는 남부 밀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나무가 빼곡히 자라나 있는 밀림 지대에서, 무로로를 이길 수 있는 전사는 없다고 단언했다.
“너의 말을 믿는다. 물론, 우리의 연행에 따라 조사에 성실히 임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겠지만 말이야.”
협상 결렬이었다.
연행에 따라가는 순간.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실을 말해 주어도, 이미 무로로를 비롯한 발할라의 전사들은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발할라는 제국이다.
그들의 황제가 크로노스의 개라는 사실을.
설령 진실일지라도, 그들은 눈앞의 진실을 외면할 것이다.
그때였다.
[크리스.]
전음이었다.
크리스는 살짝 눈썹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발할라 제국이 움직인 이상, 크로노스 제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드미트리가 위험하다. 일단 내가 길을 열 테니, 너는 병력을 데리고 드미트리로 복귀하라. 드미트리의 안전을 확보하고, 왕국 연합을 소집해 발할라 제국,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을 준비해야만 한다.]
가설이었다.
크로노스는 특별한 이유로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발할라 제국을 움직인 지금도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야만 했다.
크리스가 알겠다는 말을 전음으로 보내는 순간, 무로로가 벼락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공격해!”
* * *
파파파팟-
사방에서 무언가가 발사되었다.
날카로운 독침이었다.
피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위험한 상황을 정면에서 맞닥트리며, 단전에서 들끓는 마나를 일순간 폭발시켰다.
탁.
천마군림보, 일곱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앞선 걸음을 생략했다.
차례로 이어지지 않는 걸음은 위력을 반감시키지만, 후반부 초식과 사용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번뜩.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소음이 사라졌다.
무로로의 명령에 득달같이 달려들던 전사들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하얗게 물든 세상이 다시 원래의 색깔을 되찾았을 때 귀를 찢을 듯한 엄청난 폭발음이 뒤따라왔다.
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소멸(消滅).
전방에 존재하던 이들을 찢어발겼다.
수백의 전사들이 달려드는 자세 그대로 소멸되었고, 햇볕을 가릴 정도로 빼곡하게 자라 있던 나무들도 일부 사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하늘에서 햇볕이 지상을 비추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무로로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위력에, 수적 우위를 앞세우던 그로서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지금이다.”
“주군을 따르라!”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크리스와 병사들이 따라붙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적들을 차례로 베었고, 크리스와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이번에는 방어적인 대형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나아갔다.
다크 엘프들도 마찬가지로 드미트리의 대열에 합류했다.
의도가 명백했다.
길을 열고자 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빼돌리려는 움직임에, 무로로는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막지 마라! 우리의 목표는 로만 드미트리다. 그 한 놈만 처리해도 우리는 복수에 성공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일격.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방해될 수 있는 요소들을 버리고,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을 처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크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병사들과 다크 엘프들 또한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도망친다고 해서 특별히 문제가 생길 것은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 돌아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작전은 오히려 발할라에 희소식이었다.
길이 열렸다.
크리스와 병사들이 그 길을 향해 나아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혼자 남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리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믿었다.
발할라 황제를 죽이고도 그의 명령을 따랐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우뚝.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또한.
무로로의 의도를 알았다.
괜히 격렬하게 싸우기보다는, 병사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은 남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묘한 상황이었다.
길을 열어 주는 발할라의 전사들.
홀로 남은 로만 드미트리.
크리스와 병사들의 모습이 멀어졌다.
활짝 열렸던 길목을 발할라의 전사들이 다시 막으면서, 로만 드미트리 홀로 남는 모양새가 되었다.
무로로는 생각했다.
계획대로 되었다고.
로만 드미트리는 아마도 일단 수하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도망칠 속셈이겠지만, 밀림 지대에서 발할라의 전사들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밀림 지대의 전사들을 모두 베어 버리지 않는 한.
악착같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따라붙어, 그가 힘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괴롭히고 또 괴롭힐 것이다.
경악스러운 위력의 검법.
그것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상대는 신(神)이 아니니까.
그런데.
“미리 말해 두지.”
최근.
로만 드미트리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생과 현생.
똑같은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육체가 다르기에, 환경이 다르기에, 경험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로 인한 성과는 달랐다.
고로.
“나는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끝까지 발할라의 긍지를 지키길 바란다.”
이번 기회로.
로만 드미트리는 현생의 전력을 확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