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4화 (334/615)

334화 30명의 지원군 (4)

퍽.

칼로트를 바닥에 내던졌다.

두 팔을 잃어 균형을 잡지 못하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오크들의 지휘관으로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비겁하게 수하들을 버리고 도망쳤고, 루나의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본인은 살려 달라는 거래를 제안했다. 전쟁은 반드시 그 과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나는 이 녀석을 처형(處刑)할 생각이고, 그 칼자루는 너희에게 주겠다.”

사람들이 당황했다.

예상지 못한 전개였다.

“누가 그 칼자루를 쥐겠는가.”

검을 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검 중 하나였고, 주인을 알 수 없는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아르카디아의 사람들은 평화 속에서 살았고, 이와 같은 극단적인 복수는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잘못을 저지르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벌했다.

이사벨이 재판을 주관했고, 신의 심판에 따라 죽음보다는 노역을 부과했다. 그래서였을까.

방금까지는 광기에 물든 얼굴로 오크들을 공격했던 사람들이, 막상 판을 깔아 주자 로만 드미트리가 내민 검을 받아들지 못했다.

“끄윽, 끄윽.”

칼로트가 바닥을 기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그 모습에,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스미스였다.

칼로트에게 친구를 잃은 사내.

그가 검을 받아 들었다.

차갑고 섬뜩한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스미스는 망설임 없이 칼로트의 다리를 찍어 버렸다.

콱!

“크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칼로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황급히 몸을 돌았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스미스를 올려다보았다.

스미스의 표정은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간의 슬픔이 밀려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귀(惡鬼)처럼 일그러진 얼굴은 칼로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너 때문에 내 친구들, 내 동료들이 죽었어. 생명체라면 개미 새끼도 죽이지 못하는 착한 녀석들이었는데, 넌 네가 굶주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들의 살점을 발라 먹었어.”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심하게 깨물었는지, 이빨이 부서지고 피가 흘렀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냐고!”

푹.

배를 찔렀다.

칼로트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잃은 팔목을 이리저리 휘젓자, 스미스는 얼굴이 밀려나는 와중에도 수차례 복부를 찔러 버렸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칼로트가 아무리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도, 그가 루나의 사람들을 대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개새끼들! 좆 같은 새끼들! 우리 다 같이 살 수 있었잖아? 씨발, 그럴 수 있었잖아?!”

푹.

푹푹.

폭력이 거세졌다.

분노는 이성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고, 스미스는 피로 물든 얼굴로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칼로트도 반항하지 못했다.

아직 죽지 않아서 흐릿한 눈동자가 옅게 떨렸지만, 뜰썩이는 몸은 반항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분노가 해소되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의 사람들은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건만, 그간의 평화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괴성을 질렀다.

상대는 더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어떤 이들은 시선을 피했다.

어떤 이들은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 이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칼로트는 이미 죽었습니다.”

축 늘어진 칼로트.

케이든은 더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다.

* * *

참담했다.

마음이 아팠다.

스미스는 평범한 사내였다.

루나의 병사로서 사람들을 챙기는 일에 앞장섰던 좋은 청년이, 지금은 미치광이의 얼굴로 칼로트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타락하고 있었다.

광기로 물들어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케이든은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왜. 이 광경이 잔인한가?”

“……그게 아닙니다. 더는, 분노로 인해 스미스가 타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을 뿐입니다.”

“타락이라.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시선을 돌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말해 봐. 너는 오크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지?”

여성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토해냈다.

“제 남편과 아들이 오크들에게 잡아먹혔어요. 아들을 지키려던 남편의 사지가 찢겨 나가는 모습을, 저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로만 드미트리 님. 저는 이 상황이 조금도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크들은, 아니 그 악마들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다른 사람을 보았다.

그녀가 받은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젊은 청년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제 친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한 명은 곧 결혼을 앞두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노모를 모시는 착한 녀석이었는데, 루나를 위해 싸우다가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병사로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르카디아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심으로 오크들의 안위를 걱정했는데, 그들은 굶주리자마자 우리를 식량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들 악에 받쳤다.

평화는 끝났다.

칼자루를 쥐지 않았을 뿐, 그들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표정을 보였다.

다시.

케이든을 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눈앞의 현실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케이든. 평화를 추구하던 아르카디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경험했고, 그들이 과거를 딛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을 선사한 존재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받아 내야만 한다. 적들의 시체를 짓밟고, 그 위에 침을 뱉어야만. 앞으로 루나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

전쟁은.

비윤리적인 행위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나의 요새 너머로, 너희가 겪었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만하자니. 너는 오크 하나를 난도질한 것으로 분노가 충분히 해소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본인이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나가 정녕 평화를 되찾길 바란다면. 적에게 같잖은 자비를 베풀지 마라.”

세상이 변했다.

전쟁이 벌어진 순간부터.

루나의 평화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무력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그게, 앞으로 너희가 따를 드미트리의 방식이다.”

* * *

칼로트는 죽었다.

그 위로 얼굴을 떨군 채로 흐느끼는 스미스의 모습에, 케이든은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이 옳아. 이제 아르카디아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복수에 성공했다.

스미스는 얼굴과 몸이 피로 흥건히 물들 정도로 충분한 고통을 선사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얼굴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건 마치 괴성과도 같았다.

복수에 성공했다는 기쁨이 아니라, 이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렇게라도 감정을 표출해야 했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해 오크들을 토벌한다면.

스미스는 옛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아니면 잠을 자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포크를 내려놓을 것이고, 일을 멈출 것이고, 악몽을 꾼 사람처럼 식은땀으로 물든 얼굴로 잠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낙인(烙印)과도 같았다.

앞으로 스미스가 살아갈 날에, 좋은 것만 보고 생각하던 평화로운 날은 허락되지 않았다.

루나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오크들이 멸망한다고 한들.

더는 다른 종족들을 믿을 수 없었다.

과거의 아르카디아는 특별한 제약 없이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지만, 현재의 아르카디아는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고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선례가 불신을 낳았다.

똑같은 상황도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불신은 분란을 낳아 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하늘을 보았다.

눈이 내렸다.

세상이 얼어붙어도 아르카디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괴물이 되기 위해서는 나도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뼈를 찌르는 말이었다.

적은 인간들의 살점을 발라 먹어 치우는데.

그것에 복수하는 행위도 잔인하다면서 시선을 돌린다면, 이 전쟁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루나를 위한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모든 짐을 떠안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 악귀가 되어야만 루나를 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케이든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신자로서 다짐했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갈림길에 서 있는 지금, 그는 루나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죄송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는 사과일까.

확실한 것은.

이사벨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루나의 위기를 같이 하지 않았던 그녀는, 어떤 이유든 간에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을 대신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 * *

하루.

휴식을 취했다.

말이 휴식이지, 내부를 정리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그냥 지나가 버렸다.

다음 날.

수뇌부 회의가 진행되었다.

케이든은 루나의 정보통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말했다.

“처음에만 해도 그락사르는 저장고를 공격하며 식량 확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었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루나의 요새를 점령한 이후, 그락사르는 칼로트의 1만 병력을 남기고 곧바로 동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정확한 상황은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이동한 방향을 보았을 때 엘프들의 영역을 공격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 그락사르가 이동한 방향에 엘프들의 영역이 있으며, 세계수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엘프들은 루나 왕국과 오크를 포함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루나의 요새를 무너트린 지금. 엘프 종족마저 처리한다면, 사실상 아르카디아에서 오크를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케이든과 맥버니의 대화였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병력을 움직여야만 했다.

엘프들의 세력이 건재할 때 그들과 힘을 합쳐야만, 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병력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겨우 하루 동안.

아르카디아의 기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현재 아르카디아의 폭설(暴雪)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정도의 눈을 뚫고 이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어떻게 이동한다고 한들 지금과 같은 기후는 오크들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그들은 ‘화이트 울프’를 다룹니다. 눈이 아무리 쌓여도 그 위를 민첩하게 움직이는 화이트 울프의 능력이라면, 설원에서 맞닥트렸을 때 저희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하필 지금,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꿇린 것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루나의 기술력은 눈에서 싸우는 방식을 만들었지만, 그것도 이만한 폭설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전쟁을 대비했더라면.

오크들이 주변 종족들을 공격할 때 곧바로 다른 종족과 연합하여 대항했을 텐데, 사태를 파악하느라고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엘프들의 경우에는 ‘세계수의 영역’을 떠나지 않는 존재들.

루나의 요새를 먼저 공격한 것은, 그락사르가 아르카디아의 허점을 완벽하게 공략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은 시간의 싸움이다. 아직 엘프들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락사르가 칼로트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지금이야말로 상황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다. 폭설이 내린다고 해서 우리는 이곳에 남지 않을 것이다.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저장고를 비롯한 포로들을 해방하고, 나머지 한쪽은 내가 병력을 진두지휘하여 곧바로 ‘엘프들의 영역’으로 떠날 것이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만, 폭설을 뚫고 이동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케이든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악귀가 되기를 각오했다.

루나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피를 뒤집어쓸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무모한 판단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케이든을 보았다.

“케이든. 처음 드미트리에 도움을 청했을 때, 너는 루나가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극복하는 여러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지. 지금껏 네가 알고 있던 상식은 모두 버려라. 겨우 폭설과 같은 흔한 변수조차 대응하지 못하는 방법이라면, 아르카디아는 안락한 현실에 안일하게 살았을 뿐이다.”

루나.

그들은 드미트리에 귀속되었다.

앞으로 아르카디아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루나의 안일한 체계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뒤. 루나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라. 내가 너희에게, 처음부터 루나가 추구했어야 할 생존의 방식을 말해 주겠다. 그때도 폭설 따위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네 조언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안을 찾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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