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8)
수도 한복판.
발칵 뒤집혔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모습에,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다들 당황하지 마라! 다크 클라우드는 일시적으로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일 뿐, 그 이상의 살상력(殺傷力)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서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주변을 경계한다면, 황실의 마법사들이 마린을 물들이는 어둠을 빠르게 없애 줄 것이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다크 클라우드와 블랙아웃을 동시에 사용했다.
마린의 마법사들로서는 일단 블랙아웃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마린의 내부에는 하오문의 첩자들이 다크 클라우드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마법 장치를 수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마린의 마법 전력이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30분이 필요한 상황.
짧다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확.
“크악!”
어둠 속.
비명이 들렸다.
분명히 방금까지 바로 앞에서 동료가 있는 모습을 확인했는데,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병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무기를 들었지만, 어둠으로 물든 주변은 동료들의 형태만 어렴풋이 보여 줄 뿐이었다.
그때였다.
번뜩.
머리가 날아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한 존재로 인해,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죽음은 연쇄적이었다.
바로 근처에서 동료가 죽는 모습을 발견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사자가 목격자의 목숨마저도 앗아 갔다.
처음에는 분명히 경비대장의 외침이 먹혔다.
마린의 병사들은 최대한 침착하게 어둠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빠르게 줄어드는 숫자에 어느 순간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컹.
“……으, 으악!”
발밑.
시체가 밟혔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벌써 수십 구의 시체가 바닥에 쌓여 있는 상태였다.
혼란에 빠져들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부터는 통제되지 않았고, 발악하는 병사들로 인해서 대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아, 안 돼! 모두 대열을 유지하라! 우리가 혼란에 빠지면,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대로 될 뿐이다!”
경비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다크 클라우드의 효과는 시야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도 경비대장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밖에 있는 병사들은 서로 등을 맞대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졌다.
분명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어둠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눈앞의 현실을 감당하지 못했다.
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 이런 어둠 속에서도 자유롭단 말인가.
다크 클라우드의 페널티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어둠 속에서 날뛰는 악귀는 제약이 없어 보였다.
문득.
경비대장은 하나의 소문이 떠올랐다.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어둠으로 물든 산속에서 헥토르의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했다고 들었다. 그때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엄청난 무력에 감탄하는 한편, 헥토르 왕국이 나약하기에 벌어진 일이라며 비웃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어둠을 활보하는 귀신 같은 움직임은, 오라 검사인 나조차도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다.’
꽈악.
검을 움켜잡았다.
모든 것이 상식 밖이었다.
마린을 찾아온 것도.
홀로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경비대장조차도 정신적으로 위기가 찾아오는 그때, 발할라의 병사들에게 희망을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라이트(moonlight).”
황실의 마법사들.
그들의 마법이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 * *
다크 클라우드.
그것을 해제하는 것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어둠을 밝히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문라이트.
어둠이 밀려났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밝은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주변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보이기 시작했다.
“……으으.”
“이, 이게 다 시체야?”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주변 풍경.
그야말로 처참했다.
분명히 기껏해야 3~4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건만, 시야가 닿는 곳곳에 마린의 병사들이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죽었는지 파악조차 힘들 정도였다.
시야로 확인되는 존재들만 수백이 넘어가는 것 같았고,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모습을 드러내라! 네가 진정한 검사라면, 앞으로 나와 내 검을 받아라!”
로열 나이트.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따위 말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서는 이렇게 소리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어둠을 활보하던 시절, 사람들은 매번 비슷한 착각을 했었지. 어둠 밖에서는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
“저기다!”
“공격해!”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났다.
어둠이 그를 타고 휘몰아치는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었고, 로열 나이트를 비롯한 병사들은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번 작전에는 로만 드미트리 혼자만 나섰다.
어둠 속을 활보하는 작전은, 발할라 랭킹 1위를 쓰러트린 아레스조차도 로만 드미트리의 발목을 붙잡을 뿐이었다.
웃었다.
달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어둠은 그저 상황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작은 요소일 뿐임을, 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푸확.
피가 튀었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로열 나이트의 머리를 단번에 박살 내더니,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진영을 파고들며 피를 흩뿌렸다.
득달같은 기세를 보이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적진을 활보하며, 자신과 맞닥트리는 존재들을 차례로 도륙해 버렸다.
학살.
일방적이었다.
쉴 새 없는 움직임에 따라, 끔찍한 비명과 죽음이 동반되었다.
로열 나이트?
수만의 병사들?
의미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귀영으로 살았던 시절, 이보다도 더한 죽음의 위기를 숱하게 넘었다.
그때의 감각이 들끓었다. 어둠 속에서 학살을 벌일 때면, 무림인들은 귀영의 명성에 벌벌 떨었다.
“죽어!”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경비대장.
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4성의 오라 검사.
약소국에서 태어났다면 상당한 자리를 차지했을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강렬한 살의를 보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로열 나이트와 병사들이 동시에 달려들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일순간 틈을 보였고, 아군의 목숨을 대가로 충분히 한 방을 먹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비틀.
세상이 뒤흔들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그는 어느새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상태였다.
피가 흘렀다.
시야 위로.
로만 드미트리가 보였다.
“너희에게는 죄가 없다. 다만, 너희가 모시는 주인이 나를 적대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콰직.
경비대장이 기억하는 생전(生前)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발할라 황궁.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불안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학살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에, 수뇌부 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우리 모두 죽는 거 아닙니까?”
“어디서 재수 없는 소리를!”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레스조차도 발할라 랭킹 1위의 세자르를 쓰러트렸는데, 대체 발할라에서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그를 성으로 들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상식선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벨피르 후작의 호통에도.
수뇌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
황실의 기사가 로만 드미트리의 방문을 알렸을 때, 발할라 황제의 지시에 그의 출입을 허락했다.
사실 수뇌부의 발언은 발할라 황제를 비난하는 것이었으나, 공포에 질린 그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발할라 황제는 사형을 명했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벨피르 후작이 발할라 황제의 눈치를 살폈는데, 이상하게도 발할라 황제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심한 것들.”
발할라 황제가 웃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항상 상식을 벗어나는 행보를 보여 왔다. 그리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도, 그는 홀로 30만 대군을 향해 달려들어 8서클 마법사의 머리를 베어 버렸지. 그때부터 이런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드미트리는 아직 작은 나라에 불과하나. 일개 개인이 그와 같은 무력을 갖추었을 때, 제국의 황제조차도 암살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
암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아주 간편한 방법이었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강자라면.
발할라 황제를 직접 처리하는 방법으로, 발할라의 내란을 단번에 반란군의 분위기로 만들 수 있다.
예상했던 일이다.
제왕의 길.
가시밭길을 걸었다.
발할라 황제는, 그러한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안일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린에 들어선 이상. 그는 분명히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단언했다.
수뇌부들이 불안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나타난다면, 그들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렸다.
분명히 황실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그곳이 열리며, 피로 물든 얼굴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알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는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 * *
다크 클라우드.
그것은 페이크였다.
어둠으로 혼란을 준 뒤에,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마침내.
발할라 황제를 마주했다.
마르고 약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겁을 먹은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었다. 발할라 제일의 검사가 아레스에게 쓰러진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내가 직접 찾아가 암살을 시도한다면, 과연 제국이 그것을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번 작전.
일종의 실험이었다.
크로노스를 상대하기에 앞서, 발할라를 상대로 제국의 전력을 가늠하고자 했다.
“만약 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발할라의 황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암살에 대한 명분.
발할라 황제의 만행이 부여했다.
그가 갑자기 목이 날아간다고 한들, 발할라의 백성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걸었다.
길이 열렸다.
귀족들은 겁을 먹은 얼굴로, 감히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서지 못했다.
그때였다.
척.
척척척.
발할라 황제의 뒤로.
무심한 얼굴로 서 있던 검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다른 일반적인 검사들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정거리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존재가 흐릿해지더니 바로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빨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더니, 미처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만큼의 스피드로 상대를 베었다.
번뜩.
피가 튀었다.
가슴을 완전히 찢어발기는 공격.
십수 명 중 하나를 손쉽게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황제의 검사가 가슴이 찢겨 나간 채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빠르게 반응하며 막아 냈지만, 연속해서 공격을 퍼붓는 검사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그 녀석들은 불멸(不滅)의 검사다. 그 어떠한 공격으로도 죽일 수 없는 존재지.”
발할라 황제가 히죽거렸다.
그의 말처럼.
불멸의 검사들은 죽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가슴 피부가 어느새 다시 뒤얽히더니, 멀쩡해진 모습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커스(curse).”
“커스.”
파스스스-
어느새.
주변으로 황실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모래바람이 일어나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들은, 로브의 어둠 속에서 음침한 눈빛을 보이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저주를 사용했다.
저주의 기운은 로만 드미트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명확히 눈에 보이는 힘이 아닌, 신체적인 능력을 하락시키는 마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방해하려 했다.
재밌었다.
확실히.
제국의 힘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랭킹이라는 것이 한 나라의 국력을 결정한다면,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전력을 랭킹으로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전력을 노출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말인즉, 세자르가 양지에서는 발할라 제일의 검사일지 몰라도, 발할라는 세자르 하나만으로 제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불멸의 검사.
황실의 마법사들.
특수 전력 중 일부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팟-
저주가 풀렸다.
마법의 힘을 파훼하더니, 앞을 막아서는 불멸의 검사들을 베어 버리며 발할라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
불멸의 검사들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틈을 보였고, 그 정도의 시간이면 발할라 황제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팔이 잘려 나가고, 가슴팍이 찢기고, 다리를 잃은 불멸의 검사들이 악착같이 달라붙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기어코 발할라 황제의 앞에 도달했다.
순간.
파스스스.
발할라 황제의 모습이 흩어졌다.
황실의 마법사들이 나타난 것처럼, 모래바람으로 흩어진 그가 다시 재구성하며 회의실 벽 쪽에 나타났다.
“로만 드미트리.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르르.
그가.
벽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벽에 흡수되듯 그가 사라지자, 불멸의 검사와 황실의 마법사들도 그와 똑같이 모래바람으로 흩어져 버렸다.
예상대로였다.
이번 작전.
암살에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의 전력을 확인하고자 했고, 그것은 부수적일 뿐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일단락된 상황.
“딸꾹.”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딸꾹질의 주인공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부릅뜬 눈은 로만 드미트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수뇌부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
창백한 얼굴의 벨피르 후작이,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