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2화 (372/615)

372화 남부의 무덤 (6)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선을 넘었다.

발할라 황제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실수하셨습니다.”

“글쎄. 너도 무덤의 자료를 봤다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발할라가 폭군이라고 비난하던 슈테른 발할라는 누군가의 꼭두각시였다. 그 사실이 그의 죄를 무마시켜 주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득을 보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는 되겠지.”

“로만 드미트리!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냐!”

바락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발할라를 구한 영웅이다.

발할라 황제는 은인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참아 넘길 수는 없었다.

“나는 발할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슈테른 발할라. 그 개자식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든, 당장 눈앞에서 발할라의 백성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그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이득을 본 존재라고? 반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나의 병사들, 내 사람들, 그리고 물질적인 요소들. 시체를 밟고, 내 손에 피를 묻히면서 고통과 시련을 감내했건만,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네가 어째서 감히그런 말을 내뱉는단 말이냐!”

주변에 마법이 형성되었다.

둘의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반란은 내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산체스는 나를 찾아와 반란을 일으키자고 말했고, 그것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너라고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설마 처음부터 발할라를 무너트리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이냐. 그게 아니고서는, 나를 이 일의 배후로 지목할 수는 없다.”

격정적인 목소리였다.

상대를 잡아먹을 듯, 발할라 황제는 진심을 토해 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했다.

상대의 얘기를 모두 듣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의심하게 된 세 가지의 포인트를 말해 주지.”

발할라 황제들의 기록.

그것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이상한 부분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슈테른 발할라가 누군가의 꼭두각시라면. 코르테스 발할라가 발할라의 미래에 도움도 되지 않는 14번째 아들을 선택한 것이 모종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그를 버린 것조차도 누군가는 이득을 보는 구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네가 아무리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너보다 이득을 본 존재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적을 제거한 나와 양대산맥의 한 축이 약해진 크로노스 제국조차도, 너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두 번째.”

말을 끊었다.

일단은 끝까지 들으라는 듯이,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얻을 이득. 그것은 드미트리와의 연합이다. 같이 반란을 이겨 냈기에, 슈테른 발할라를 만들어 낸 배후 세력은 드미트리와 적대적인 전대 황제가 아니라 드미트리가 신뢰하는 새로운 꼭두각시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이 주장은 카넬라스 발할라의 기록이 뒷받침한다. 크로노스 제국은 처음부터 발할라의 역사에 개입했고, 그들의 영향력이 지금까지 발휘되고 있다면, 이번 발할라의 반란은 앞으로 있을 대륙 정벌을 위한 초석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다.

허무맹랑한 시나리오.

하지만.

세 번째 포인트로 인해, 로만 드미트리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했다.

“세 번째는 발할라가 원했던 아름다운 결말에 대한 의문이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모두 네가 반란에 성공하기를 바랐다. 네가 끝까지 살아남아, 악의 무리인 발할라 황제를 무너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지. 그런데 사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대 황제가 공격적으로 헤르나드를 몰아붙였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내 행보가 너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냈다고 말했다. 일부는 사실이다. 그러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나는 진심으로 헤르나드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너희를 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극과 극은 통하기에. 너희가 살아남는다면 이상적인 결과이겠지만, 살아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 결과.

반란군은 살아남았다.

황제의 병력을 물리치고, 오히려 수도로 향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헤르나드의 상태는 생각 이상으로 처참하더군. 그래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강렬한 의지 하나로, 이미 내구력이 전부 닳아 버린 헤르나드의 성벽을 붙잡고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반란군의 아름답고 숭고한 이야기가 사실은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각본이 아닐까. 발할라 황제. 현실적인 이야기는 네 죽음으로 끝을 맺었어야 했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네가 발할라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금, 이와 같은 의문은 피할 수 없다.”

관계가 뒤틀렸다.

발할라 황제 앞에서 예민한 문제를 거론한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

“지금 나누는 대화는 너의 솔직한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심증만으로는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겠지. 네가 반란의 배후라는 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가 거슬린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이 자리에서 제거할 생각이다.”

* * *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의심이 된다고 해서.

발할라의 황제를 죽이겠다니.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에, 발할라 황제는 상대의 발언을 그냥 협박으로 넘겨 버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어떤 인물인가.

죽인다고 말했다면 죽일 것이고,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황제의 신분에 연연할 존재도 아니었다.

발할라 황제와 로만 드미트리. 서로가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 황제를 위협하기 위해 협박성의 발언을 내뱉었지만, 만약 설득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사실을.

판을 뒤엎었다.

해명의 의무를 상대에게 떠넘기고,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하게 이 판을 주도하는 방향을 택했다.

발할라.

어차피 무릎 꿇려야 할 존재.

극단적인 방향을 택했을 뿐이다.

거슬리는 의문을 안고, 발할라 황제를 받아들이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해명해서 설득하든.

이 자리에서 죽든.

발할라 황제의 몫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순간 발할라 황제가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큭, 크크크큭. 씨발, 눈치 한번 존나 빠르네.”

돌변했다.

긍지 높은 전사의 얼굴이 아니라,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진실 하나 없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 로만 드미트리.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의 대화는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단순히 음성만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실과 무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겠지.”

가면을 벗었다.

진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들통이 나다니. 그래, 그래서 너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매우 거슬렸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에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행보. ‘우리’는 네가 원대한 계획의 걸림돌이 되리라고 확신했지.”

“하나만 묻지.”

“말해.”

“슈테른 발할라를 왜 황제의 자리에 올렸지? 그런 방법이 아니고도 발할라를 점령할 수 있었을 텐데.”

“한낱 인간의 머리로는 위대한 계획을 이해할 수 없겠지. 진실에 도달한 너에 대한 선물로 내가 재밌는 것을 보여 주도록 하지. 슈테른 발할라의 진실, 그리고 반란의 이면에 벌어졌던 일들을.”

확.

마나가 일었다.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의 눈앞에, 기억의 조각들을 재생시켰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 * *

그날이었다.

슈테른 발할라가.

광인(狂人)으로 불리기 시작한 날.

몰래 자는 척 연기하던 슈테른 발할라는, 드디어 머리맡에 동물의 사체를 올려놓는 범인을 발견했다.

콱.

“잡았다!”

저항은 느껴지지 않았다.

범인은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평소 슈테른 발할라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인물이었는데, 그는 범죄 현장이 발각되고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떠한 해명도,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감정을 잃은 듯한 눈빛을 마주하자, 슈테른 발할라의 눈빛이 순간 광기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죽여 버리겠어.”

팍.

상대를 쓰러트렸다.

그런 뒤 미리 준비했던 칼을 그의 목에 들이밀었다.

“대체 왜! 대체 왜 내게 이러는 거야? 내가 너희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나는 오히려 너희를 챙겨 주었잖아.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냐고!”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

그것을 기록한 직후였다.

슈테른 발할라의 정신은 점점 갉아 먹혔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반복되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살의(殺意)로 그득그득 차올랐다.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하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대답해, 대답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영혼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악스러운 손길에 따라 들썩이는 하인의 모습에, 슈테른 발할라는 손에 힘을 주었다.

죽일 것이다.

죽기 전에.

먼저 죽여 버릴 것이다.

이를 악물며 검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슈테른 발할라는 뒤로 주저앉으며 괴성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아아악! 날 제발 내버려 두라고, 제발!”

그는 차마.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로 인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지만, 그는 남들을 해칠 만큼의 모진 성격이 되지 못했다.

백의의 천사라고 불렸던 일들은 생존을 위한 발악이 아니었다.

다른 후계자들에게 경쟁 상대로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을 배제하더라도, 슈테른 발할라는 사람들과 친근하게 어울리며 지내는 삶이 좋았다.

만약.

제주스 발할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한적한 변방에 땅이라도 조금 받아서, 농사나 짓는 그런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삶이 망가졌다.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콰득!

할버드라고 불리는 무기가.

바로 뒤에서, 그대로 하인의 몸을 내리찍어 버렸다.

* * *

무기의 주인.

비에토 공작이었다.

그는 피로 물든 얼굴의 슈테른 발할라의 뒷덜미를 움켜쥐고는, 그를 질질 끌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네. 그 정도로 공을 들였으면 사람이길 포기할 법도 한데, 끝까지 그 선을 넘지 않다니. 그래서 네가 적임자가 된 거야. 너 같은 녀석은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거든.”

이해할 수 없었다.

비에토 공작은 나라를 위한 충신이다.

모두가 존경하고 칭송하는 인물이, 악귀 같은 표정으로 동네 건달처럼 행동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반란이 시작되었다.

비에토 공작의 명령에, 병사들이 황궁 곳곳으로 퍼져 나가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기 시작했다.

“모두 죽여라. 그 누구도 오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단 한 놈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황궁이 피로 물들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슈테른 발할라는 비에토 공작의 손길에 끌려가며, 넋을 잃은 얼굴로 주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담소를 나누던 하인들이 갈기갈기 찢긴 채 널브러져 있었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형제들도 차가운 시체가 되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란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

감히 발할라에서, 후계의 체계를 부정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걸음을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제주스 발할라가 있었다.

의연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발할라의 황태자는, 공포로 얼룩진 얼굴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비, 비에토 공작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일은 그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제주스의 이름을 버리고 황실을 떠나서 살겠습니다.”

간절하게 빌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그는 간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때였다.

비에토 공작은 슈테른 발할라의 귀에 얼굴을 갖다 대더니, 잔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녀석이 범인이야. 너를 괴롭힌 범인. 저 녀석만 사라진다면 발할라에서 그 누구도 너를 괴롭힐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야. 내가 약속하지. 슈테른 발할라, 어서 제주스 발할라를 죽여 버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광기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간 경험했던 일들.

눈앞에 흥건한 피.

수많은 죽음.

정신이 완전히 나갔다.

끝까지 이성의 끈을 유지하던 슈테른 발할라가, 계속되는 악마의 속삭임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죽기 전에…… 먼저 죽여 버릴 거야.”

그때부터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슈테른 발할라는 피로 흠뻑 물든 얼굴로 처참하게 죽은 제주스 발할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날.

사람들이 말하는 폭군(暴君)이 탄생했다.

* * *

확.

상황이 뒤바뀌었다.

슈테른 발할라의 기억이 회수되며, 이번에는 또 다른 상황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익숙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상황을 보고하라.”

어두컴컴한 공간.

상석에서, 알렉산드르가 두 존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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