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3화 (363/615)

363화 내란의 결말 (2)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벨피르 후작은 드미트리에 대화 의사를 전달해 놓고, 혹시라도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연락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결단을 내린 순간부터는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길을 만들어야만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통신이 연결되었다.

[벨피르 후작. 무슨 용건으로 연락했지?]

참 민망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싸늘한 음성은 둘의 관계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지만, 지금 아쉬운 쪽은 벨피르 후작이었다.

그동안의 관계? 권력자로서 자존심? 생존에 대한 갈망이 그 모든 것을 억눌렀다.

“……단도직입적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저를 살려 준 이유가 자비를 베풀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명확한 의도가 있으시겠지요. 저는 그 의도를 공유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탐탁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대화는 분명히 드미트리에게 득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강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을 피력하기 위해, 벨피르 후작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나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10분을 주지. 그동안 너의 가치를 증명해라.]

왜일까.

화면 너머.

로만 드미트리는 오만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볼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통화에 전력을 다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발할라에는 대외비(對外祕)로 취급되는 몇 가지의 진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14번째 아들이었던 발할라 황제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반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전대 황제는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 이미 14번째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의향을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발할라 황제가 보유한 특수 전력은 전대 황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전대 황제가 어째서 14번째 아들을 택했는지,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반란을 통해서 자리를 물려주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확실한 것은…….”

뜸을 들였다.

상대의 기대감을 유도한 뒤에, 말에 힘을 주었다.

“혹시라도 발할라 황제가 크로노스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소문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발할라 황제의 정확한 진실, 그리고 특수 전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발할라 황제를 오랜 시간 모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어려운 인물이지만, 이와 같은 남들이 알 수 없는 진실을 저는 제법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발할라에는 저를 따르는 귀족들이 많습니다. 발할라 황제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보통 제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덕분에 제가 갖춘 세력은 현재 발할라의 판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만큼의 수준은 됩니다.”

공포 정치의 약점이었다.

발할라 황제는 수하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는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벨피르 후작은 세력을 형성했다.

만약 황제의 힘이 건재했다면 그따위 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제의 위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발할라의 귀족들은 벨피르 후작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반란군이 발할라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는 그때, 제가 그 자리에서 지금과 같은 권력을 유지하게 도와주십시오. 드미트리, 그리고 반란 세력에게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분을 포기하는 대신, 이 팽팽한 전장의 양상을 단번에 휘어잡을 기회입니다.”

그의 발언은 설득력이 있었다.

지난 며칠.

자신의 판단으로 인한 여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며, 벨피르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적을 잔인하게 대한다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자신을 살려 준 순간부터 세간의 소문과는 다르게 예외가 있다고 믿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의 차례.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그때, 통신기 너머로 당혹스러운 말을 들었다.

[얘기는 잘 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널 받아들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 *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처음부터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니.

당황한 마음에, 벨피르 후작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게 바라는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발할라 황궁에서 저를 살려 둘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발할라 권력의 중심인 이 벨피르를 죽였다면. 발할라 귀족들 사이에 번질 공포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 님은 확실한 이득을 얻었을 겁니다.”

그런 확신에.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에, 매력적인 제안을 떠올리기 위해 며칠을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상당히 과대평가하는군.]

웃었다.

지금과 같은 그림.

예상했다.

의도하고 유도한 것이나, 벨피르 후작과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강자에 달라붙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들이 오히려 대국(大國)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선을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 용서할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 벨피르 후작. 너는 어느 기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그야…….”

말문이 막혔다.

지난 일들.

드미트리와의 악연이 떠올랐다.

발할라 축제에 초대해 암살하려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크로노스를 불러들인 일련의 과정에 벨피르 후작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불길한 기분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해 보면, 드미트리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크로노스의 워프 사건에 벨피르 후작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왜 살려 두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대체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진심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네가 말한 것처럼 너는 발할라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를 살려 두었다. 발할라 황제와 너의 사이에 깊은 불신을 만들어 놓고, 네가 다시 발할라 황제에게 돌아갈 수 없는 판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이었다.

단순히 불신으로 갈라놓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상황도 머릿속으로 그렸다.

[지금으로부터 보름 뒤. 나는 발할라 황제에게 너와의 통신 기록을 보낼 것이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할라 황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내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마법 통신의 내용을 전부 공개할 것이다. 벨피르 후작. 네가 영향력이 있기에,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다 더 득이 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의 행동을 내가 유도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마법 통신을 들을 발할라 황제는 너의 진심에 분노를 표출하겠지.]

충격에 빠졌다.

넋을 잃은 벨피르 후작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가혹한 진실을 강요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네가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발할라 황제를 무너트려라. 만약 보름 뒤에도 발할라 황제의 세력이 건재하다면. 내가 아닌 발할라 황제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 *

툭.

통신을 끊었다.

벨피르 후작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굳이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사람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간절해지는 법이지.”

벨피르 후작.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때도 벨피르 후작은 만일의 상황을 생각해, 끊임없이 본인이 살아 나갈 방법을 궁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퇴로를 막아 버렸다.

발할라 황제를 쓰러트리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면,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전력을 끌어모아서라도 목적을 이루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벨피르 후작을 그리 살려 주고 싶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베푼 자비는, 며칠을 더 살게 해 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중지란(自中之亂).

판을 깔았다.

발할라가 내부에서 서로를 갉아먹는 상황에, 발할라 황실은 정말 유례없는 위기를 경험할 것이다.

‘과연 반란이 성공할 수 있을까?’

헤르나드의 반란군.

폭동을 일으키는 백성들.

북부의 드미트리 연합군.

서부 전선의 왕국 연합.

마지막으로 내부의 배반자까지.

그림은 완벽했다.

웬만한 나라를 무너트리고도 남을 전력이지만, 발할라 황제를 직접 경험해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벨피르 후작은 발할라 황제에게 미스터리한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하오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낼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전세를 역전시킬 만한. 크로노스가 8서클의 마법사와 같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전력을 동원한 것처럼, 발할라 황제도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확신이었다.

황궁에서의 만남.

발할라 황제는 도망치는 것을 택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심하고 공허해 보이는 그의 눈빛은 로만 드미트리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전생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와 같은 인물들을 몇 번 경험해 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은, 절대 그런 눈빛을 보일 수 없었다.

고로.

반란이 실패할 가능성을 계산에 넣었다.

발할라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무조건 드미트리의 이득으로 직결될 것이다.

‘지금부터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단 하나다.’

크로노스.

그들의 개입만이, 발할라를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 *

며칠 전.

카이로 서부 전선.

그곳의 지휘관인 반덴버그 후작은, 국경 너머로 보이는 크로노스 제국군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지난 며칠.

발할라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만약 발할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진즉에 국경을 넘어 카이로를 공격하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었다.

지난 휴전 협상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들.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연합이라면,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굳이 방관만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큰 변화가 없었다.

정말 훈련 명목으로만 움직이는 병력의 모습에, 반덴버그 후작은 오히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호전적인 나라다. 본인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상대에게 책임을 물었던 불한당(不汗黨)의 나라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이렇게까지 숙이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모종의 음모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방관하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서부 전선.

그동안 크로노스와 온갖 더러운 일을 경험했다.

그의 본능이 강하게 경고하는 상황에, 반덴버그 후작은 곧바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을 보냈다.

[크로노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판도가 바뀌었다.

적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지금은 적극적으로 적의 계획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며칠 뒤.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한 명의 인물이 크로노스 제국으로 향했다.

* * *

크로노스의 수도.

그곳의 워프 게이트가 환한 불빛을 일으켰다.

화악-

척척.

크로노스의 병사들.

그들이 흉흉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워프 게이트로 넘어오는 존재는, 크로노스 제국에서 위험한 인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윽고.

불빛에 휩싸이며,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웩. 이래서 장거리 워프는 힘들다니까.”

사내의 정체.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피식 웃음을 보였다.

‘거 참. 새끼들 눈빛 한번 살벌하네.’

크로노스 제국행.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받았다.

상당히 위험한 일임을 알면서도, 파비우스 백작은 마중 나온 기사를 향해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로노스 황제께서 안식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크로노스에서 결정권을 가진 누구에게든 안내해 주십시오. 아아, 미리 경고하는데 급 떨어지는 애들 데려오면 지체 없이 돌아갈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결정권이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배를 벅벅 긁었다.

황당하리만큼 대담한 태도에.

그를 마중 나온 기사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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