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내란의 결말 (1)
황제군이 완전히 물러나고.
반란군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을 찾으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해서 죽음에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쁨도 잠시, 주변에 널브러진 동료들의 시체가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만약 황제군이 특별한 이유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면, 내일 또다시 절망적인 현실이 반복될 것이다.
비에토 공작이 말했다.
“산체스.”
“예.”
“수도 정보원들에게 연락해, 적들이 퇴각한 이유를 파악하라. 고메스 백작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다. 분명히 그들로서는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숨을 돌릴 여유도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산체스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30분 뒤.
성벽 위를 한참 정리하고 있을 무렵, 잔뜩 상기된 얼굴의 산체스가 급하게 달려왔다.
“비에토 공작님! 공작님의 말이 맞았습니다! 지금 발할라의 수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침착하고 상황을 설명해라.”
“후우, 알겠습니다. 사건은 며칠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발할라 황실이 하비에르의 워프 게이트를 포기한 이후,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도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북부의 곡창지대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그곳에 불을 질러, 발할라 황실로서도 더는 관망할 수 없도록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고메스 백작의 퇴각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
“맞습니다. 실제로 발할라 황실은 병력을 더 차출해서 대응하는 방향으로 갈피를 잡았는데,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수도를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홀로 찾아가, 일방적인 살육을 벌였습니다.”
“……뭐라고?”
순간.
놀란 표정을 보였다.
특별한 전략도 아닌 일개 개인의 충격적인 행보에, 비에토 공작으로서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단순히 마린을 공격한 것만으로 끝났다면, 고메스 백작은 무리하더라도 하루 더 남아서 헤르나드를 완전히 정리하는 방향을 택했을 것이다.
“비에토 공작님. 놀라지 마십시오.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수백의 황제군을 도륙한 이후, 황궁을 찾아가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물론이고 발할라 황제의 목숨을 직접 노렸습니다. 그로 인해 수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발할라 황실로서도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판단에, 고메스 백작의 병력을 급히 불러들인 것입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어코 판을 뒤엎었습니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벼랑 끝에 몰렸기에, 수도에서 전해 들은 소식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가 반란군을 완전히 버리고 드미트리의 이득만을 취하겠다는 발언을 했다는데, 이건 저도 진실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로서는 소문만으로 섣불리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비에토 공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만으로도 대단한데, 마지막 말은 그야말로 화룡점정(畫龍點睛)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대단한 존재구나.”
“혹시 알고 있는 정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나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반란군과의 관계를 포기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발할라 황제는 극단적인 인물이고, 하비에르의 워프 게이트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으로 의도했던 계획을 따라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 황제보다도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반란군과의 관계를 포기하겠다는 발언으로, 발할라 황실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
“그렇다면, 페이크였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니다.”
웃었다.
상황을 되새겨볼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로 반란군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선을 그어 버림으로써 두 가지의 상황을 발할라 황실에 강요했다. 첫 번째는 반란군에 연연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는 것. 두 번째는 극단적인 행보에 위기감을 느낀 발할라 황실이 병력을 회군시키는 것.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반란군의 존재를 포기하는 과감한 행보가,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발할라 황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지.”
“……아!”
감탄했다.
복잡한 문제였다.
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드미트리가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드미트리에게 이보다 좋은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에토 공작은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와 일련의 상황들을 경험한 지금, 단순히 인정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경외심(敬畏心)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한 건.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의도였던 간에, 단 하루의 여유가 생긴 지금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수뇌부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 *
지난 며칠.
내란의 양상이 변했다.
발할라 황실은 약 50만의 병력을 회군시키고, 추가로 병력을 차출해서 곧바로 북부로 보냈다.
내란 초반에는 헤르나드의 반란군과 황제의 대립이 심각했다면, 현재 발할라 황실을 분노하게 만드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였다.
마린에서의 사건. 발할라 황실이 제대로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사람들은 공포 정치의 근간이 되는 압도적인 힘에 의문을 품었다.
그로 인해.
발할라 황실은 확실한 본보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발할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를, 이대로 순순히 보내 줄 수는 없었다.
“쥐새끼 같은 녀석!”
북부의 곡창지대.
새카맣게 타 버린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드미트리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은 고메스 백작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며칠.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빨리 드미트리의 꼬리를 붙잡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의도가 명백했다.
치고 빠지려는 속셈일 터.
토벌군에 비하면 많지 않은 병력일지라도,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게다가.
‘발할라의 상황이 좋지 않다.’
황제의 권위가 흔들렸다.
동시에 발할라 전역에서 벌어진 테러는 좋은 명분을 부여했고, 불과 기름이 만나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헤르나드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발할라 황실은 상황을 관망할 만큼의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헤르나드의 반란군이라도 예정대로 정리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함락 직전에 병력을 회군시키면서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비에토 공작이 주변 영주들을 몇 명 더 설득시키면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고메스 백작은 회군 명령에 이미 헤르나드를 떠난 상태였고, 멀리서 들려온 패전 소식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밖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악재가 겹쳤다.
이대로는 문제가 심각했다.
고메스 백작이 부관을 불러들여 명령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드미트리 연합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그들을 최소한 국경 인근으로 몰아넣어야만 한다. 드미트리가 계속 발할라의 영토를 활보하는 상황을 내버려 두었다간,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변수를 끊임없이 만들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변에 연락해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부관이 물러났다.
속이 답답했다.
고메스 백작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아직 드미트리 연합군의 꼬리를 잡지 못한 그때, 왕국 연합의 군대가 발할라 서부 전선에 집결했다.
* * *
발할라 서부.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왕국 연합의 소속인 레드포드, 움베르토, 프랑크 삼국이 서부 전선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발할라 황실은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
만약 왕국 연합이 드미트리와 같이 전면전을 선포할 의향이라면, 그때부터는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정리하는 것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확보해야 했다.
발할라의 전령.
평범한 얼굴의 사내는, 왕국 연합의 수뇌부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발할라 황제 폐하께서는 서부 전선에 병력을 집결시킨 일에 대한 해명을 바라고 계십니다. 만약 이것이 발할라를 적대하려는 의도라면, 발할라는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적의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이미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확신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왕국 연합과 드미트리.
그들은 운명공동체다.
드미트리를 따라 선을 넘어선다면, 발할라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을 것이다.
그런데.
왕국 연합을 대표해, 칼데론 드레이크가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데, 저희는 발할라와 적대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왕국 연합을 형성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서로를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드미트리는 자체적인 판단으로 헥토르와 같이 공격을 감행한 것이고, 그것은 왕국 연합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서부 전선에 병력을 집결시킨 것입니까.”
“그거야 훈련을 위해서죠.”
씰룩, 웃었다.
상대를 딜레마를 빠트리는 대답이었다.
발할라가 만약 왕국 연합의 행보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제 발로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아시다시피 왕국 연합, 그중에서도 남부의 삼국은 사이가 각별합니다. 저희는 주기적으로 이와 같은 훈련을 진행하는 편이고, 그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최근 크로노스 제국도 훈련을 명목으로 카이로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지 않았습니까?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발할라 국경을 넘을 일은 없습니다.”
크로노스와의 협력.
발할라가 그들의 도움을 끌어들이면서, 역으로 왕국 연합의 행보를 지적할 명분을 잃어버렸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전령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상대의 의도는 뻔했다.
왕국 연합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하면, 그들은 외부의 적을 이용해서 민심을 잠재우려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을 넘지 않았다.
딱 방관자의 입장에서, 상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정도에서 멈추었다.
‘발할라로서는 왕국 연합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 우리가 크로노스 제국과의 휴전 협상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발할라도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부 전선에 평소보다도 많은 병력을 배치할 것이다. 그야말로 딜레마지. 문제를 알아도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딜레마.’
로만 드미트리.
그의 머릿속에서부터 비롯된 계획이었다.
발할라 내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펼치고, 헤르나드의 반란군이 살아날 여지를 만들고, 발할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뒤에, 얼마 전에 병력을 차출한 발할라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이번에는 왕국 연합을 움직였다.
상황은 때에 따라 변할 것이다.
웬만해서는 국경에서 머무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지만,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한다면 국경을 넘을 의향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의미 있는 행보였다.
언제든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발할라에게는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툭 끊었다.
칼데론 드레이크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왕국 연합 남부의 삼국은 이번 사건과 무관합니다. 그러니 발할라 황실에 가서 전해 주십시오. 저희는 진심으로,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하기를 바란다고요.”
주변 수뇌부들이 같이 웃었다.
전령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한껏 조롱당한 기분에, 그는 더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 * *
벨피르 후작의 집무실.
초조한 듯 집무실을 배회하는 벨피르 후작은, 자꾸만 머릿속을 장악하는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좋지 않아, 정말 좋지 않아.”
반란 초반.
처음에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비에토 공작의 20만 병력은 발할라를 무너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선다고 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사방에서 문제가 불길처럼 번지는 상황에, 벨피르 후작은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정말 어쩌면.
발할라 황제가 패배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발할라 황제와의 관계에 불신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황궁으로 향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도망쳐 버렸다. 그것이 우리를 생각하는 발할라 황제의 진심이겠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체스말. 우리가 이번 일로 반발심을 가지든 말든, 일말의 고민조차 않는 일방적인 관계. 내 판단은 틀렸어. 발할라 황제를 위해 헌신했던 시간은 무의미하다.’
발할라.
이곳에 자신의 미래는 없었다.
발할라 황제는 현재 현실을 낙관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힘으로만 대응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수 전력 전체를 동원해도 모자랄 판에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태도는, 발할라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를 점점 잃어가게 했다.
이러다 패배한다면.
그 책임은 수하들이 감당할 것이다.
벨피르 후작은 이미 한 번의 선례를 경험했기에, 더는 미래를 바라보며 목숨을 걸 수 없었다.
‘황실의 힘은 절대적이지 않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할 전력을 보유했다면, 황궁에서의 전투에서 뒤로 물러나는 선택은 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내게 영광이 돌아올까? 오히려 전공을 세울수록, 로만 드미트리에게 암살의 위협을 받겠지. 황궁이 털릴 정도라면 내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불안과 불신.
복합적인 감정이 머릿속에 뒤얽혔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도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분열을 위해 자신을 살려둔 것이고, 발할라의 승리를 위해서는 흔들려서는 안 됐다.
하지만.
알고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었다.
밖이 어두워지고 밝아지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마법 통신기를 손에 들었다.
순간 고민했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찰나의 고민.
막상 통신이 연결되자, 벨피르 후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삑.
“발할라의 벨피르 후작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제가 대화를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