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아르카디아의 붕괴 (2)
백중혁이 천마의 자리에 오르고 1년 뒤.
문제가 발생했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경쟁에서 겁쟁이처럼 도망쳤던 형제 중 한 명이, 이전 권력의 잔당들과 규합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북해빙궁에 몸을 의탁했다.
백중혁의 배다른 형제였던 존재의 어미가, 북해빙궁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백진명이 살아 있는 한, 백중혁은 아직 마교의 완벽한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북해의 땅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목적은 당장 백중혁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었다.
백중혁은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고, 북해빙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천마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부각해 권력의 콩고물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타협을 통해 마교로의 복귀를 바랐고, 백중혁으로서도 북해의 땅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신들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북해.
그곳은 금단(禁斷)의 영역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무림의 역사는, 절대 북해의 땅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미트리의 수뇌부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마교의 수뇌부들도 둘로 나뉘어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백진명을 죽여야 합니다. 그들이 마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백진명은 자신이 위험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건 북해를 믿기 때문입니다. 마교가 아무리 강대한 세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북해의 땅에 들어가 백진명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떤 희생을 치르든, 반드시 처리해야만 합니다!”
“그러다가 적들에게 당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난리가 났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백진명의 존재는 마교의 근간을 뒤흔들었지만, 매서운 추위와 무릎 위까지 눈이 차오르는 북해의 땅은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북해는 단 한 번도 적에게 함락당하지 않았다.
북해빙궁의 사람들은 북해의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았고, 적들이 북해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정면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치고빠지는 방식으로 서서히 상대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체력이 떨어졌을 때.
그때를 노렸다.
북해의 환경에 특화되어 있는 북해의 무공은, 어떤 적을 상대하든 북해에서만큼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백진명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북해에 몸을 숨긴다면, 백중혁이라 할지라도 선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만약에.
백중혁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면, 그때는 어쩌면 천마의 자리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날.
백중혁은 말했다.
“나의 마교에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병력을 일으켰다.
북해의 환경이 가혹하다고 해서 그들을 예외로 둔다면, 백중혁은 자신의 지위에 균열이 생겨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백진명을 처단하기 위해서 북해의 땅에 발을 들였고, 그때부터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눈이 피로 물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확실히 북해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고, 눈 위를 날아다니는 북해의 무사들은 강력했다.
하지만.
백중혁이 눈보라를 헤치고 북해빙궁에 도달했을 때.
적들은 깨달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른 백중혁은, 북해와 같은 어려움을 수도 없이 극복한 존재라는 것을.
경쟁을 회피했던 백진명과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백중혁은 북해빙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적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뒤로하고 겁에 질린 백진명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북해빙궁.
백진명과 같이 그들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북해빙궁의 무공이 불타오르는 성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말했지만, 진실은 그와 달랐다.
백중혁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교의 보고 속에.
북해빙궁의 역사는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다.
* * *
북해.
아르카디아.
비슷한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콘라드 자작이 말하는 추위로부터 비롯되는 위험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해빙궁.
그들은 추위를 완벽하게 다루었다.
단순히 얼음 같은 기운을 활용한 무공을 떠나서,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눈 속에서 식량을 구하는 법, 눈 속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는 법, 눈 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법 등등.
북해의 땅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체계를 만들었다.
그 말인즉.
아르카디아로 넘어갔을 때 생겨나는 문제점에, 추위는 결정을 망설일 만큼의 요소라고 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번 일에서 중요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방금까지 격렬하게 의견을 대립하다가도,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끝없는 산맥 너머. 아르카디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만약 샐러맨더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의 세계를 예외로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끝없는 산맥 지하에 자리를 잡은 드워프들,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여왕 이사벨과 그녀의 병사들, 그리고 케이든까지. 그들은 아르카디아도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세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고 아르카디아의 오크들이 끝없는 산맥을 넘어오는 날이 찾아오겠지.”
실제로.
백중혁은 중원 무림을 제외한 다른 세상을 존중해 주었다.
북해빙궁이 만약 새외무림(塞外武林)의 영역으로 만족했다면, 그들은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을 넘었고.
그들을 무너트렸다.
아르카디아의 이름이 반복해서 들리는 것은, 그들 또한 정벌의 영역에 발을 들였음을 의미했다.
“아르카디아는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케이든이 나타나고, 그가 오크의 존재를 언급한 순간부터, 드미트리의 앞날에 그들의 존재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케이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끝없는 산맥 너머를 드미트리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르카디아의 오크들을 쓸어 버리고 그곳을 관리할 ‘루나 왕국’과 같은 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과도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조건부로 승낙할 생각이다.”
최우선 조건.
위험을 배제하는 것이다.
루나 왕국의 안위를 위해, 드미트리가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첫 번째. 루나 왕국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들을 속국(屬國)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두 번째. 끝없는 산맥을 단시간에 이동할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제안을 거절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펠릭스, 끝없는 산맥 너머에서 드미트리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하면 몇 명을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지?”
“……30명이 한계입니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그 이상의 인원은 힘들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드미트리에서는 나를 포함한 30명의 인원만 아르카디아로 떠난다. 그들의 요청대로 오크들의 토벌을 최우선으로 하되, 드미트리에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면 곧바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할 것이다.”
세 가지의 조건.
그것들은 전적으로, 드미트리를 위한 안배였다.
* * *
조건을 전달했다.
겨우 30명.
그리고 언제든 발을 빼겠다는 조건.
케이든으로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지만, 그렇다고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일단 30명 중에 로만 드미트리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루나 왕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락사르를 상대할 존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 괴물 같은 존재만 쓰러트려도, 끝없는 산맥을 넘어온 가치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빠르게 루나 왕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마련해 두었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라.”
“사실 루나 왕국은 샐러맨더 대륙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끝없는 산맥에 ‘텔레포트 포인트’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끝없는 산맥을 넘어오는 길에 텔레포트 포인트가 설치되지 않은 부근에는 일회성 좌표를 찍어 두었으니, 약 일주일 정도 포인트를 활용해 이동하면 아르카디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루나 왕국의 상황이 위험한 것은 맞습니다만, 준비할 시간이 일주일은 더 필요합니다.”
일주일.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빨리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르카디아의 매서운 추위는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카디아의 추위는 일반적인 기준을 완전히 넘어섭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특별히 제작한 약물을 통해서 한기에 적응한 뒤에, 눈 속에서 생존하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하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지.”
“로만 드미트리 님.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분명히 위험…….”
“아니, 준비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드미트리는 내가 알아서 추위에 대비할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겠다. 우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출발은 예정도로 일주일 뒤에 떠나는 것으로 하겠다.”
말문이 막혔다.
정말 위험한 일이다.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지만, 루나 왕국은 절대적인 을(乙)의 입장이기에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드미트리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케이든은 한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 * *
일주일.
속이 탔다.
케이든은 수시로, 로만 드미트리를 다시 찾아가 아르카디아의 위험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극한의 환경을 만만히 보았다간 큰일이 날 텐데.’
매서운 추위.
펑펑 내리는 눈.
아르카디아는 샐러맨더와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극심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할 테고, 문제는 오크들과 맞닥트렸을 때의 상황이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은 발이 푹푹 박힌다.
아르카디아에서 살아온 오크들은 눈에서 싸우는 방법을 알기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당황해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오라가 얼어붙는 현상도 있었다.
그래서 오라를 발현하는 것 자체도 마나의 활용이 중요한데, 스스로 준비한다고 말하니 답답했다.
드미트리의 안위를 떠나.
루나 왕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였다.
수차례 망설이는 마음이 들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 설득하지는 못했다.
상대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가르친다고 한들 소귀에 경 읽기다.
그렇기에.
아르카디아의 추위를 느끼고 난 이후에, 그때 다시 한번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은.
이곳의 소식을 루나 왕국에 알려야 했다.
삑.
“이쪽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루나 왕국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인원은 30명이고, 준비하는 시간을 합쳐 약 이주일 뒤면 아르카디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시간을 끄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버티십시오.”
통신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메시지가 몇 시간 뒤에 도착하는 방식이었는데, 통신을 받은 존재들은 실망스러운 감정을 보였다.
[케이든. 겨우 30명이라니. 회색 황무지의 오크들은 무려 수만에 달하는데, 30명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다.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해 병력을 더 지원받을 방법은 없겠나.]
“이것도 최선입니다. 드미트리의 입장에서는 저희를 무리하게 도와줄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샐러맨더 대륙은 발할라 제국이 내란의 기미를 보이는 상황이라, 드미트리가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할 경우 그들 또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 이상을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똑같은 상황이었어도, 그렇게까지 타국을 도와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알겠다. 조심히 이동하도록.]
통신 너머.
그들의 실망감은 이해했다.
드미트리는 루나 왕국의 희망이었기에, 30명이라는 숫자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이사벨의 안목을 믿었다.
사실 케이든을 비롯한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지켜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지, 그가 이루었다는 업적은 그리 현실감이 없었다.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도움만 받아 내도 성공이라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로만 드미트리도 루나 행에 합류한다고 했으니,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끝없는 산맥 너머.
아르카디아로 떠날 시간이었다.