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7화 (357/615)

357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5)

순간.

발할라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

산티노 백작의 연락.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산티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광경에, 발할라 황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동안 발할라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던 녀석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결과로서 증명하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인정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던 내 덜떨어진 형제들보다, 너는 어쩌면 발할라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존재다.”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나른했던 눈이, 흥미로운 먹잇감을 포착한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이 상황이 재밌나 보군.]

“재밌어, 아주 재밌어. 너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루에노스, 포트벨, 산티노. 이 세 곳을 빠르게 정리한다면, 워프 게이트가 있는 하비에르를 위협받는 상황에 발할라가 병력을 회군(回軍)시킬 것이라고. 사실 네 계획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하다. 헤르나드가 함락되기 전에 산티노까지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건만, 너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화면 너머.

로만 드미트리가 시체를 의자 삼아 발할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한번 끝까지 말해 보라는 그의 오만함에, 발할라 황제는 들끓는 욕망을 참질 못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발할라가 워프 게이트를 포기하지 못하리라는 생각.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이 미친 게임에서 정공법만을 고집하리라는 생각. 로만 드미트리. 나는 너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자신을 전사라고 표현하는 고리타분한 녀석들과는 달리, 너는 포식자로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도 너를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슥.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번들거리는 광기가, 두 눈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하비에르의 워프 게이트는 이미 파괴한 상태다. 네가 하비에르를 점령한다고 한들, 워프 게이트를 활용해서 우리를 위협할 수는 없다는 의미지. 자,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워프 게이트를 포기한 지금, 헤르나드가 무너지기 전에 과연 드미트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발할라의 민심을 활용해서 상황을 역전시키겠다는 낭만적인 소리는 제발 입에 올리지 않길 바란다.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던 녀석들은 이미 모두 죽여 버렸으니까.”

히죽, 웃었다.

재밌었다.

발할라 황제는 따로 전술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생부터 황실의 핏줄을 타고난 그는, 발할라 제국이라는 압도적인 위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발할라는 언제나 강자의 자리에 있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보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상대가 원하지 않을 만한 선택지들을 택하면 그만이었다.

드미트리.

그들이 바라는 건 명백했다.

반란군의 반격.

그들이 상황을 주도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 드미트리는 과감하게 병력을 밀고 들어오면서 발할라 황실의 시선을 끌었다.

헤르나드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발할라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드미트리의 의도를 따르는 게 정상이었지만, 발할라 황제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드미트리가 날뛰든 말든.

헤르나드를 공격했다.

민심을 부르짖는 녀석들은 모조리 죽였고, 발할라 황실에 닿지 못하도록 워프 게이트는 파괴했다.

그렇다면.

피해는 있을지언정, 드미트리의 선택지는 모조리 차단되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치킨 게임에서.

발할라 황제는 그대로 상대를 들이받았다.

“로만 드미트리. 드미트리가 무너지는 날, 나는 드미트리를 찾아가 네 얼굴을 직접 확인할 것이다.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하는. 패배와 절망으로 얼룩진 드미트리의 악마가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그날이 기대되는구나.”

* * *

일방적인 대화였다.

통신이 끊겼다.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은 결과로써 듣겠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이틀 뒤.

연합군이 하비에르에 도달했다.

발할라의 워프 포인트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굳게 닫혀 있었을 성문이 로만 드미트리를 반기는 것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크리스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이윽고.

크리스가 굳은 얼굴로 상황을 보고했다.

“발할라 황제의 말대로입니다. 워프 게이트는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된 상태고, 하비에르의 병력은 이미 철수한 것 같습니다. 일단 마법 폭탄과 같은 함정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워프 게이트의 파괴.

과감한 결단이었다.

마법 문물의 산물이라고 평가받는 워프 게이트는, 단 하나를 설치하기 위해서 막대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하다.

예전에 에드윈 헥토르가 전쟁을 위해서 설치했던 워프 게이트는 하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 하비에르에 있는 워프 게이트는 한 번에 수십 만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최상급의 워프 게이트였고,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는 천문학적인 손실로 직결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완벽하게 파괴할 경우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북부에 몇 없는 워프 게이트를 파괴함으로써, 발할라 제국은 기동력(機動力)에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황당할 정도로 파격적인 판단이었다.

헤르나드의 점령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하비에르를 포기하면서까지 드미트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상식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발할라 황제.

그의 성향이 드러났다.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그는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방법이 더 끌렸다.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밀고 들어오는 드미트리의 모습에, 오히려 투우사(鬪牛士)처럼 붉은 천을 내밀고 전면에 나섰다.

해볼 테면 해봐라. 들이받는 것을 정면으로 맞서 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크리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헤르나드를 도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북부에는 하비에르를 제외하고 두 개의 워프 포인트가 더 있지만, 그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헤르나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끌었다간 저희의 퇴로가 막힐지도 모릅니다. 주군, 이만 병력을 물리셔야 합니다.”

한발 물러났다.

크리스는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밌네.”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눈앞의 상황에 웃음을 보였다.

* * *

열흘째, 헤르나드.

밤새 보수한 마법 방어는 의미가 없었다.

하늘을 수놓는 플레어 세례에, 파랗게 일어난 방어막이 유리가 부서지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콰르르르르르르릉.

“진군하라!”

“오늘이야말로 반란군을 쓸어 버릴 것이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척척척.

다시 한번 성벽에 사다리가 걸렸다.

처음에는 끓는 기름과 같은 것을 뿌리며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반란군이었지만, 지금은 물자의 고갈로 인해서 무기를 찔러 넣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미 화살도 동이 나 버린 상태.

순식간에 성벽 위가 황제의 병사들로 득실거리는 상황에, 반란군은 이를 악물며 발악했다.

“죽어!”

푹.

창을 힘껏 찔러 넣었다.

기습적인 공격에 황제군을 죽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도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성벽 위에서는 그래도 수적 우위로 어떻게든 질적인 차이를 메웠던 반란군의 시야에, 이제는 아군보다도 적군이 더 많이 보였다.

“이 녀석들이 감히!”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성벽 위.

비에토 공작이 날뛰었다.

이미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가, 황제군을 향해 달려들며 그들을 도륙해 버렸다.

“비에토 공작을 막…… 크악!”

“으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섬뜩한 소리를 내며 휘두르는 할버드에, 여러 명의 황제군이 단번에 동강이 나 버렸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비에토 공작은 수차례 할버드를 휘둘렀다.

베고, 베고, 또 베면서 적들의 피를 흩뿌려 댔지만, 아무리 죽여도 눈앞에서 황제군의 모습은 줄어들질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열흘.

본격적인 백병전이 시작되고는 여섯 번째 날.

한계에 도달했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며칠 전부터 고비가 있었지만, 반란군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버텨 냈다.

그리고 헤르나드의 일반 백성들도 반란군을 도왔다.

그들은 물자를 나르거나 조잡한 농기구로 같이 목숨을 걸었지만, 그런 전력으로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이 죽었다.

이제는 5만도 채 남지 않은 병력에, 비에토 공작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발할라여. 대체 어디까지 추락한단 말이냐.’

며칠 전.

마린의 소식을 들었다.

발할라의 백성들이 마침내 반란군의 부름에 응했는데, 발할라 황제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파격적인 대응을 보여 주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발할라 황제가 잔인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민심을 정면에서 부정할 줄은 몰랐다.

압도적인 공포는 들고일어나려던 민심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분명히 민심의 불길은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발할라 황제는 그를 넘어서는 공포 정치로 상황을 무마시켜 버렸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하비에르의 워프 게이트를 파괴했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발할라 황제. 정말 잔인하구나.’

반란군.

그들은 벼랑 끝에 몰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대단한 행보를 보였지만, 상식을 파괴하는 발할라 황제의 판단은 조금의 반전도 허락하지 않았다.

죽는 것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 발할라가 변화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고, 패배의 책임을 떠안아야 할 로만 드미트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콰직!

로열 나이트의 머리를 날렸다.

그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비에토 공작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오냐! 덤벼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너희를 상대로 등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직감했다.

열흘째의 오후.

오늘을 끝으로, 자신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것이다.

* * *

성벽과 떨어진 거리.

지옥으로 변해 버린 헤르나드의 성벽을 바라보며, 고메스 백작은 질린 듯한 기색을 보였다.

“끈질긴 녀석.”

열흘.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처음 전략대로라면 칠팔일 정도에 헤르나드를 무너트리리라고 생각했건만, 반란군의 저항이 매우 격렬했다.

게다가 반란군에 가담하는 백성들이 문제였다.

그들이 대단한 전력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늘어나는 숫자에 헤르나드를 단번에 무너트릴 수 없었다.

천천히.

상대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지긋지긋했던 내란의 끝이 보였다.

‘반란군이 정리되고 나면 로만 드미트리도 더는 방법이 없겠지. 그나저나 비에토 공작은 참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야. 발할라 황제 폐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권력의 흐름에 편승했다면 지금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았을 텐데. 쯧쯧, 왜 굳이 이런 선택으로 죽음을 자초했을까.’

미련했다.

비에토 공작이 물러난 덕분에, 새로운 얼굴들이 발할라의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다.

빠르면 서너 시간 안으로.

헤르나드를 무너트릴 것 같았다.

여유로운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고메스 백작은, 마법 통신기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빨간 불빛.

긴급이었다.

순간 굳은 얼굴로 통신을 받았다.

삑.

“무슨 일이십니까?”

[고메스 백작. 지금 당장 병력의 일부를 회군시켜라.]

통신기 너머.

벨피르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메스 백작은 표정을 찌푸리며, 말도 안 된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고지가 눈앞입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헤르나드를 함락시킬 수 있을 텐데, 지금 병력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반란군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릅…….”

[야 이 새끼야! 내 말 똑바로 들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벨피르 후작이, 통신기 너머로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분노를 표출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시다. 교수대에 끌려가 매달리기 싫으면, 지금 당장 병력을 회군시키라고!]

회군 명령.

고메스 백작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마법 통신기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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