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5화 (355/615)

355화 치킨 게임(chicken game) (3)

발할라의 방식은 정석대로였다.

플레어를 전면에 내세웠고, 수십 개의 공성 병기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퉁.

투투투투투퉁.

하늘이 화염으로 뒤덮였다.

성벽에 떨어지자 방어 마법이 형성되었고, 주변으로 흩어지는 불길에 헤르나드의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어 마법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마법 방어진의 내구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고, 성벽 너머로 보이는 백만의 군대를 막을 자신은 없었다.

첫날.

발할라는 내구력을 깎는 것에 집중했다.

조급해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군대가 어떤 난리를 피우든, 황제의 군대가 더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열하되 확실하게. 발할라의 지휘관인 고메스 백작은 차분한 얼굴로 헤르나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하루 내내 작렬하는 플레어로 인해, 마법 방어진을 보수하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반란군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틀 뒤.

드미트리가 북부를 무너트리고 다섯 번째 날.

발할라의 진영에 변화가 생겼다.

“마법사들이다!”

“배가본드(vagabond)의 마법사들까지 동원하다니!”

발할라의 마탑 중 하나.

방랑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전장을 전전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어떤 마탑보다도 전장에서만큼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발할라 황제가 동원한 특수 전력 중 하나였다.

황제의 명령이 없었다면, 배가본드의 마법사들은 절대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윈드 필드(Wind Field).”

번쩍.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마법이 발현되었다.

강력한 칼바람과 더불어 하늘이 까맣게 물들더니, 먹구름 사이로 수십 다발의 번개가 작렬했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마법 공격이었다.

배가본드의 마법사들은 끊임없이 마법을 발현했고, 플레어도 계속해서 화염을 발사해 성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반란군의 마법사들도 구경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방어 마법으로 수비하고, 어떤 이들은 공격 마법으로 반격하고, 성벽 뒤에서는 발리스타(ballista)를 활용해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애초에 전력 차이가 극심하기에 발할라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헤르나드의 성벽은 이미 내구도가 많이 상한 상태였다.

반란군이 한번 점령하고, 황제의 군대가 추가로 공격하면서, 아무리 보수를 했다고 한들 건재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반란군의 병사들이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겨우 삼 일 만에 성벽의 마법 방어가 뚫린다면, 이후 진행될 백병전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쿠웅.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끝났다.

너무나도 이른 타이밍이었고, 상황을 지켜보던 고메스 백작은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전군 진군하라! 극악무도한 반역도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진군하라!”

황제의 병사들이 앞으로 밀려들었다.

백만의 병사들이 진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고, 그들은 원거리 공격을 대비해서 방패를 교차해서 하늘 위를 막았다.

성벽 위에서 수도 없이 발사되는 화살들.

일부가 방패를 뚫고 안에 있는 병사를 공격했지만, 황제의 병사들이 코앞에 도달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척.

척척척척.

성벽에 사다리가 걸렸다.

차례로 올라오는 적들의 모습에, 비에토 공작이 소리쳤다.

“막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막아라! 우리가 무너지면, 발할라의 미래도 끝이다!”

악에 받친 목소리.

하지만.

상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 * *

해가 저물어 갔다.

한차례 죽음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란군의 병사들이 성벽 곳곳에서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겨우 한 번의 전투일 뿐이다.

초반 이틀은 마법 공격을 막아 내느라 시간을 대부분 보냈기에, 처음으로 황제의 병력을 맞닥트린 것인데 벌써 이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받았다.

피로 물든 비에토 공작의 모습에.

산체스가 다가와 말했다.

“정확한 피해 상황은 알아봐야겠지만, 대략적으로 확인한 결과 5만 명 정도의 병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황제의 군대는 그보다 2배 이상의 피해를 입었지만, 문제는 그렇다 할지라도 90만에 달하는 병력이 남았습니다. 공작님. 이대로라면 헤르나드가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렇겠지. 발할라 황제가 이곳 헤르나드에 병력을 집결한 순간부터, 우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비에토 공작은 허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5만의 병사.

자신을 따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인 그들이, 단 하루 만에 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쩌면 이게 자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빌린다고 한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자랑하는 발할라 황제에 대항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검을 뽑아 들었고,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로만 드미트리가 루에노스와 포트벨을 벌써 무너트렸다는 겁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그들이 며칠 안으로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이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드미트리의 군대가 산티노를 무너트리고 워프 게이트를 점령, 발할라 황실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의 시간이 있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고로.

반란군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에토 공작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나는 그가 단 며칠 만에 헤르나드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성과를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는 모두 죽겠지. 발할라를 위해 올바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반란군으로 규정되고 죽어서도 시체가 짓밟히고 모욕을 당할 것이다.”

예상한 일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그에게 현실을 강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옳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끝까지 발악할 것이다. 반란군이 이곳 헤르나드에서 모두 죽는다고 한들, 우리는 발할라 백성들의 가슴에 발할라의 불씨를 심어 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발할라의 혼을 이어받은 누군가가, 분명히 발할라의 뜻을 이어 줄 것이다.”

참담한 심정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미.

반란이 실패했음을 받아들였다.

* * *

육 일째.

드미트리 연합군이 산티노에 도착했다.

겨우 삼 일 만에 루에노스와 포트벨을 무너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한 덕분에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산티노에 도달했다.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일주일에서 딱 하루가 남은 상황이었고, 도착 당일은 무리하기보다는 휴식하는 것에 집중했다.

다음 날.

병력을 움직였다.

성벽과 멀리 떨어진 거리에 대치한 뒤에, 로만 드미트리는 산티노의 성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드미트리 왕국의 로만 드미트리다. 산티노의 영주에게, 대전사 전투를 신청한다.”

대전사 전투!

그 단어에 성벽 위가 웅성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전사 전투는 개인의 무력으로 기세를 잡는 방식인데, 산티노에 그만한 존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발할라 전체로 따져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선언한 아레스가 알바레즈와 세자르를 차례로 쓰러트렸는데, 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분명한 로만 드미트리를 대체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이건 명백하게 발할라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성벽 위.

산티노 백작이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거절하겠다! 네 녀석의 더러운 의도가 훤한데, 우리가 왜 그따위 제안을 받아들인단 말이냐!”

단호한 목소리였다.

헤르나드.

그곳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앞으로 이삼 일 안으로 승부가 날 텐데, 굳이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따라 주다가 상황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이곳 산티노에는 포트벨의 병력도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포트벨을 무너트린 덕분에, 산티노는 더 많은 병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상대가 디스펠 공격을 시도한다는 정보도 미리 파악한 상태였다.

게릴라 공격을 소방 마법으로 대응했던 것처럼, 그들은 짧은 시간에 대응 방법을 마련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한때 발할라는 승패를 떠나, 대결을 피하지 않는 전사의 나라라고 들었건만. 이제는 실리를 따지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나라로 전락하다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십이면 십, 백이면 백. 얼마든지 도전을 받아들여 주겠다. 성문을 열고 나와 나를 상대하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상대의 반응?

뻔했다.

묵묵부답(默默不答).

입을 다물었다.

더 대화를 이어 나갔다간, 발할라의 자존심만 바닥으로 추락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그래, 그렇게 나온다면.”

슥.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쫘악-

“내가 그곳으로 가겠다.”

* * *

그것은 마법 스크롤이었다.

마나가 일었다.

환하게 빛나며, 로만 드미트리의 등 뒤에 날개가 펼쳐졌다.

팔락.

“플라이(fly).”

비행 마법.

로만 드미트리가 하늘로 떠올랐다.

한때 아레스가 단검을 활용해서 성벽을 올랐다는 정보에, 발할라는 외벽에 미끄러움을 유발하는 마법을 걸어 발판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걸 떠나서. 애초에 산티노의 성벽은 높기에, 뛰어올라서 단번에 성벽 안으로 들어서는 작전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날아서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던 산티노 백작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막아라!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팟.

푸슈슈슈슉.

사방에서 화살이 발사되었다.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 주변으로 화살이 빼곡히 밀려들었지만, 그들의 의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파이어 실드(fire shield).”

“파이어 실드.”

화륵.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어나며 로만 드미트리를 보호했다.

화살들이 단번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막히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다는 듯이 날아가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산티노의 마법사들이 나섰다.

그들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며, 로만 드미트리를 격추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피닉스와 헥토르의 마법사들.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보호했다.

디스펠 공격과 방어 마법으로 어떻게든 공격해 오는 것들을 차단해 버렸고,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성벽 근처로 도달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단 한 명의 존재를 성벽 위에 올리려는 사람들, 그것을 막고자 발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발악하는 사람들.

비상식적인 전개였다.

보통은 이따위 방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랐다.

‘성벽 안으로 들였다간 끝이다.’

국경 너머.

소문으로 들었다.

일개 개인이 보여 준 압도적인 무력을.

생각해 보니 대전사 전투는 애초에 페이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대전사 전투를 거절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일부러 대전사 전투를 빌미로 성벽으로 최대한 다가갔다.

만약 대전사 전투를 승낙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을 취했을 것이다.

어떤 존재가 발할라를 대표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방법은 없었다.

“막아, 막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대비하지 못했던 상황.

마법사들이 전력을 끌어올렸다.

기어코 마법 방어를 뚫어 내고 공격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일으킨 검막에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플라이는 비행 능력을 부여하는 마법이다.

전투 능력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 산티노의 전력으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떨어트릴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에 관한 대비를 했을 것이다.

결국.

탁.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 위에 안착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격해!”

“죽여!”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산티노의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며, 마치 벌떼가 밀려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로만 드미트리를 덮쳤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플라이를 이용한 공성 방법은 고전적으로 유행했던 방식이었다.

그것이 금방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 이유는, 그렇게 성벽 위에 안착한다고 한들 목숨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로.

푸확.

“크악!”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병사들.

순식간에 수십의 적을 도륙한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들어 멀리 떨어진 산티노 백작을 보았다.

“당장 발할라 황실에 연락해. 산티노가 위험하다고.”

웃었다.

소름이 돋는 그 광경에, 산티노 백작은 황급히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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