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7)
음성 통신이었다.
발할라 황제를 대신해, 벨피르 후작이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정녕 발할라와 끝을 보려고 하는구나. 감히 발할라의 내란에 개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을 선동해 반란을 유도하다니. 그러고도 드미트리가 무사할 것 같으냐.”
사나운 목소리였다.
벨피르 후작은 상대를 다그치며, 현재 벌어진 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저번 마법 통신으로 이미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관계는 정립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든, 아니면 지금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든. 우리 관계에 달라질 여지가 있었나.]
“그래. 네 말처럼 발할라와 드미트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런데 말이야. 악의(惡意)라는 것은 우리가 복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요소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들은 우리의 악의를 부추기고 있다. 수십 개의 영지를 테러하고, 발할라 백성들의 반란을 유도하고, 북부의 곡창 지대에 불을 지르는 행위들. 발할라의 근간을 흔들겠다고 발악하는 너의 행동들로 인해, 우리는 복수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힐끗.
발할라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돌아가는 상황이 재밌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발할라의 안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 모습에, 벨피르 후작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했다.
“내가 단언하지. 네가 벌이는 일들로 인해 상황이 반전될 여지는 없다. 우리가 너의 속셈을 모를 것 같나. 어떻게든 반란군에게 숨을 돌릴 틈을 만들어서, 그들의 주도하에 발할라 황실을 무너트리려는 것이겠지. 우습구나, 로만 드미트리. 헤르나드의 반란군은 이미 함락 직전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아니, 해가 저물기도 전에 반란군은 모조리 전멸을 당할 것이다.”
반란.
이미 끝난 문제였다.
고메스 백작은 오늘 내로 헤르나드를 무너트리겠다고 보고했고, 실제로 객관적인 전력만 보아도 헤르나드가 버틸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드미트리의 계획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날뛴다고 한들,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반란군이 배제되는 순간 의미를 잃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벨피르 후작은, 강압적으로 이만 물러나라는 경고를 내뱉었다.
그런데.
[그래서?]
웃음을 보였다.
발할라 황제가 백만 군대를 헤르나드로 보낼 때부터, 반란군이 버티지 못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을 낙관하는 부류가 아니라면, 겨우 20만의 반란군으로 발할라 제국을 무너트리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비에토 공작은 그런데도 결단을 내렸다. 발할라의 미래를 위해 반란을 시도한 것이고, 애석하게도 그는 반란이 실패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겠지.]
뉘앙스가 이상했다.
벨피르 후작의 예상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이렇게 반응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우리는 반란군을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
* * *
순간.
벨피르 후작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반란군이 배제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서슴없이 반란군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반란군에 가담한 이유는 그것이 발할라를 내부에서 갉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반란군은 발할라 황실을 무너트릴 힘을 바랐고, 우리는 반란군을 이용해 어떤 방향으로든 발할라에 피해를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는 의미다. 서로 대단한 의리와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한 관계가 아닌, 온전히 이해관계로 인해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발할라 황실이 이번 마법 통신을 붙잡고 늘어진다고 한들, 이미 발할라 황제가 벌인 학살로 인해서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였다.
발할라는 치킨 게임의 본질을 반란군에서 찾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다.
[헤르나드가 무너지는 지금. 우리가 왜 반란군에 매달려야 하지?]
“……그, 그게 무슨.”
발상의 전환이었다.
헤르나드를 버렸다.
반란군을 포기했다.
차선책은 그들을 위해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닌, 온전히 드미트리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였다.
[내가 벌이는 일들은 반란군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부터 나는 반란군이 만들어 준 판을 활용해서 최대한 발할라의 전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반란을 부르짖는 사람들과 너희가 서로를 죽인다면, 누가 죽든 간에 드미트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곡창 지대에 불을 지른다면. 반란의 여파와 더불어 너희는 몇 년간 상황이 여의치 않겠지. 그게 내가 바라는 목적이다. 발할라 황실을 무너트리는 최선책이 실패한 이상, 발할라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는 것.]
재밌는 상황이었다.
발할라는 드미트리가 끝까지 반란군을 포기하지 못하리라는 착각에 빠져, 북부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도 병력을 회군시키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
처음부터 이 싸움은 드미트리에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어떤 결말을 보이든, 로만 드미트리는 이득을 본다는 판단에 산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치킨 게임.
다른 의미로 들이받았다.
반란군을 버리고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선택에, 벨피르 후작의 얼굴이 굳어 가기 시작했다.
[벨피르 후작. 내가 말했었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다가는. 결국,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를 농락했다.
[그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것을 끝으로.
툭.
통신이 끊겼다.
* * *
일련의 상황.
회의실이 정적에 빠져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의도한 바에, 그들은 섣불리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함정에 빠졌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이미 백성들과의 갈등이 심해진 상황이기에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화를 가지고 상황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병력을 회군시킨다고 한들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은 끝까지 버티고 있고, 로만 드미트리가 테러를 벌이는 바람에 반란의 불길이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군대는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막막했다.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벨피르 후작은 긴장한 얼굴로 발할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 아무래도 병력을 회군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헤르나드의 잔당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발할라 전역으로 퍼지는 반란의 불길을 잠재우고, 드미트리의 군대를 제압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디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발할라의 수뇌부들.
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도 문제를 공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백만 군대의 일부를 회군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발할라 황제는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
“큭큭큭, 확실해. 로만 드미트리는 내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이다. 일반 사람들이었다면 수십 번은 무릎을 꿇었을 상황에, 끝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사나운 이빨을 보이다니. 벨피르 후작.”
“예.”
“우리는 회군하지 않는다.”
“하지만……!”
“발할라에는 헤르나드에 보낸 병력 외에도 충분한 전력이 남아있다. 이번 일로 발할라가 감당해야 할 손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와의 전쟁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병력을 차출해 북부로 보내라. 곡창 지대의 상황을 수습하고, 헤르나드로 보낸 병력은 반란군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 불러들일 것이다.”
그 또한.
대단한 고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발할라 황제를 자극했다.
발할라 황제는 워프 게이트를 파괴함으로써 치킨 게임에서 물러날 수 없도록 퇴로를 차단했는데, 로만 드미트리 또한 반란군을 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란 말인가.
무료하기만 했던 삶에 생긴 극적인 변화에, 발할라 황제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고집했다.
벨피르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발할라의 안위를 챙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발할라는 황제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역겨움을 삼켰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이 떠올랐다.
자신을 만나게 되리라는 말을 명심하라는 의미가 대체 무엇일까.
그때였다.
벌컥.
“황제 폐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길함이 점점 커졌다.
회의실로 들어선 황실의 기사가, 모두를 충격에 빠트릴 발언을 내뱉었다.
“방금 마린의 경비대로부터, 로만 드미트리가 방문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 * *
마린의 경비대.
그들은 현실을 의심했다.
발할라의 수도를 방문한 존재는, 현재 발할라 황실이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나는 드미트리 왕국의 로만 드미트리다.”
신분을 밝혔다.
경비대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북부에 있다고 알려진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마린에서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린에 방문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성벽 위가 난리가 났다.
혹시 모를 공격을 위해 단단한 방비를 끝마쳤지만, 그들은 황당하게도 먼저 성문을 열어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안으로 들여라.’
상부의 명령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끼익.
쿵.
성문이 내려앉았다.
마린의 경비대.
그리고 로열 나이트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싸며 로만 드미트리를 경계했다. 확실히 그 외에 다른 존재는 없었다.
홀로 들어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피어올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황실 방향에서 몰려드는 병사들로 인해 퇴로가 완벽히 차단되었다.
쿵.
다시 성문이 닫혔다.
독 안에 든 쥐였다.
상황을 파악한 경비대장은, 검을 겨눈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마린은 무슨 이유로 방문했지?”
꿀꺽.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긴장되는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전장에서 보여 준 악명은 대단했고,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하기 위해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단 한 명에 의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발할라의 수도다.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곳 발할라에서, 제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고 한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갖춘 무력만큼이나 영악한 로만 드미트리기에,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발할라의 방비는 철저하다. 마린의 성벽은 철옹성(鐵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높고 단단하며, 마법을 방해하는 마법진으로 인해 워프 게이트를 제외하고는 마법의 힘으로 내부로 들어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린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철옹성을 무너트리고 안에 들어서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씰룩, 웃었다.
이번 작전.
크리스가 반대한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계획에,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이번에는 위험하다고 말했다.
“발할라가 스스로 성문을 여는 것.”
순간.
상황이 살벌하게 변했다.
메시지가 전달하는 의미에, 경비대장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공격해!”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한 발 물러났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보란 듯이 찢어 버렸다.
쫘악-
“블랙아웃(blackout), 다크 클라우드(dark cloud).”
일시적으로 마법의 힘을 약화시키는 블랙아웃.
일시적으로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다크 클라우드.
콰르르르르릉.
소리가 묻혔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어둠의 기운에, 달려드는 모습 그대로 발할라 병사들의 모습이 어둠에 파묻혔다.
로만 드미트리 또한.
위험한 계획임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반란군을 포기함으로써,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가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만큼의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내 목적을 말해 주지. 내가 원하는 건…….”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비대장의 시야에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목소리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너희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것이다.”
화악-
짙은 어둠.
마린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지금부터는.
귀영(鬼影)의 모습을 선보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