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남부의 무덤 (7)
두 존재 중 한 명.
어둠에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건을 기점으로…… 비에토 공작이 전면으로 나서 사람들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대중은 그들의 편입니다. 조금만 더 상황을 부추긴다면, 내란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이어서.
다른 존재도 말했다.
“발할라 황제는 이 상황을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그가 반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발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들의 보고 내용.
익숙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세계수를 통해 의문의 장면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루나 왕국의 여왕인 이사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서 알렉산드르는 모종의 작당을 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지금과 똑같은 내용의 보고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순간.
“푸핫.”
알렉산드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보고하는 사내들의 정체가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두 존재.
발할라 황제와 비에토 공작이었다.
그들은 덤덤한 얼굴로 마치 본인들이 이번 일의 장본인이 아닌 것처럼, 발할라 황실과 반란군이 서로를 물어뜯는 내용을 알렉산드르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크나큰 착각에 빠졌다.
발할라 황제의 만행을 이기지 못한 비에토 공작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슈테른 발할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부터 둘은 한패나 다름없었다.
손바닥 위.
발할라를 올려놓았다.
알렉산드르는 히죽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두 사내에게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드미트리로 인한 변수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었을 때 변수라고 표현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일을 앞당길 기회를 얻었지. 사람들을 선동하라. 사람들을 자극하라. 발할라가 전란에 휩싸이는 순간, 우리가 바라던 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하다는 표현.
적절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할지라도, 그는 반란의 소용돌이에서 알렉산드르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 말에 불과했다.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알렉산드르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이 장면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과는 달리.
현생의 자신은 그보다 월등했다.
그때였다.
의자에 몸을 기대는 순간, 알렉산드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홱.
“……세계수의 힘?”
그 순간.
알렉산드르는 이미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알아챘다.
세계수의 힘으로 자신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백 년만 일찍 이 세상에 나타났다면, 아마 우리의 계획은 큰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마침표를 남겨 둔 상황에서, 네가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디 발악해 보아라. 마지막 피날레는 격렬할수록 즐거움이 배가 될 테니까.”
어둠으로 물든 공간.
고개를 조아리고 움직이지 않는 두 사내와는 달리, 알렉산드르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한참이나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다시 현재.
기억의 조각들이 회수되었다.
알렉산드르의 모습이 바람에 흩어지며, 그 뒤로 발할라 황제가 웃는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크큭, 재밌지? 네 말처럼 슈테른 발할라는 우리의 꼭두각시였다. 우리는 그를 통해 발할라의 내부를 갉아먹으며, 발할라의 백성들이 황제에 대한 불만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낭만을 부르짖는, 순혈주의만을 추구하는 얼간이 녀석들.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발할라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하는 그들이, 발할라 황제라는 공공의 적을 무너트리기 위해 네 존재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대륙 정벌을 통해 발할라마저 완전히 집어삼킬 계획이었지.”
원대한 계획.
그것에는 때가 있다.
반드시 지금이어야만 했고, 슈테른 발할라는 계획을 위해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희생양의 역할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슈테른 발할라는 알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발할라 제국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렉산드르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곧바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신세였다.
평범한 삶을 원했으나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자리에서 내려가는 것 또한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미쳤다.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권력을 마음껏 즐겼고, 제주스 발할라를 죽였을 때의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서 눈에 거슬리는 모든 존재를 죽였다.
그렇게 악명이 쌓여 갔다. 사람들은 그를 잔인무도한 폭군이라고 불렀고, 당연히 발할라의 국정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발할라의 황제라는 껍데기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슈테른 발할라의 진실이었다.
처형을 당하던 순간.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보였다.
살겠다고 밧줄을 붙잡고 아등바등 발악하던 그 모습이, 슈테른 발할라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었다.
발할라 황제가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워. 너로 인해 슈테른 발할라는 폐기 처분되었고, 그간의 계획이 전면 수정되었다. 때마침 산체스가 내게 반란을 제안했거든. 우리는 슈테른 발할라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내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너의 신임을 얻을 생각이었다. 참 똑똑해. 어떻게 우리의 의도를 알아냈을까.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발각될 줄이야.”
가설은 진실이 되었다.
알렉산드르.
그가 준비한 세월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확인한 것은 아직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일련의 상황.
충격적일 법도 한데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했다.
상대가 뭐라고 떠들든,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내게 진실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남부의 무덤에는 왜 출입을 허락한 거지?”
* * *
사실.
발할라 황제를 의심하는 마음은 경계 수준에 불과했다.
헤르나드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에 대해 알아보려고 명령한 상태였지만, 진실에 도달하는 데까지는 분명히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발할라 황제는 남부의 무덤에 출입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분명히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얻게 될 텐데도, 괜한 변명으로 상황을 어영부영 넘겨 보려는 노력을 시도하지 않았다.
발할라 황제가.
하늘을 가리켰다.
“유희(遊戲)를 위해서다.”
“유희?”
“우리가 모시는 분은 재미없는 싸움을 싫어하신다. 최대한 반항하고 격렬하게 저항해야, 그 모두를 굴복시켰을 때의 희열이 대단한 법이지. 그리고 의심의 여지를 주기 싫었다. 네게 전적으로 호의적인 역할이어야 할 내가, 남부의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가는 분명히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지. 우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너는 충분히 눈치가 빠르니까.”
히죽, 웃었다.
“물론 겨우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 진실을 유추할 줄은 몰랐다. 카넬라스 발할라의 기록은 크로노스의 개입을, 코르테스와 슈테른의 기록은 후계자 책봉에 대한 부당함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 그 정보를 모두 알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배후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거든. 이런 것을 보면 카넬라스 발할라도 참 대단해. 기록실의 자료를 파기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 우리로서는 그 자료들을 사전에 제거할 수 없었지.”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진실에 도달했다.
그래서.
일부러 진실을 말해 주었다.
왜냐고?
지금부터가 쇼타임이었다.
발할라 황제는 얼굴 가득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진실에 도달했다. 내가 누구이고, 내 위에 누가 있으며, 슈테른 발할라는 사실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마저 알아냈다. 그래서 날 어떻게 할 속셈이지?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죽인다면. 너는 발할라의 황제를 죽인 악인이 될 것이다.”
주변을 걸었다.
사람들에게는 인자한 모습처럼 비추어졌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시야에 발할라 황제는 광기로 얼룩졌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봐라. 네 덕분에 나는 발할라의 영웅이 되었다. 발할라의 낭만을 되찾은, 순혈주의에 어울리는 진정한 황제! 우리는 너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드미트리 가문이라는 변방의 영지에서 시작해 너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말이야. 날 죽이는 순간 너는 반드시 나락에 빠질 것이다. 네 해명은 통하지 않도록 이미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상태고, 너를 찬양하던 발할라의 사람들이 모두 로만 드미트리에게 복수해야 한다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겠지. 그때부터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왕국 연합의 오합지졸(烏合之卒)들로는 발할라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도 버거울 테고, 그사이에 크로노스 제국은 원대한 계획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살인의 대가.
매우 치명적이었다.
의도를 알았다고 한들,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발할라 황제를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날 죽이지 않을 수도 없겠지. 네가 날 살려 보낸다면, 나는 드미트리를 공격할 기반을 갖출 것이다. 언젠가는 드미트리를 공격하도록. 지금은 너에 대한 여론이 좋아서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겠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 같아서 언제든 변화할 여지가 있지. 특히 너와 같은 외부인에 대한 평판을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자, 선택하라. 날 죽일 것이냐, 죽이지 않을 것이냐.”
양팔을 뻗었다.
마치 죽이라는 듯이.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발할라가 시작된 곳이다. 남부 밀림. 이곳에서 황제인 나를 죽이고 도망치는 것은, 장담하는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가 주도하는 이 판에서, 절대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 * *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발할라의 백성들.
발할라의 전사들.
로만 드미트리를 보기 위해 먼 걸음을 달려온 그들은, 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경외심(敬畏心)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그들은 확신했다.
발할라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한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위대한 전사가 될 것이라고.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타오르는 열망.
만약 그것을 배반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차갑게 식은 열망은 강렬한 분노로 변할 것이다.
발할라 황제가 노린 판도였다.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했다.
먼저 마중을 나와, 음성을 차단하고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을 떠보았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타오르는 불길 속.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아낙네가 백중혁을 바라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 악마 같은 자식!”
“너희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대체 왜! 너희 마교 녀석들은 사람들을 해치고 다닌단 말이냐!”
아낙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부르짖는 그들의 말에, 백중혁은 그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며칠 전.
정파 무림의 녀석들이 먼저 마교인의 가족들을 쓸어 버렸다.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이후에, 보란 듯이 전시했다. 그것의 복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를 막고 진실을 보지 않으며, 마교가 악(惡)을 상징한다는 편견에 갇혀 소리를 꽥꽥 질렀다.
마교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분노는 그 어떤 것으로든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날.
백중혁은 깨달았다.
마교의 방식.
사람들은 무조건 마교를 악으로 몰았다.
일반적인 상식에 약육강식의 삶은 무조건 잘못되었기에, 정파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책임을 마교에 물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정파인들 또한 악마와 같은 일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마교가 잘했다고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 사는 삶은 다르지 않았다.
마교든, 정파든.
둘 다 서로의 이익을 추구했다.
다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은 정의와 악을 구분하며 불렀다.
그때,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천마 백중혁은 어떤 삶을 택했을까.
발할라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 발할라 황제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 순간.
콱!
“……?!”
머리를 움켜쥐었다.
당황한 발할라 황제가 눈을 부릅뜨자, 그의 머리를 젖히며 내려보았다.
“네가 뭔가 크게 착각한 모양인데.”
사람들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발할라의 영웅.
레드포드를 구한 은인.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친 용맹한 전사.
온갖 듣기 좋은 수식어들이 그를 표현했다.
이번 삶은 인간으로서의 선만 넘어서지 않는다면, 정파가 그러했듯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일을 저지르든 무조건 옹호해 줄 것이다.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니다.
겉으로는 인자했던 정파의 영웅이었으나, 뒤로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겁탈하던 쓰레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래 악역(惡役)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대로.
콰득.
발할라 황제의 머리를 비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