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낭만을 잃은 나라 (9)
한 걸음.
두 걸음.
발할라 신전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외모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야만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발할라의 전사들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한 외모는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귀족을 연상시켰다.
다만, 어깨에 가죽끈으로 대충 동여맨 클레이모어(Claymore)가 그의 정체성을 증명했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무게에 거칠어 보이는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함부로 다룰 수 없을 것 같았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아레스를 마주 보는 거리에서, 세자르가 웃음을 보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어. 내게 가르침을 받던 네가, 설마 나를 상대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밀다니.”
아레스와 세자르.
둘은 구면이었다.
10년 전.
그때도 상당한 명성을 떨치던 아레스는, 우연한 기회에 발할라 제일검이라고 불리는 세자르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제지간(師弟之間)을 의미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겨우 며칠에 불과했지만, 아레스는 진심으로 세자르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은.
둘 사이에 그만한 격차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아레스가 아무리 대단한 행보를 보여 준다고 한들, 세자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10년 전 그날. 네가 나의 제자가 되었다면 내 모든 것을 전수받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었을 텐데. 아레스. 참으로 멍청하구나. 어떤 사람들은 알바레즈와 나를 단순히 한 단계의 차이로 비교하지만, 그건 하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의 멍청한 판단이지.”
스르르륵.
가죽끈을 풀었다.
일반 남성들도 두 손으로 들 만한 검을, 세자르는 한 손으로 들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네가. 겨우 알바레즈를 쓰러트렸다는 성취감에 취해 내게 도전하다니.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잘못 판단했다고 빌어라. 앞으로 발할라 황제 폐하를 위해 살겠다고 내게 애원해라. 그렇게 한다면, 발할라의 미래를 위해 한 번은 살려 주지.”
검을 든 순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들었다.
아레스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 10년 전, 네게 가르침을 받았지.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검사로서, 전사로서 내가 발전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받았지.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
슥.
검을 들었다.
명백한 적의는, 물러설 마음이 없음을 증명했다.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며칠. 상대를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났다. 너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너를 발할라 제일검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너에게 배울 것이 있었던 시간은 단 며칠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말 재밌는 건.”
웃음이 짙어졌다.
지난 일주일.
그에게는, 정말 강렬한 기억이었다.
“발할라를 떠나 드미트리에 정착한 지금.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드미트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거다.”
* * *
아르카디아에서 돌아오고.
산체스를 만났다.
그로부터 일주일.
발할라의 내란을 준비할 시간은 짧았고, 아레스는 일주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어려운 미션을 맡았다.
알바레즈와 세자르.
두 거물을 쓰러트려야 했다.
아레스는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을 이루어 낼 생각이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각에 그를 훈련장으로 불러들였다.
아레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들고 있는 무기였다.
평소에 사용하는 디제스터(disaster)가 아닌, 평범해 보이는 쌍검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무기는.
알바레즈를 연상시키는 것임을.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검을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너의 상대가 되어 주겠다.”
아레스의 임무.
위험했다.
아무리 발할라의 랭커 자리를 이용하는 계획이라지만, 목적을 이루고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의 훈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레스를 사지로 몰아넣고 방관하는 것이 아닌, 그가 완벽하게 계획을 이행하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려 했다.
심장이 뛰었다.
아레스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전력을 발휘해,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 결과.
퍽.
콰당!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은 아레스를 검술의 천재라고 불렀지만, 수십 차례 이루어진 공방에서 아레스는 단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눈이 감탄을 넘어서 경악으로 물들었다.
발할라의 랭커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백, 수천 번의 결투를 진행했던 아레스기에 웬만한 데이터는 머릿속에 쌓여 있다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와 공방을 주고받으면 어느 순간 눈앞에 파란 하늘이 보였다.
당혹스러웠다.
두 자루의 검.
로만 드미트리는 쌍검의 극한을 보였다.
자신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최악의 수만을 택하며, 압도적인 무력으로 수차례 자신을 무릎 꿇렸다.
‘……도저히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웃겼다.
10년 전.
자신은 세자르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해서 한참 모자라던 시절이었건만, 겨우 며칠의 가르침만 받고도 아레스는 세자르의 곁을 떠났다.
당시 세자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의 제자로서 살아가면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될 텐데, 왜 떠나려고 하냐면서 아레스를 붙잡고자 했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했다.
과거의 자신이 세자르를 쓰러트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세자르보다 한참 짧은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세자르가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아레스를 매번 무너트렸지만, 언젠가는 그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넘보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막막했다.
벽을 느꼈다.
드미트리와의 연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바레즈는 이 정도로 충분하고.”
검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클레이모어였다.
이미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던 아레스는, 이어진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헛웃음을 보였다.
“지금부터는 수준을 조금 높여, 세자르의 방식으로 상대해 주겠다.”
그날.
아레스는 천외(天外)의 세상을 경험했다.
* * *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세자르를 깎아내리는 아레스의 발언에, 점잖아 보이던 세자르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어렸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실력으로 증명할 차례였다.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할라의 사제가, 마침내 모두가 바라던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펄럭.
탓.
콰르르르르르릉.
선공은 세자르였다.
오라를 폭발시키며 빠르게 달려드는 그의 모습에, 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을 투영시켰다.
“세자르는 한때 야만의 전사라고 불리던 존재다. 사납게 몰아붙여서 숨을 돌릴 틈을 허락하지 않고, 힘으로 찍어 눌러 상대를 제압한다고 들었다. 그러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상대에게 증명하라.”
카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충돌이 일었다.
아레스가 공격을 막아 내자, 세자르는 이대로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콰앙! 콰앙! 콰앙!
세상이 번뜩였다.
사방에서 들끓는 오라가 작렬하며, 아레스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알바레즈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시작부터 6성의 오라를 발현했다.
하지만 십수 년도 전에 6성의 경지에 올랐던 세자르의 오라는, 드미트리의 방식을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충격 없이 받아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황당하게도, 같은 무기를 사용하던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은 상대적인 자신감을 부여했다.
확.
콰르르르르르릉.
공격을 피했다.
느렸다.
정확히는 로만 드미트리보다 느렸고, 검 위를 내리치는 세자르의 공격 또한 로만 드미트리에 비하면 약했다.
덕분에 격렬한 공방 속에서도 아레스는 여유를 느꼈다.
차분하게 상대의 공격을 하나하나 보면서 막아 냈고, 세자르가 공격 간에 틈을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략했다.
번뜩.
팟.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순간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한 세자르는, 마치 악귀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마치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아레스의 반응은, 세자르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그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상대와의 간격을 허락하지 않았고, 야만의 전사라고 불리던 명성을 증명하는 검술에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결을 지켜보는 사람 중에는 발할라의 랭커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세자르의 공격을 열 번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아레스가 뒤로 밀렸다.
속을 뒤흔드는 충격에, 상대를 쳐 내고는 핏물을 내뱉었다.
“퉷.”
강했다.
세자르는 높디높은 하늘이었다.
최근 대외적인 활동이 없었지만, 그가 오랜 시간 발할라의 정상에 자리한 이유를 무력으로 증명했다.
훅.
하늘 위로 치솟는 검.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그대로 내리꽂혔다.
목숨이 타들어 가는 상황에, 아레스는 가까스로 막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 선택은 옳았어.’
빠른 공격도.
강력한 공격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클레이모어를 사용하던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최악의 상황만을 보여 주었고, 그렇기에 세자르를 상대하면서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에 버금가는 공격을 보여 주진 못했다.
아니,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세자르라는 하늘 위에.
로만 드미트리라는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만약 천외의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더라면, 전력을 다한다고 한들 세자르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건방진 새끼.”
휘잉.
바람이 휘몰아쳤다.
분노한 세자르가 마나를 단번에 끌어 올리더니, 궁지로 몰아붙인 아레스를 향해 필살(必殺)의 일격을 시도했다.
이제껏 그의 자리를 노린 도전자들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렇게 되기도 전에 항상 상대를 쓰러트렸는데, 끝까지 버텨 내는 아레스의 모습에 분노가 앞섰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섬뜩한 장면이었다.
검고 붉은 기운이 검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더니,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주변을 물들였다.
“죽어라!”
콰앙!
콰콰콰콰쾅!
필살의 일격.
아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세상을 물들이는 파괴적인 기운에, 그는 드미트리에서 보냈던 시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수라심법으로 마나를 일으키고.
천마검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의 기술이었지만, 아레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상(理想)을 제시해 주었다.
번뜩.
검을 뻗었다.
10%?
5%?
아니, 진짜 천마 검법의 1%도 따라 하지 못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동경하며 어떻게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했다.
그는 천재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알렉산드르의 체계를 무시하고 본인의 세상을 창조해 낸.
그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완벽한 정답을 경험하자,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다.
“……?!”
세자르가 눈을 부릅떴다.
아레스의 공격.
그에 오라가 갈라졌다.
자신의 공격이 미처 상대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아레스의 검이 눈앞까지 치고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것이.
서걱-
세자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툭.
데구루루.
세자르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엄청난 광경에 사람들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때, 발할라의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레스 님이 세자르 님을 쓰러트리며, 발할라 랭킹 1위로 등극하셨습니다!”
충격적이었다.
아레스는 검으로 바닥을 지탱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한계였다.
만약 세자르가 조금만 더 몰아붙였다면, 바닥에 머리가 굴러다녔을 사람은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았다.
당장에라도 핏물을 바닥에 쏟아 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으로 물든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아레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현 시간부로 발할라의 랭커 자격을 포기하겠다.”
“헉.”
“……그, 그게 무슨.”
사람들이 당황했다.
랭킹 1위.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놓고 랭커 자리를 포기하겠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발할라 신전에 몰려든 사람들이 대답을 구하는 눈빛을 보이자, 아레스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10년 전. 내가 경험했던 세자르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검사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세자르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세자르는 더 높은 경지를 갈구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세자르가 권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낭만을 잃은 나라에서 힘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요소였고, 권력자들에게 달라붙어 힘을 얻은 세자르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적수(敵手)가 없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 도전한 마지막 도전자가 십 년 전의 알바레즈가 끝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발할라의 현실을 알 수 있지. 그렇게 세자르는 고인 물이 되었다. 위기감을 모르는 전사는 도태되었고, 발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발할라 랭킹.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크로노스는 매년 순위 변동이 컸지만, 세자르가 그렇듯 발할라의 랭커들은 대부분 제자리를 걸었다.
참담했다.
절망적이었다.
10년 전의 세자르가 발전을 갈구했다면, 현재의 아레스는 절대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비난해도 좋다. 매국노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전사로서 태어나, 전사로서 죽을 것이다. 드미트리는 나를 그렇게 살게 해 줄 나라다. 나는 드미트리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끝났다.
검을 거두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기억하라. 우리는 전사의 핏줄을 타고난 존재임을.”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힘겨운 기색을 보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앞을 막아서질 않았다.
아레스는 매국노다.
나라를 버렸다.
하지만 그를 건드릴 수도, 건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때였다.
넋을 잃은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고메스 백작은, 마법 통신기로부터 북부의 소식을 전달받았다.
[서, 성문이 뚫렸습니다! 지금 당장 지원군을 부탁드립니다! 이대로라면 열흘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보고.
순간, 고메스 백작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