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2화 (352/615)

352화 낭만을 잃은 나라 (10)

고메스 백작은 일단 자리를 떠났다.

패배의 충격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세자르의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순간 세상이 멈춰 버린 듯 숨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아레스가 세자르를 이기다니.’

충격적이었다.

아레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자르는 최근 십수 년간 발할라의 정상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 주었던 존재다.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곳 발할라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였고, 아무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레스는 아직 젊었다.

발할라 역대 제일의 재능이라는 수식어로 아레스를 표현한다고 한들, 그의 나이에 발할라 랭킹 3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식을 파괴하는 행보였다.

발할라의 검이 꺾였다.

고메스 백작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온갖 감정으로 소용돌이치는 그들의 눈동자는, 아레스의 마지막 발언에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하다. 세자르와 알바레즈를 잃은 상황에서 북부 전선이 뚫리고, 발할라의 민심이 황제 폐하를 향해 분노를 드러낸다면. 그때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반란군의 공격이 우리의 심장을 노릴 수도 있다. 침착해야 한다. 전쟁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양상은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아직.

발할라 황실은 힘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수도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사방에서 일어나는 전투가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단 북부 전선부터.’

삑.

통신을 연결했다.

북부의 소식을 알린 통신병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물었다.

[드미트리군의 마법 전력이 너무 강합니다.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막았는데도, 마법 방어를 무효화시키는 디스펠 공격에 순식간에 성문이 뚫리고 말았습니다. 지휘관님. 성으로 들어선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조금도 허황되지 않았습니다.]

현기증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성으로 들어섰다는 것은 불길한 미래를 의미했다.

북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메스 백작이 보름은 버틸 수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단단한 성벽을 믿었기 때문이지, 10만의 병력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평야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린 크로노스의 30만 대군은 그대로 학살당했다.

8서클 마법사인 셰피르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북부의 전력만으로는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북부는 뚫릴 것이다.

황제의 군대는 헤르나드에 도착하기는커녕 수도를 떠나지도 못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전쟁을 혼란에 빠트렸다.

고메스 백작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북부 전체를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한 이득을 얻어야만 했다.

“결사 항전(決死抗戰)을 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라.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지 못해도 좋다. 발할라의 영토를 침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적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라. 만약에 무사한 몰골로 살아 돌아오는 패잔병이 있다면. 발할라는 겁쟁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가족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통신기 너머.

절망에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고메스 백작의 명령은 잔인했다.

하지만 제국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제국과 왕국.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력(國力)은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구수로부터 비롯되는 압도적인 머릿수도 제국을 대표하는 강점 중 하나였다.

제국과 왕국의 10만 병력은 의미가 똑같지 않다.

드미트리와 헥토르는 10만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무리해야 한다면, 발할라 제국은 그 정도 병력을 잃어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렇기에 결사 항전을 명령했다.

북부가 뚫린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패잔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는 적의 전력을 갉아먹는 게 옳았다.

걸음을 서둘렀다.

북부가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북부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를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란군을 정리하든.

드미트리군에 대응하든.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 * *

발할라 신전 앞.

고메스 백작이 떠난 그 자리에, 방금까지 결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발할라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아레스의 발언.

다들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발할라는, 절대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큼 부끄러운 나라가 아니었다.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복잡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슬픔을 넘어서 분노를 표출했다.

“씨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발할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라고. 우리는 전사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랭킹 시스템도 발할라로 인해 도입되었어. 그런데 발할라를 대표하는 세자르가 도태의 상징이라니. 하하,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상대를 특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공허한 외침이었다.

분노를 토해 내는 그의 모습에, 다른 사내도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아레스가 탄생했을 때, 우리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세자르는 만년 이인자로서 크로노스의 카스트로를 쓰러트리지 못하니, 발할라 역대 최고의 재능인 아레스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고 말했었습니다. 실제로 아레스는 발할라의 자랑이었습니다. 비록 발할라 황실에 대단한 충성심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순위를 한 단계씩 올릴 때마다 우리는 황실의 시선을 피해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방금 발할라를 버렸습니다. 도태되어 버린 발할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자마자, 그는 세자르를 쓰러트리며 본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아레스의 승리.

단순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현실을 눈앞에서 증명했고, 아레스에게 걸었던 기대감이 컸기에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들끓었다.

감정이 동화되었다.

처음에는 충격, 그리고는 부정으로 이어지던 감정이, 황실에 대한 분노로 변해 갔다.

“발할라 축제가 있었던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에 대한 암살 시도를 알면서도 발할라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당당하게 무대에 올랐고, 전사로서 바르보사를 상대해 그를 쓰러트렸습니다. 대체 누가 발할라의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입니까?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녀석들이 권력자랍시고 발할라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현실이, 정녕 우리가 생각하던 발할라가 맞습니까? 발할라의 권력은 암투(暗鬪)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적어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하나의 사실을, 그는 기어코 뱉어 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무능한 14번째 아들이,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서 발할라의 권력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발할라는 잘못된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들고일어나야 합니다. 발할라의 현실을 더는 방관하지 않고, 비에토 공작님이 목소리를 높인 지금이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합니다.”

그건.

역린이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감히 거론하지 못했던 진실.

발할라의 황제들은 모두 대단한 검사였다.

대대로 발할라의 권력은, 핏줄을 떠나서 전사로서의 자질을 증명한 사람들에게 대물림되었다.

그런 이유로.

부끄러웠다.

크로노스의 황제는 대단한 오라 검사인데,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발할라의 황제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만 같은 빈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엄청난 치부였다.

그때부터 잘못되었다.

발할라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순간부터, 발할라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발할라를 위해 목숨을 겁시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분노했다.

아레스의 발언.

그것이 기어코, 발할라의 민심(民心)에 불을 붙였다.

* * *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갔다.

벨피르 후작과 고메스 백작은,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북부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세자르마저 패배한 상황.

고메스 백작의 물음에,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확실히 대단한 녀석이야. 발할라의 영토에서 살아서 돌아갔을 때부터, 그 녀석이 언젠가는 발할라의 앞길을 막아서리라는 사실을 예상했지. 고메스 백작. 지금부터는 서로의 전력을 건 싸움이다. 서로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먼저 물러나는 쪽이 파멸할 것이다.”

“……북부를 버리겠다는 의미입니까?”

“정확히는 반만 맞았다. 북부를 버리되, 적들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결국.

이번 싸움의 본질은 내란이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전쟁의 불길을 꺼트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전략은 한결같다. 아레스로 발할라 최상위 랭커들을 처리하고, 직접 북부 전선을 공격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가 반란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그것이 드미트리의 한계다. 현재 발할라에서 벌어지는 상황들만 놓고 보자면 그들은 당장에라도 발할라를 무너트릴 듯 매서운 기세를 보이지만, 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벨피르.

그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권력자다.

적어도 힘이 아닌,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고 주도하는 방법을 알았다.

“드미트리-헥토르 연합군의 병력은 겨우 10만이다. 그들이 정녕 발할라를 무너트리고자 했다면, 겨우 그 병력으로 북부 전선을 넘었을 것 같은가. 천만에! 북부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무력시위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 북부 이상으로는 전진할 생각이 없지만 과격한 행보로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려 하고 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저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필요하게 북부를 신경 쓰느라고, 정말 중요한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다 만약에. 북부를 넘어서 진군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때는 대륙의 정세를 이용해야지. 일부 병력을 북부에 배치해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너는 지금 바로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쓸어 버려라. 로만 드미트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 조금 전. 크로노스와의 연락을 통해 그들의 도움을 구했다. 휴전 협상 때문에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지만, 훈련을 명목으로 카이로와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웃었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둘은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크로노스는 훈련을 명목으로 움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드미트리가 진군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북부 전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벨피르 후작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발할라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찾았다.

변덕스러운 황제의 빈자리.

그것을 채우는 존재는 매번 벨피르 후작의 몫이었다.

“정말 완벽한 계획입니다.”

고메스 백작이 감탄했다.

한때는 정적(政敵)의 관계였지만.

벨피르 후작은 인정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만약 그들의 대화가 거기에서 마무리되었다면, 그들은 웃는 얼굴로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끼익.

문을 열고.

통신병이 들어섰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마법 통신기를 내밀었다.

“……북부 전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벨피르 후작이 마법 통신기를 받아 들자, 통신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 컥!]

우득.

단말마의 비명과.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새로운 목소리가 통신기 너머로 말했다.

[벨피르 후작. 참 실망스럽군.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선물로 보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날 맞이할 준비를 하다니.]

“정녕 끝까지 해 보겠다는 것이냐.”

눈가가 분노로 떨렸다.

방금 죽은 사람.

킬리안 후작이었다.

고메스 백작은 분명히 결사의 항전을 명령했는데, 이렇게 빨리 북부 전선이 로만 드미트리의 손아귀에 떨어질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당황한 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도 끝까지 할 생각은 없다. 지금이라도 발할라 황제를 내 앞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린다면, 발할라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멈추어 주지.]

조롱이었다.

명백한 도발에, 벨피르 후작이 분노를 토해 냈다.

“개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자고. 지금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이 카이로 국경으로 집결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너희가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병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순간, 그 대가는 처절하게 받게 된다는 의미다. 나는 네가 어떤 계획을 꾸미든 간에 지금 당장 병력을 보내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쓸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원한을 뼈에 새기고, 반란군을 모두 처리한 뒤에 드미트리를 대륙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미 드미트리와 발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로만 드미트리. 넌 실수했어. 우리가 드미트리와의 타협을 바랐던 이유는 무의미한 희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끝을 볼 수밖에 없다. 곧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동시에 적으로 둔다는 것이, 이 샐러맨더 대륙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협박이었다.

치킨 게임(chicken game).

속도를 높였다.

상대가 먼저 도망치도록, 상대가 먼저 뒤로 물러나도록, 벨피르 후작은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발할라의 뜻은 잘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내 생각을 말해 주지.]

담담한 음성이었다.

크로노스의 존재도, 벨피르 후작의 협박도,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밀고 들어갈 것이다. 내 목적은 발할라 제국을 상대로 그날의 일을 사과받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끝까지 그 태도를 유지해 봐.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생각. 그러다 결국…….]

웃었다.

[넌 날 만나게 될 것이다.]

352화 낭만을 잃은 나라 (10)

고메스 백작은 일단 자리를 떠났다.

패배의 충격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세자르의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순간 세상이 멈춰 버린 듯 숨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아레스가 세자르를 이기다니.’

충격적이었다.

아레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자르는 최근 십수 년간 발할라의 정상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 주었던 존재다.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곳 발할라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였고, 아무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레스는 아직 젊었다.

발할라 역대 제일의 재능이라는 수식어로 아레스를 표현한다고 한들, 그의 나이에 발할라 랭킹 3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식을 파괴하는 행보였다.

발할라의 검이 꺾였다.

고메스 백작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온갖 감정으로 소용돌이치는 그들의 눈동자는, 아레스의 마지막 발언에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하다. 세자르와 알바레즈를 잃은 상황에서 북부 전선이 뚫리고, 발할라의 민심이 황제 폐하를 향해 분노를 드러낸다면. 그때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반란군의 공격이 우리의 심장을 노릴 수도 있다. 침착해야 한다. 전쟁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양상은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아직.

발할라 황실은 힘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수도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사방에서 일어나는 전투가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단 북부 전선부터.’

삑.

통신을 연결했다.

북부의 소식을 알린 통신병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물었다.

[드미트리군의 마법 전력이 너무 강합니다. 마운틴의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막았는데도, 마법 방어를 무효화시키는 디스펠 공격에 순식간에 성문이 뚫리고 말았습니다. 지휘관님. 성으로 들어선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조금도 허황되지 않았습니다.]

현기증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성으로 들어섰다는 것은 불길한 미래를 의미했다.

북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메스 백작이 보름은 버틸 수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단단한 성벽을 믿었기 때문이지, 10만의 병력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평야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린 크로노스의 30만 대군은 그대로 학살당했다.

8서클 마법사인 셰피르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북부의 전력만으로는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북부는 뚫릴 것이다.

황제의 군대는 헤르나드에 도착하기는커녕 수도를 떠나지도 못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전쟁을 혼란에 빠트렸다.

고메스 백작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북부 전체를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한 이득을 얻어야만 했다.

“결사 항전(決死抗戰)을 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라.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지 못해도 좋다. 발할라의 영토를 침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적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라. 만약에 무사한 몰골로 살아 돌아오는 패잔병이 있다면. 발할라는 겁쟁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가족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통신기 너머.

절망에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고메스 백작의 명령은 잔인했다.

하지만 제국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제국과 왕국.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력(國力)은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구수로부터 비롯되는 압도적인 머릿수도 제국을 대표하는 강점 중 하나였다.

제국과 왕국의 10만 병력은 의미가 똑같지 않다.

드미트리와 헥토르는 10만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무리해야 한다면, 발할라 제국은 그 정도 병력을 잃어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렇기에 결사 항전을 명령했다.

북부가 뚫린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패잔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는 적의 전력을 갉아먹는 게 옳았다.

걸음을 서둘렀다.

북부가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북부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를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란군을 정리하든.

드미트리군에 대응하든.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 * *

발할라 신전 앞.

고메스 백작이 떠난 그 자리에, 방금까지 결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발할라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아레스의 발언.

다들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발할라는, 절대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큼 부끄러운 나라가 아니었다.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복잡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슬픔을 넘어서 분노를 표출했다.

“씨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발할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라고. 우리는 전사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랭킹 시스템도 발할라로 인해 도입되었어. 그런데 발할라를 대표하는 세자르가 도태의 상징이라니. 하하,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상대를 특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공허한 외침이었다.

분노를 토해 내는 그의 모습에, 다른 사내도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아레스가 탄생했을 때, 우리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세자르는 만년 이인자로서 크로노스의 카스트로를 쓰러트리지 못하니, 발할라 역대 최고의 재능인 아레스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고 말했었습니다. 실제로 아레스는 발할라의 자랑이었습니다. 비록 발할라 황실에 대단한 충성심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순위를 한 단계씩 올릴 때마다 우리는 황실의 시선을 피해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방금 발할라를 버렸습니다. 도태되어 버린 발할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자마자, 그는 세자르를 쓰러트리며 본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아레스의 승리.

단순하지 않았다.

발할라의 현실을 눈앞에서 증명했고, 아레스에게 걸었던 기대감이 컸기에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들끓었다.

감정이 동화되었다.

처음에는 충격, 그리고는 부정으로 이어지던 감정이, 황실에 대한 분노로 변해 갔다.

“발할라 축제가 있었던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에 대한 암살 시도를 알면서도 발할라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당당하게 무대에 올랐고, 전사로서 바르보사를 상대해 그를 쓰러트렸습니다. 대체 누가 발할라의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입니까?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녀석들이 권력자랍시고 발할라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현실이, 정녕 우리가 생각하던 발할라가 맞습니까? 발할라의 권력은 암투(暗鬪)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적어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하나의 사실을, 그는 기어코 뱉어 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무능한 14번째 아들이,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서 발할라의 권력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발할라는 잘못된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들고일어나야 합니다. 발할라의 현실을 더는 방관하지 않고, 비에토 공작님이 목소리를 높인 지금이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합니다.”

그건.

역린이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감히 거론하지 못했던 진실.

발할라의 황제들은 모두 대단한 검사였다.

대대로 발할라의 권력은, 핏줄을 떠나서 전사로서의 자질을 증명한 사람들에게 대물림되었다.

그런 이유로.

부끄러웠다.

크로노스의 황제는 대단한 오라 검사인데, 전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발할라의 황제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만 같은 빈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엄청난 치부였다.

그때부터 잘못되었다.

발할라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순간부터, 발할라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발할라를 위해 목숨을 겁시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분노했다.

아레스의 발언.

그것이 기어코, 발할라의 민심(民心)에 불을 붙였다.

* * *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갔다.

벨피르 후작과 고메스 백작은,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북부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세자르마저 패배한 상황.

고메스 백작의 물음에,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확실히 대단한 녀석이야. 발할라의 영토에서 살아서 돌아갔을 때부터, 그 녀석이 언젠가는 발할라의 앞길을 막아서리라는 사실을 예상했지. 고메스 백작. 지금부터는 서로의 전력을 건 싸움이다. 서로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먼저 물러나는 쪽이 파멸할 것이다.”

“……북부를 버리겠다는 의미입니까?”

“정확히는 반만 맞았다. 북부를 버리되, 적들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결국.

이번 싸움의 본질은 내란이었다.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전쟁의 불길을 꺼트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전략은 한결같다. 아레스로 발할라 최상위 랭커들을 처리하고, 직접 북부 전선을 공격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가 반란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그것이 드미트리의 한계다. 현재 발할라에서 벌어지는 상황들만 놓고 보자면 그들은 당장에라도 발할라를 무너트릴 듯 매서운 기세를 보이지만, 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벨피르.

그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권력자다.

적어도 힘이 아닌,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고 주도하는 방법을 알았다.

“드미트리-헥토르 연합군의 병력은 겨우 10만이다. 그들이 정녕 발할라를 무너트리고자 했다면, 겨우 그 병력으로 북부 전선을 넘었을 것 같은가. 천만에! 북부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무력시위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 북부 이상으로는 전진할 생각이 없지만 과격한 행보로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려 하고 있다. 로만 드미트리의 저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필요하게 북부를 신경 쓰느라고, 정말 중요한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다 만약에. 북부를 넘어서 진군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때는 대륙의 정세를 이용해야지. 일부 병력을 북부에 배치해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너는 지금 바로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쓸어 버려라. 로만 드미트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 조금 전. 크로노스와의 연락을 통해 그들의 도움을 구했다. 휴전 협상 때문에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지만, 훈련을 명목으로 카이로와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웃었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둘은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크로노스는 훈련을 명목으로 움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드미트리가 진군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북부 전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벨피르 후작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발할라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찾았다.

변덕스러운 황제의 빈자리.

그것을 채우는 존재는 매번 벨피르 후작의 몫이었다.

“정말 완벽한 계획입니다.”

고메스 백작이 감탄했다.

한때는 정적(政敵)의 관계였지만.

벨피르 후작은 인정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만약 그들의 대화가 거기에서 마무리되었다면, 그들은 웃는 얼굴로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끼익.

문을 열고.

통신병이 들어섰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마법 통신기를 내밀었다.

“……북부 전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벨피르 후작이 마법 통신기를 받아 들자, 통신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 컥!]

우득.

단말마의 비명과.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새로운 목소리가 통신기 너머로 말했다.

[벨피르 후작. 참 실망스럽군.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선물로 보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날 맞이할 준비를 하다니.]

“정녕 끝까지 해 보겠다는 것이냐.”

눈가가 분노로 떨렸다.

방금 죽은 사람.

킬리안 후작이었다.

고메스 백작은 분명히 결사의 항전을 명령했는데, 이렇게 빨리 북부 전선이 로만 드미트리의 손아귀에 떨어질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당황한 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도 끝까지 할 생각은 없다. 지금이라도 발할라 황제를 내 앞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린다면, 발할라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멈추어 주지.]

조롱이었다.

명백한 도발에, 벨피르 후작이 분노를 토해 냈다.

“개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자고. 지금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이 카이로 국경으로 집결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너희가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병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순간, 그 대가는 처절하게 받게 된다는 의미다. 나는 네가 어떤 계획을 꾸미든 간에 지금 당장 병력을 보내 헤르나드의 반란군을 쓸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원한을 뼈에 새기고, 반란군을 모두 처리한 뒤에 드미트리를 대륙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미 드미트리와 발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로만 드미트리. 넌 실수했어. 우리가 드미트리와의 타협을 바랐던 이유는 무의미한 희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끝을 볼 수밖에 없다. 곧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동시에 적으로 둔다는 것이, 이 샐러맨더 대륙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협박이었다.

치킨 게임(chicken game).

속도를 높였다.

상대가 먼저 도망치도록, 상대가 먼저 뒤로 물러나도록, 벨피르 후작은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발할라의 뜻은 잘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내 생각을 말해 주지.]

담담한 음성이었다.

크로노스의 존재도, 벨피르 후작의 협박도,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밀고 들어갈 것이다. 내 목적은 발할라 제국을 상대로 그날의 일을 사과받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끝까지 그 태도를 유지해 봐.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생각. 그러다 결국…….]

웃었다.

[넌 날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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