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30명의 지원군 (6)
컴컴한 동굴 속.
자이로는 피폐해진 얼굴로 천장 위를 올려보았다.
조그마한 틈으로 이곳만큼이나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며칠 전.
그는 경계를 서는 오크들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취익, 위대하신 그락사르 님이 루나의 요새를 무너트렸다. 이제 너희를 도와줄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니, 노예로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고민하는 게 좋을 거다. 취익, 특히 너. 그따위 눈으로 계속 쳐다보면 산 채로 네 눈을 파먹어 주마.”
오크는 자이로를 가리켰다.
루나의 요새를 무너트렸다는 말.
충격적이었다.
그락사르가 병력을 이끌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자이로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나의 몰락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요새 밖에서의 작전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도착하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빨리 요새가 무너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이로야. 네가 루나를 멸망의 낭떠러지로 밀어 버렸구나.’
숨이 막혔다.
수시로 끌려가는 사람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처음에는 의젓하게 상황을 견뎌 보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동굴에 갇힌 사람 중에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지휘관이 멍청하게 당하는 바람에 식량으로 저장되는 신세가 되었다.
굶주림을 잊었다.
얼굴이 야위어 갔다.
살아도 산 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그때, 오크는 조롱하듯이 무언가를 눈앞에 던졌다.
툭.
“취익, 살고 싶으면 그거라도 먹든가. 끌끌끌.”
기괴한 웃음이었다.
들창코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린 오크는, 철창을 닫고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바닥에.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며칠을 굶주린 사람들이 침을 보이며 달려들 만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공포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깃덩어리였다.
팔 부근을 잘라서 먹이랍시고 던진 것이었고, 사람들은 아무리 죽음의 문턱 앞이라도 차마 그것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참담했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다들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자이로는 고깃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이 놀란 눈빛을 보였다.
인간이길 포기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자이로는 고깃덩어리를 잡더니 그것을 해부했다.
먹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핏물이 뚝뚝 흐르는 그것을 모두 해부하자, 안을 지탱하고 있던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깃덩어리를 구석에 숨기고는 큼지막한 뼈를 몰래 챙겼다.
“다들 조용해. 죽더라도 몇 놈은 데리고 갈 생각이니까.”
탁한 음성.
먹지 못해 목소리는 작았다.
자이로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등 뒤로 조심히 뼈를 바닥에 긁기 시작했다.
벅벅, 벅벅. 신경에 거슬릴 만큼의 작은 소리가 들렸다.
뼈의 끝부분이 날카롭게 변하도록, 오크의 질긴 피부를 뚫을 만큼 강력하도록, 자이로는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설원의 검사.
자신의 삶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죽는 일뿐이었다.
* * *
벅벅.
벅벅, 벅벅.
생각이 많았다.
만약.
정말 만약에,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렸다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겠지.’
겨우 30명이다.
다시 되새겨도 승리를 논할 만큼의 전력은 아니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루나 왕국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원군의 규모로 증명했다.
그건 최소한의 예의일 뿐이다.
루나의 어려움을 대놓고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생색을 낼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보냈다.
이해했다.
루나와 아무런 교류가 없던 드미트리가, 루나를 위해 희생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희망은 없었다는 건가.’
이사벨의 실종.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크로노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루나의 멸망으로 직결되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사벨은 루나의 여왕이다.
아무리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인류의 안위가 아니라 루나의 백성들이었다.
케이든이 말하길.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안위를 우선으로 말했다.
부러웠다.
어쩌면 자이로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군주가 루나 왕국을 이끌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루나는 선택지가 있기에 신을 모신 나라가 아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들이닥쳤고, 성녀가 탄생했기에, 신을 믿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신이시여. 이게 정녕 당신이 원하는 일입니까. 루나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당신을 모셨건만, 우리는 어째서 샐러맨더 대륙을 위해 희생하다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속이 끓었다.
희생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그걸 알면서도, 이사벨의 진심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괜히 책망하고 비난할 사람이 그에게 필요했다.
그게.
인간이었다.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이로는 조화로운 세상이 얼마나 모순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이사벨 님이 실종되지 않았더라도, 아르카디아의 평화는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툭.
손을 멈추었다.
뼈가 날카롭게 갈렸다.
오크 몇 마리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
숨을 느리게 쉬었다.
때를 기다렸다.
마지막 남은 힘을 폭발시켜 안으로 들어서는 오크들을 단번에 제압하도록, 가능하다면 이 안에 갇힌 사람들을 몇 명이라도 살려 보내도록.
자이로는 목숨을 걸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고, 빨갛게 번들거리는 눈빛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살의를 감추었다.
마침내.
끼익.
문이 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탁.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
자이로가 일말의 마나를 폭발시키며 앞으로 달려들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케, 케이든?!”
“자이로!”
눈을 부릅떴다.
눈앞의 존재.
인간들을 핍박하던 오크가 아닌, 피로 물든 케이든이 그곳에 있었다.
* * *
처음에 든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오크들은 분명히 루나의 요새가 무너졌다고 말했건만, 케이든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루나의 병사들이 주변을 정리했다.
그들 뒤로,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들의 시체가 보였다.
“자이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케이든을 보았다.
그는 먼저 물을 챙겨 주었지만, 자이로는 그것을 마시지 않고 진실을 말하라는 눈빛을 보였다.
“내가 끝없는 산맥을 넘어간 사이. 루나의 요새가 오크들에게 함락당했었어. 나는 그때 루나의 미래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생각은 달랐어. 겨우 30명의 병력으로 루나를 되찾을 방법을 말해 주었어. 불가능한 작전이었지. 작전을 실행하면서도, 이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뚝, 뚝.
피가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오크를 도륙했는지, 케이든의 얼굴은 피로 흠뻑 물들었다.
“결과는 지금 네가 확인한 대로야. 우리는 루나의 요새를 탈환하고, 일만의 오크들을 도륙했어.”
경악했다.
30명.
단언컨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숫자는 아니다.
아무리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아르카디아 출신이라지만, 닳도록 읽었던 병법서(兵法書)에서 상식을 알려 주었다.
케이든의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그렇기에 경외심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루나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30명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루나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참담한 감정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결국, 내가 문제였구나.’
로만 드미트리.
그는 구세주였다.
며칠만 기다렸어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을 텐데, 자이로는 진실을 모르고 루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버렸다.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었다.
본인이 바란 것은 루나 왕국의 평화였건만, 결과론적으로 자신의 강력한 주장으로 병력을 끌고 나간 것이 치명적인 패인이 되었다.
죽고 싶었다.
혀라도 깨물어,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행위였다.
자이로는 패배의 책임을, 전장에서 오크들과 싸우다 죽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분은, 그분은 어디에 계시지?”
표현이 바뀌었다.
로만 드미트리에서.
그분이 되었다.
케이든은, 자이로를 챙기며 지금부터 서둘러야 할 이유를 말해주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그락사르와의 전면전을 위해 동쪽으로 떠났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전투가 모두 끝나기 전에, 빨리 전열을 추슬러 로만 드미트리 님을 도와야만 해.”
* * *
그 무렵.
엘프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머릿수를 앞세워 밀고 들어오는 오크들에 의해, 엘프들의 영역은 이미 상당 부분 함락된 상태였다.
“공격해!”
“적들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팟팟팟-
화살이 발사되었다.
세계수의 기운으로 형태만 유지되는 앙상한 나무 위에서, 엘프들이 날랜 움직임으로 이동하며 화살을 발사했다.
퍽.
“쿠엑.”
“취익, 물러나지 마라!”
화살에 맞은 오크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벌써 그렇게 죽어 나간 오크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지만, 오크들은 동족들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득달같이 밀려들었다.
한때는 엘프들의 숲이라고 불리던 공간.
이곳에서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들의 숫자는 약 일만이었다.
한 엘프가 화살을 발사해 3~4명에 오크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그락사르를 따르는 오크들은 그보다 2배 이상 많은 숫자를 자랑했다.
인해전술(人海戰術).
결말이 예상되는 싸움이었다.
그락사르는, 앞을 막아서는 엘프 전사의 머리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콰직.
“취익, 가소로운 녀석.”
피가 튀었다.
그락사르는 몸 전체가 피로 얼룩졌다.
그간의 싸움.
항상 선두에 섰고, 가장 강해 보이는 적들을 직접 쓰러트렸다.
그락사르는 특별한 존재였다.
무기라는 것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마나를 깨우쳤고, 자신을 깔보던 오크 전사들은 그락사르에게 패배하며 그가 최강임을 인정했다.
역대 최고의 오크 로드.
무력으로든 지력으로든, 그를 오크 로드로 추대하는 존재들은 그락사르의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했을 때부터, 그락사르는 아르카디아의 정벌을 꿈꾸었다.
멍청한 이종족들은 진실을 몰랐다.
이사벨이 실종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으로 인해 아르카디아는 전쟁으로 물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취익, 진군하라! 물러서지 마라!”
콰르르르르릉.
오라를 폭발시켰다.
종족 특유의 동화 능력으로 오크들에게 힘을 부여하며, 거대한 도끼를 힘껏 던졌다.
콰드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도끼에 걸리는 모든 나무가 부서졌다.
나무 위를 오가던 엘프들은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고, 한 엘프당 서너 마리의 오크들이 달려들면서 그들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비명이 들렸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엘프마저도 무너진다면, 아르카디아에서 오크들에 대항할 존재는 없었다.
그때였다.
“크악!”
“으아악!”
후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락사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들려서는 안 될 소리였다.
엘프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상황인데, 대체 누가 뒤에서 오크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취익, 기습 공격입니다! 인간들이 후방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취익, 인간이라고?”
한 오크의 보고.
그락사르의 시선이 후방을 향했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루나 왕국은 이미 멸망했다.
그들은 아르카디아에서 유일하게 인간들이 만든 나라였고, 그들 외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루나의 병사들이 심문 끝에 거론했던 존재.
끝없는 산맥을 넘어왔다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인간이 이끄는 30명 정도의 병력.
마침내.
후방의 풍경이 보였다.
루나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에, 그락사르는 표정이 굳었다.
‘설마.’
확실했다.
루나의 병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칼로트의 일만 병력이 당했다는 의미였다.
그 말인즉, 이름도 알지 못하는 끝없는 산맥 너머의 인간이 일만의 차이를 뒤집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락사르의 계획에는 존재하지 않는 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